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읽던 책은 제러미 리프킨의 (민음사, 2005)이었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몰락한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이다. 무엇보다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전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비전은 유럽이 참혹한 현대사의 기억에서 길어낸 것이란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20세기 유럽 현대사’를 다룬 마크 마조워의 신간 (후마니타스 펴냄)은 유럽의 ‘꿈’을 빚어낸 그 ‘암흑’에 대한 철저한 탐사이고 성찰이다.
비례하는 민주주의 지지와 정치 무관심
이미 ‘유럽 공동의 교과서’가 우리에게 소개된 적이 있다. 1997년에 개정판이 나온 (까치, 2002)가 그것이다. 유럽 역사학자 14명이 공동 집필한 이 책에서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다룬 마지막 세 장은 각각 ‘자기파괴를 향하여(1900∼1945)’ ‘분열에서 상호 이해로(1945∼1985)’ ‘통합 유럽을 향하여(1986∼1996)’라고 제목이 붙여졌다. 1998년에 출간된 도 역시 1940년대를 20세기의 분수령으로 본다.
단순한 통계만으로도 그 앞뒤의 두 시기는 확연히 구분된다. 195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 시기에 전쟁이나 국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6천만 명이 넘는 데 반해, 그 이후엔 유고내전을 포함하더라도 1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갈등과 분쟁은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지만, 20세기 전반기 유럽에서 일어난 희생은 적어도 규모에서만큼은 달리 유례가 없다. 현대적 관료체제에 기술이 동원됐기 때문인데, 1870년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사망자가 18만4천 명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800만 명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4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이 정도면 ‘암흑의 대륙’이라는 비유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러한 유혈과 야만의 역사야말로 ‘유러피언 드림’의 밑자리가 아닌가.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이러한 참상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20세기의 역사에서 정치가 경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교훈을 끌어내는 저자는 가치나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혹은 서로 경쟁하는 세 이데올로기의 교전장. 20세기 초 자유주의자 윌슨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향을 꿈꾸었고, 레닌은 해방된 공산주의 사회를 약속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순수 혈통의 종족들이 숭고한 목적을 지향하는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저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질서, 곧 유토피아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실험은 모두 엄청난 희생만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1945년 나치즘의 몰락과 1989년 공산주의의 붕괴는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도 있지만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유럽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이 한편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동반한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이데올로기에 지친 유럽인들이 정치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결과라고 본다. 민주주의에 대한 높은 지지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상관적이며 서로 비례관계에 놓여 있다.
유럽연합은 새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순응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분명 유럽은 변화했다. 많은 교훈을 얻어서라기보다는 시대가 바뀌어서다. 과거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제국, 영토 같은 것이 국가적 안녕에 덜 중요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탓이다. 유럽이 갈등과 경쟁 대신에 협력과 합작을 선택했다면 그것이 자신들의 번영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라는 체제는 정치적 기획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순응’이라는 것이 저자의 냉정한 판단이다. 그렇다면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유럽이 갖고 자랑할 만한 유산이 아니라 이제라도 창안해내야 할 어떤 가치이고 이념이 아닐까? 유럽의 ‘빛’은 그 ‘암흑’이 거꾸로 드러내는 반면교사로서의 빛이다.
로쟈 인터넷 서평꾼 blog.alad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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