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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왜 유류세 인하를 망설일까

등록 2007-11-16 00:00 수정 2020-05-03 04:25

원유값 상승의 부담을 소비자들이 떠안는 상황이지만 세수 결손과 에너지 효율 문제가 걸림돌

▣ 정남구 한겨레 논설위원 jej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제1차 석유파동은 1973년에 일어났다.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아랍 산유국들이 주도해 만든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떠날 때까지 석유값을 대폭 올리고 석유 생산을 매년 5%씩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발표 당시 배럴당 3달러이던 원유값은 13달러까지 폭등했고, 5년 동안이나 고공 행진을 했다.

2차 석유파동에 비하면 작은 충격

1979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OPEC이 석유값을 올리기도 했지만, ‘이란 혁명’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친미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이란의 호메이니 정부는 석유 수출을 전격 금지했다. 다섯 달 만에 원유값이 배럴당 15달러에서 39달러까지 뛰어올랐다. 2차 석유파동 때 우리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76~79년 사이 연간 9~10%에 이르던 경제성장률이 1979년 6.8%로 떨어졌고, 1980년에는 -1.5%로 급락했다. 마이너스 성장은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우리 경제에 왜 그런 충격을 줬을까? 원유 소비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봐야 한다. 1979년 우리나라 석유 및 석유제품 관련 대외 순지출액(수입액에서 수출액을 뺀 것)은 34억달러가량이었다. 그해 국내총생산 633억달러의 5.4%에 해당한다. 그런데 1980년에는 석유 순지출이 61억4천만달러로 갑절로 늘었고, 국내총생산(638억달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10%에 육박했다. 삽시간에 국내총생산의 4%가 넘는 돈을 추가 지출해야 했던 셈이다.

최근 몇 해 동안 원유값 상승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값은 이제 배럴당 100달러를 넘보고 있다. 석유 생산은 그다지 늘지 않으나, 경제가 급성장하는 중국과 중동 국가들의 석유 소비가 크게 늘고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최근에는 미국이 금리를 내리고, 이에 따라 달러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달러로 결제되는 원유값을 끌어올리고 있다.

원유값 상승으로 우리 경제가 지는 부담은 얼마나 커지고 있을까? 2003년 우리나라의 석유 관련 대외 순지출은 228억달러였다. 2004년에는 272억달러, 2005년에는 356억달러, 그리고 지난해엔 459억달러에 이르렀다. 3년 만에 갑절로 뛰었다. 이를 국내총생산 규모에 견줘보면, 2003년 3.74%에서 2006년 5.17%로 늘었다. 3년 전에 견줘 국내총생산의 1.43%포인트를 더 지출하게 됐다. 2차 석유파동 때에 견주면 원유값 상승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작은 셈이다. 원유값은 많이 올랐지만,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매우 커진 까닭이다.

그러나 원유값 상승에 따른 추가 지출을 누가 부담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유사들은 원유 가격 인상 부담을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떠넘길 수 있다. 회사 수가 적고 암묵적 담합 구조가 형성돼 있어 판매 경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석유를 원료로 쓰는 생산자들 가운데는 원료 가격 인상을 최종 소비재 가격에 다 전가시키지 못하고 일부 부담을 떠안기도 한다. 그래도 국제유가 인상 부담은 사실상 최종 소비자들이 대부분 떠안고 있다. 유류세 인하 요구가 나오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야의 대통령 후보들은 유류세를 10~20% 내리겠다고 공약했다. 교통세, 특소세, 주행세, 교육세, 부가세를 모두 합해 유류세 총수입은 지난해 23조5136억원이다. 총 국세의 16.9%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 유류세를 내린다는 것은 국제유가 인상으로 인한 부담의 일부를 정부가 세수를 줄여 떠안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그만큼 소비 여력이 생겨, 내수 감소를 막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유류세는 소비세인 만큼 소득이나 재산이 많을 수록 세금을 많이 내는 소득세나 재산세에 견줘 나쁜 세금이기도 하다.

지금 정부의 태도가 훨신 책임감 있다

그런데 왜 정부는 이를 망설이는 것일까? 유류세 인하로 인한 세수 결손을 다른 좋은 세금을 더 거둬 보충하자는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 내린 세금은 다시 올리기 어렵다. 세수 결손이 장기화될 수 있다. 결국 국민이 느끼지 못하게 조용히 세금을 더 걷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류세 인하는 서민 처지에서 볼 때 ‘기분만 잠시 좋게 해주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유류세 인하는 석유 사용을 줄이자는 정책 목표를 되돌릴 위험도 크다. 석유는 가격이 변해도 소비량에 큰 변화가 없는 가격 비탄력적인 상품이긴 하다. 하지만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차량 1대당 휘발유 소비량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유 생산국이 아니면서도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쓰는 나라다. 원유 고갈 시기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고,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노력에 따라 앞으로 화석 에너지를 많이 쓰는 나라는 그만큼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원유값 상승은 고통스럽지만, 생산자와 소비자로 하여금 에너지 효율을 높이도록 압박한다. 그런 상황에서 유류세를 내린다는 것은 막 시작되려는 석유 소비 절감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위험이 크다. 일괄적으로 내리기보다는 꼭 지원이 필요한 대상을 선별해, 보조금을 주는 게 효과적이다. 적어도 유류세 논란에 한정해서 보면, 지금 정부의 태도가 훨씬 책임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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