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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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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드, 미국의 심장을 겨냥하다

1993년 초 미국에서 발생한 2건의 연쇄 테러
빈라덴과 알카에다, 미 대테러 레이더망에 포착되다
등록 2014-01-18 14:59 수정 2020-05-03 04:27

알카에다가 미군이 거쳐가던 예멘 아덴의 호텔을 표적으로 벌인 첫 폭탄테러 공격이 주목받지 못하고 한 달여가 흐른 1993년 1월25일 아침, 미국 버지니아 랭글리의 중앙정보국(CIA) 청사 정문 앞. 출근길인 CIA 직원을 태운 차량들이 검문을 기다리며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겨울 아침의 춥고도 명징한 공기 속에서 서행하던 차량 중 갈색 왜건이 왼편 인도 쪽에 정차했다. 문이 열렸다. 서남아계 외모의 20대 청년의 손에는 AK47 자동소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지나치는 폴크스바겐 골프 차량을 향해 소총을 난사했다. 청년은 차로 다가가 이미 숨진 차 안의 CIA 직원 프랭크 달링을 향해 세 차례 더 확인 사살을 했다. 옆자리의 부인은 그냥 지나쳤다. 청년은 차도로 나서 소총을 더 난사해, CIA 직원 1명을 더 죽이고 3명을 부상시켰다. 근처에 더 이상 차량이 없자, 그는 자신의 차를 타고 몇 마일 떨어진 맥린 공원으로 가서 숨었다. 자신을 찾는 움직임이 없자,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범행 도구인 소총을 소파 밑에 숨겼다. 인근 데이즈인 호텔로 가서 하루를 묶었다. 미르 아말 카시(당시 28살)라는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출신의 이 청년은 미리 예약한 비행기표로 다음날 파키스탄으로 유유히 떠났다.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뒤 유유히 탈출

한 달 뒤인 2월26일 낮 12시18분께 점심을 먹으려는 인파가 오가는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지하 2층 주차장. 엄청난 굉음과 폭발로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폭발점을 중심으로 지하 1~4층까지 구멍이 뚫리면서, 6명이 사망하고 약 1천 명이 경상을 입었다. 약 5억달러의 피해가 발생했다.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출신인 램지 유세프(당시 24살)는 앞서 공범들과 함께 두 대의 차량에 약 400달러밖에 들지 않은 제조 폭탄을 싣고 왔다. 그는 타이머를 작동시킨 뒤 몰고 온 차량 한 대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유세프 역시 그날 밤 파키스탄항공 비행기를 타고 카라치로 간 뒤 사라졌다.
연이은 두 건의 테러에 미국은 경악했다. 미국의 심장부가 공격당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테러라는 점에서 더 경악해야 했으나, 당시엔 몰랐다. 카시와 유세프는 미국의 적성 국가나 단체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테러를 이슬람주의의 지하드를 벌인다는 개인적 결단으로 수행했다. 나중에 명명되는 ‘외로운 늑대’형의 이슬람주의 지하디스트였다. 물론 그들이 테러를 개인 차원으로 수행하기까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시작돼 발전되던 초국적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네트워크의 영향이 있었다.
카시와 유세프는 이슬람 세계의 분쟁 현장에서 자라나며 이를 자양분으로 지하디스트로 변신한 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의 일반적인 청년에 비하면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서방에서 대학 교육까지 받고 번듯한 직장을 다녔다. 이들은 서방국가의 모스크에서 과격한 이슬람주의 성직자들로부터 감화받아 지하디스트로 변신한다. 10여 년 뒤 9·11 테러를 실행한 독일의 이슬람계 청년들인 ‘함부르크그룹’은 이들의 미래였다.
아프간 국경과 차로 몇 시간 거리인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의 주도 퀘타에서 태어난 카시는 아버지가 호텔과 넓은 농장을 소유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파키스탄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독일 등 외국을 전전하다가 1991년 미국 버지니아에 정착해 배송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그는 당시 <cnn>으로 중계되던 걸프전,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분쟁을 보며 가슴속에 분노를 쌓았다. 그는 룸메이트에게 “백악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을 대상으로 ‘무언가 큰일’을 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결국 그는 많은 무슬림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믿은 주변의 CIA를 대상으로 테러를 계획하고 즉각 실행에 옮겼다. 그가 준비한 것이라곤 인근 총기상에서 구입한 AK47 자동소총과 CIA로 이어지는 버지니아 123번 국도 답사가 전부였다.

