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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은 줏대를 유지할까

등록 2008-01-25 00:00 수정 2020-05-03 04:25

6% 성장 약속한 새 정부와 심상치 않은 물가를 잡아야 하는 한국은행의 신경전

▣ 정남구 한겨레 논설위원 jeje@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한은) 본관 로비 벽에는 큰 활자로 ‘물가 안정’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국은행법(한은법)은 “이 법은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한은의 핵심 정책목표가 물가 안정임을 명시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물가 안정을 저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정부의 경제정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한국은행은 정부와 협의하여 물가 안정 목표를 정한다”는 조항도 한은법에 있지만, 물가 안정이 한은의 핵심 정책목표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강만수 발언에 긴장감 고조

통화정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7명으로 구성된 금융통화위원회다. 과거에는 재정경제부(재정경제원) 장관이 금통위 의장이었다. 한은 총재를 제외한 나머지 위원들은 모두 비상근이었다. 지금은 한은 총재가 의장을 맡고 각계에서 추천받은 나머지 6명의 위원도 모두 상근한다. 이런 내용들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한은법 개정에서 확립됐다. 당시 법 개정으로 한은의 독립성이 보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듣곤 했다. 정부 경제정책 목표에 맞춰 통화정책이 춤추곤 했던 까닭이다.

한은의 정책목표를 ‘물가 안정’으로 못박고, 한은의 독립성을 강하게 요구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돈의 가치 안정을 누구보다 바라기 때문이다. 정부가 다른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방치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

물가 안정은 외국인 투자가들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급격한 물가 상승이 이어지고, 경제주체들 사이에 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 심각한 일이 벌어진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임금 근로자의 생활은 어렵게 되고, 그러면 임금 인상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커지게 된다. 미래 수익이 불안하면 기업들도 투자에 소극적이게 된다. 채무자를 채권자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물가 상승은 경제주체들을 채무의존적으로 만들기도 된다. 중앙은행이 경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경기 후퇴기에 중앙은행은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려고 금리를 낮추고 돈을 푼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물가 안정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통화확대 정책을 편다. 물가 안정이 전제되지 않고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까닭이다.

최근 한은의 통화정책을 둘러싸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한은 사이에 미묘한 시각차가 드러나고 있다. 인수위 강만수 경제1분과 간사는 지난 1월9일 “통화정책은 물가는 물론 부동산 시장 안정 등 정부의 정책적 목표와도 부합해야 한다. 한국은행은 민간기구로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주장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98년 한은법 개정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한은이 통화정책의 주도권을 갖는 데 강력히 반대했던 인물이다. 한은 이성태 총재는 이에 대해 “새 정부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해주는 것이 좋은 경제정책을 펼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의 정책목표와 한은의 물가 안정 목표 사이에 앞으로 신경전이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짙다.

새 정부는 집권 5년간 연평균 7%의 성장을 공약했다. 다만 올해는 6%의 성장으로 목표치를 낮춰 잡았다. 한은이나 한국개발연구원은 올해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4%대 후반에 머물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명박 당선자가 무리한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세계 경제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돈을 풀거나, 최소한 돈줄을 죄지는 않아야 한다. 문제는 이미 물가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는 데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2.5% 올랐다. 연간으로 보면 그리 높지 않지만, 추세가 걱정이다. 12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6%나 올랐다. 물가 상승세가 더 가파라질 조짐은 이미 뚜렷하다. 국제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곡물 가격 상승 등으로 수입물가는 두 자릿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소비자물가는 올 상반기 중 더 오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한은으로서는 돈줄을 죄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한 번 비싼 수업료 치러야 하나

경제성장률 수치를 성적표로 보는 경제관료들은 단기적인 경기 부양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기업이나 가계도 단기적인 성과로 정부 정책을 평가하는 경향이 짙다. 무리한 부양책은 늘 큰 후유증을 남겼다.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 100일 계획’이 그랬고,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의 신용카드 붐과 건설경기 부양이 그랬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쉽게 잊어버린다. 정부를 만능한 존재로 여긴다. 경제분석 기관들은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연 5% 수준으로 보고 있다. 새 정부는 그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공약했고,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없는 형편이다. 기대를 거는 국민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또 한 번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나서야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의 상식을 깨닫게 될까 걱정이다. 한은이 멀리 앞을 내다보고,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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