“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흔한 시쳇말이지만, 다른 은행이 대형화를 위해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 위험하다고 깎아내리고 자신이 하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은행권의 행태를 한 금융권 인사가 꼬집은 말이다. 한국에서 ‘은행 대형화’라는 말은 그 정도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겠다?
은행 대형화, 그리고 그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국제화를 한꺼번에 포괄하는 ‘메가뱅크(초대형은행)론’이 재점화했다. 주인공은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다. 그는 “우리금융 인수를 검토하겠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겠다”는 도발성 발언을 쏟아내며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KB발 금융 빅뱅 예고’ ‘은행권 감도는 M&A 전운’…. 언론도 자극적인 표현들을 총동원하며 부채질한다.
한쪽에서는 국내 은행 중 총자산이 가장 많은 은행이 세계적으로는 80위권에 그치고 은행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5%에도 못 미치는 현실을 내세우며,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에 진입하려면 제조업에 이어 금융에서도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을 제시한다. 다른 쪽에서는 대형 은행이 무너지면 국민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되는 시스템 리스크가 커지는데, 아직도 진행 중인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을 벌써 망각했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모두 맞는 얘기인 듯한데, 어느 쪽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들어 보인다. 메가뱅크 논의에서 살펴야 할 여러 내용 중에서 일부만 강조하는 불균형 때문이다. 또 복잡한 내용을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조율하는 균형감도 부족하다. 은행 대형화·국제화 논의에서 정말 중요한 의제들이 뒷전으로 밀린 채 ‘번지수’를 제대로 못 찾고 있는 듯하다.
다른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은행 규모가 커지면 자금 조달, 해외 진출 등 여러 측면에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생기면서 유리하다는 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메가뱅크 예찬론자는 많지만, 이런 성공을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는 많지 않다. 큰 은행을 운영할 수 있는 경영 능력과 시스템, 이를 제대로 감시할 수 있는 금융감독이 없다면 너무 커서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투 빅 투 매니지’(too big to manage·大馬不經)의 질곡에 빠져, 대형화가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대형 금융사의 시스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대형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 분리를 골자로 하는 금융개혁(볼커룰)을 추진 중이다. 거대은행이 은행과 비은행(투자은행)을 겸하는 메가뱅크는 이런 국제 흐름에 배치된다. 하지만 은행 부문에 비해 취약한 비은행 부문을 발전시켜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꼭 선진국만 추종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메가뱅크를 통한 비금융 발전 전략의 실효성이다. 한 사모펀드의 대표는 “은행과 비은행 부문은 경영철학과 경영자의 마인드가 너무 다른데도, 은행 부문이 이질적인 비은행 부문까지 주도하며 똑같은 스타일로 경영을 하다 보니, 비은행 부문의 특성이 살지 못하고 경쟁력도 높아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물러난 은행 중역들이 비금융자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를 옮긴 뒤, 금융지주에 기대어 손쉬운 영업을 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대형화·국제화 모두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인데 덩치만 키우면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느냐는 본질적인 의문도 제기된다. 한국 금융산업이 대형화나 국제화를 못한 진짜 이유는 내부 역량의 부족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공개, M&A 등 고부가가치 금융시장이 외국계 금융사의 독무대가 된 게 대표적 사례다. 어윤대 내정자의 잠재적 경쟁자인 하나금융지주의 김승유 회장도 “자본금과 자산 규모를 아무리 늘려도 고객망, 정보력, 인적자원이 없으면 소용없다”면서 “일본이나 중국 은행이 유럽과 미국 은행보다 규모가 작지 않지만 경쟁력이 높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제2금융권의 한 인사도 “대형화·국제화에 성공하려면 우수한 인적자원, 역량 있는 경영진 확보가 우선 과제”라며 “역량 있는 경영진과 직원을 길러내기 위해 어떤 훈련이 필요하고, 최고경영자의 경영철학과 경영 마인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라고 말한다.
문제는 덩치보다 실력메가뱅크의 출현은 소비자와 중소기업에는 오히려 독과점 폐해를 안겨줄 수 있다. 국내 1·2위 금융사인 KB와 우리가 합치면 총자산·예수금·대출금 점유율이 모두 80%를 넘으면서 독과점 우려가 높아져 공정위가 반대할 수 있다.
전체 국가경제 차원에서 금융의 역할과 금융산업의 발전 방향에 관한 논의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동안 대다수 은행 CEO들은 몸집 불리기와 수익 늘리기에 매달려왔다. 어느 한쪽에서 돈이 벌린다 싶으면 너도나도 몰려가는 쏠림 현상이 극심했다. 국가경제 차원에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은행 본연의 기능을 고민하기보다는 당장의 자리 보전을 위해 배당과 주가에만 신경 쓰는 주주가치경영과 단기 수익 위주의 경영에 매몰됐다. 메가뱅크가 출현한 뒤에도 이런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부작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도, 찬성론자나 반대론자 모두 진지한 논의가 없다. 한 구조조정회사의 대표는 “한국 은행들은 본질적으로 내수산업이기 때문에, 수익을 많이 낸다는 것은 결국 우리 국민을 상대로 이자나 수수료를 많이 챙겼다는 것”이라면서 “이런 영업 행태가 과연 박수받을 일이냐”고 꼬집는다.
어윤대 내정자가 ‘메가뱅크’ 공연의 주연 배우라면 청와대와 금융감독 당국은 연출자다. 메가뱅크에 대한 이들의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금융 부실을 해결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하지만 우리은행이 정부 소유로 바뀐 지 10년을 넘어서면서 정부의 민영화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또 외환은행 재매각도 정부로서는 밀린 숙제다. 국내 여론과는 상관없이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을 저지한 것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정부로서는 우리은행 민영화나 외환은행 재매각을 위해 메가뱅크론은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다. 더욱이 신한금융지주가 조흥은행·LG카드 인수로 여력을 소진한 상태에서, 어 내정자의 도발적 행보는 정부와의 사전 교감을 거친 ‘흥행용’으로도 해석된다.
어윤대 주연, 청와대 연출청와대와 금융감독 당국은 더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나 권력 실세를 등에 업은 ‘낙하산’ 인사가 재연되고, 고위 재무관료들의 관치 인사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CEO 자리가 권력이나 관료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금융산업은 결국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4대 시중은행의 최고경영진을 지낸 한 인사는 “지금 자산 300조원짜리 은행의 CEO 선임을 놓고도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앞으로 자산 500조, 600조원짜리 메가뱅크가 나오면 얼마나 더 시끄럽겠느냐”고 탄식한다.
우리나라의 은행에 대해 누구는 이미 충분히 크다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구는 앞으로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역량 문제다. 메카뱅크를 만드는 것이 은행과 한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저절로 높이는 것이 아니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은행과 금융감독 당국, 정치권 모두의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메가뱅크론의 세 주역인 어윤대·김승유 회장과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그리고 연출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특정 대학 동문이다. 한국 금융산업과 경제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논의가 네 명의 동문 손에 달린 현실이 메가뱅크 논의의 기형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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