서서히 포착되는 초국적 이슬람주의

유세프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네트워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엔지니어인 아버지는 오일붐이 일던 쿠웨이트로 가서 유세프를 낳고 교육을 시켰다. 쿠웨이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유세프는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무장정파인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빈라덴의 정치적 스승인 압둘라 아잠에게서 직접적으로 아프간 성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지하디스트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전기공학 학사 학위를 따는 등 글로벌 교육을 받으며 영어·아랍어·우르드어·발루치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유세프 인생의 전환점은 걸프전이었다.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점령을 피해 유세프의 가족은 파키스탄으로 돌아왔고, 유세프는 거기서 아프간전에 참전한 삼촌들의 영향을 받아 아프간 무자헤딘 캠프에 들어갔다. 삼촌 중 한 명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서방 정보기관들이 ‘KSM’이라 부르던 9·11 테러의 기획자였다. 1990년 말 아랍 출신 무자헤딘을 위한 지하디스트 캠프에 들어간 유세프는 공학을 전공한 경력을 바탕으로 폭탄 제조 등에 우수한 자질을 보였다. 그 캠프에서 약 6개월 동안 훈련받은 유세프는 파키스탄정보부가 직접 운영하는 게릴라 캠프에 선발된다. 미국 CIA가 제공한 시한장치와 플라스틱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그가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에 사용했던 기술이다. 이때 그는 빈라덴과도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9월 유세프는 위조 여권을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향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둘러보고 테러 대상을 물색한 뒤 파키스탄에 다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세계무역센터를 곧바로 테러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그 건물을 완전히 붕괴시켜, 약 25만 명의 사망자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에 투하된 원폭 피해자를 능가하는 사망자 수다. 유세프는 뉴욕의 이슬람주의 세력을 이끌고 있던 이집트 출신의 시각장애인 이슬람 전도사 셰이크 오마르 압델 라만을 접촉했으나, 아무도 그가 필요로 하는 자금과 장비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에 입국한 지 5개월 만에 결국 자신이 직접 포섭한 요르단 친구 이야드 이스모일만을 대동하고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미국 심장부를 겨냥한 연이은 두 건의 테러는 범인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수행한 것이지만, 수사 과정에서 범인들이 거쳐가고 접촉한 대상들이 밝혀지면서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초국적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네트워크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무역센터 테러 수사는 알카에다라는 조직이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일어나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즉각 국가안보위에 대응을 총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986년 CIA 내에 창설된 대테러센터는 이때부터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테러 대응의 구심점이 된다. 연방수사국(FBI)은 세계무역센터 현장에 남겨진 범인의 트럭 잔해를 단서로 며칠 안에 유세프가 접촉한 모하메드 살라메라는 인물을 체포하면서 주범이 유세프임을 파악했다.
특히 FBI는 1989년 미국의 극우 유대인 랍비인 메이르 카하네의 암살범 엘 사이드 노사이르를 체포했을 때 압수한 47박스 분량의 각종 자료를 다시 분석하면서 아프간의 무자헤딘 훈련캠프와 나중에 알카에다로 밝혀지는 초국적 이슬람주의 무장조직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게 됐다. 노사이르에게 자금을 제공한 빈라덴의 이름도 나오면서, 빈라덴이 세계무역센터 테러에 관여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 정보를 일부 공유한 CIA는 1993년 4월2일 빈라덴이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의를 진작시키려고 다른 개인들이나 정부와 협력하는 독립적인 활동가”라는 보고서를 돌렸다.

CIA, 빈라덴 추적 전담반 꾸리다

그해 8월 국무부의 정보조사국에 파견된 CIA의 분석관 지나 베네트는 아프간·파키스탄·수단·예멘 등지에서 “수백 명의 지하디스트를 양성해 훈련시키고 있는”는 빈라덴에 관한 첫 본격적 경고를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빈라덴이 세계무역센터 테러의 후원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 그녀는 그해 빈라덴이 1980년대에 알카에다라는 조직을 만들었음을 지적하는 분석평가서도 내놨다. 미국 당국에 알카에다라는 이름이 처음 포착된 순간이었고, 빈라덴이 이 조직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보고된 것이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수없이 양산되는 테러 보고서의 하나로 치부됐을 뿐이다. 다만, 미국의 정보 당국은 국가나 세속주의 조직이 아닌 이슬람주의 지하디스트들이 독립적인 초국적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천천히 파악하게 됐다. 빈라덴과 알카에다의 본격적인 연관성은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실체가 잡힌다.
유세프는 1995년 1월 파키스탄에서 체포된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10대 이상의 민간 항공기에 폭탄을 설치해 동시에 추락시키려는 이른바 ‘마닐라 공항 음모’가 필리핀 경찰에 발각되면서 행방이 드러난 그는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가 체포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삼촌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가 이 사건을 기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카타르에 있던 모하메드는 다시 도주한다. 그가 관여된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와 마닐라 공항 음모를 합친 것이 결국 9·11 테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유세프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보 당국은 수단에 둥지를 튼 빈라덴이 마닐라 공항 음모에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등 각종 테러 배후의 후원자임을 더 확실히 파악했다. 대테러센터 내에 ‘테러리스트 자금 연계반’이라는 간판을 달고 ‘알렉스테이션’이라는 암호를 붙인 조직은 사실상 빈라덴 추적 전담반으로 바뀐다.
알렉스테이션에 파견된 FBI 특별수사관 대니얼 콜먼은 1996년 11월 독일의 미군기지 안에 있는 안가를 방문했다. 수단 하르툼에서 빈라덴을 위해 일했다는 자말 알파들이라는 수단의 정보협력자를 심문하기 위해서였다. 파들은 콜먼이 제시하는 빈라덴 측근들의 사진을 보고서 그들의 신원을 쉽게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미화했다. 그가 거짓말하고 있음을 파악한 콜먼은 왜 빈라덴의 곁을 떠났는지 집요하게 추궁했다. 며칠간의 신문 끝에 파들은 결국 자신이 빈라덴의 돈 10만달러를 횡령했음을 실토하며 충격적인 얘기를 꺼냈다. 알카에다라는 조직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알카에다의 훈련캠프와 숨겨진 세포조직들, 빈라덴이 핵무기와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획득하려는 시도, 그리고 알카에다가 1992년 예멘 아덴 호텔의 테러와 소말리아에서의 미군 블랙호크 헬기 격추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파들은 알카에다의 조직원 이름과 그 조직도까지 그렸다. 1993년부터 빈라덴을 추적해온 콜먼은 비로소 빈라덴과 그 조직에 대한 의문이 풀리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빈라덴과 알카에다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미국에 성전 선포한 빈라덴

하지만 빈라덴은 이미 6개월 전인 5월18일 수단을 떠나 아프간에 자리를 잡고 미국의 추적망에서 더 멀리 달아나 있었다. 그리고 8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속 주둔 중인 미군을 겨냥해 “당신들이 우리 땅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한 당신들을 테러하는 것이 우리의 합법적인 권리이고 도덕적인 의무다. …우리 청년들은 당신들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당신들이 목이 부러져 죽어나가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라는 미국에 대한 성전을 요구하는 이슬람 칙령인 파트와를 발표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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