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염병(傳染病)은 ‘Contagion’ 또는 ‘Contagious Disease’라고 영역된다. 라틴어 어원으로 ‘터치’(touch·만지는 것)라는 뜻이 담겼다. 아픈 사람에게서 건강한 사람으로 접촉을 통해 옮겨진다. 유럽에서 전염을 뜻하는 단어 ‘Contagio’가 만들어진 것은 14세기 말이다. 최소한 흑사병(페스트) 이후부터 쓰인 단어로, 고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서양의학에서 질병이 아픈 사람에게서 건강한 사람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이 부족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물론 고대 서양에서 전파로 병이 옮겨질 수 있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시대에 살던 그리스 의사 갈렌(Galen·129~200년) 등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질병의 씨앗(seed)’이란 말은 질병의 상호소통성을 담은 초기 용어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전염의 의미에 해당하거나 오늘날 세균처럼 ‘씨앗’을 상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렌은 ‘씨앗’이 환자로부터 나와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공기 등 주변 환경에 떠돌아다니며 질병을 일으키는 일종의 미립자처럼 설명했다. 혹자는 서양에서 전염이란 개념이 부족했음과 비교해 동양 도가에서 결핵의 원인으로 벌레란 의미의 ‘충’(蟲)을 언급했음을 들며, 동양이 서양보다 세균 이론에서 앞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충’은 기생충인지 구체적인 물체를 상상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도가의 전설에서 미신처럼 상상된 동물에 가깝다는 게 일반론이다.
오늘날 전염의 의미와 유사한 아이디어가 등장한 것은 16세기 유럽에서 새로운 유행성 질병, 매독이 나타난 이후다. 매독은 인쇄술이 발달한 뒤 나타난 첫 유행병이었고, 당시 신대륙 발견 뒤 등장한 신종 감염병이었다. 매독의 유래에 관해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고, 아직 정확하게 원인이 밝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매독’(Syphilis)이란 단어를 만든 이탈리아 의사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는 질병의 발생 원인 중 하나로 질병 상처에서 일종의 부패성 물질이 전파돼 질병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세균 이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질병의 등장이 질병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진했다.
신이 내린 벌이냐 선물이냐
그렇다면 유행병의 경우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는다는 이해가 아닌 어떤 이해가 존재했을까? 고대의 이해에 따르면, 질병은 아픈 사람에게서 생겨났다기보다 불결하거나 오염된 환경에서 발생했다. 감염병(Infectious Disease)이란 단어는 라틴어 어원으로 불결함, 더러움 등의 뜻이 담겼다. 상처가 불결하고 나쁜 기운에 감염돼 부패하고 오염된 결과가 질병이라는 것이다. 대규모 유행병은 오염되고 나쁜 기운이 다량으로 발생해 유행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 됐다.
비록 유행병이 사람에게서 바로 파생되거나 전파된다고 여기지 않았더라도 ‘인적 요소’를 빼놓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불결하고 오염된 집단과 그 집단이 거주하는 환경은 나쁜 기운을 뿜어내는 온상으로 여겨졌다. 환자들이 내뿜는 기운은 공기를 타락시켜 질병을 전파할 수 있었다. 중세 기독교 사회에선 오염과 불결이 ‘죄’의 이미지로 상상됐다. 특히 나병과 같이 외양이 바뀌는 질병은 신이 내린 ‘천형’으로 형상화됐다. 흑사병 같은 대규모 유행병이 일어났을 때 종교가 제시한 가장 손쉬운 설명은, 사람들의 죄악을 신이 분노로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죄악의 성격을 띤 집단 중 가장 대표적인 집단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였고, 더러운 행위와 죄악에 쉽게 노출된 빈곤 계급이었다.
유행병 상황에서 이런 ‘위험 집단’을 다루는 데 크게 두 방향이 있었음을 중세 유럽의 흑사병 대응 방식에서 알 수 있다. 하나는, 유대인과 같이 죄악을 짊어진 이들에게 학살을 자행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처벌해 축출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공포에 떠는 대중에게 카타르시스(정화)를 안겨주었겠지만 궁극적으로 별 효과가 없음이 드러났다. 흑사병은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가리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페스트 하우스’ 등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수도원 같은 시설에 빈민을 가두고 사회에서 격리하는 방식이다. 중세 도시들 사이에서 위생 관련 법규가 제정되면서 이 방법은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한다. 빈민이 거주하는 지역은 위생 명령의 대상이 되었고, 환자는 페스트 하우스에 감금해 이동을 제한했다. 감염 지역을 불이나 향을 피워 소독하고 주검을 신속하게 처리하며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검역하는 등의 조처도 이때부터 했다.
모든 중세 사회에서 흑사병을 죄와 결부해 사고한 것은 아니었다. 유사하게 흑사병을 앓은 이슬람 사회는 흑사병을 일종의 재난처럼, 그리고 환자를 순교자처럼 이해했다. 질병을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며 자비로운 구원이라고 생각했으며, 공동체 회복에 대응의 초점을 맞추었다. 질병이 발생한 지역에서 도망가거나 소수 그룹을 박해하는 등의 일은 거의 생기지 않았다. 원죄에 대한 인식 등이 이러한 대응 차이를 낳았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질병에 대한 집단적 공포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반응일지라도 인류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의 팬데믹, 콜레라
19세기 들어 제국주의가 심화되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완성되면서 감염병 유행은 새로운 양상을 맞는다. 하나는 감염병 확산 속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감염병 대응이 중요한 제국 통치 기술로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서양의학에선 세균 이론을 정립해 감염병 대응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세균 이론 정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감염병으로 콜레라를 들 수 있다.
19세기 유행한 콜레라는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유행)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질병이다. 질병의 세계적인 유행이 콜레라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 그러하고, 구대륙의 신대륙 침략 뒤 전파된 천연두가 그러하다. 그러나 한 대륙에서 유행한 뒤 1~2년 지나 대륙을 건너 유행한 질병은 콜레라가 처음이다.
콜레라 유행은 제국주의 시대 교통과 운항의 발전으로 전 대륙이 연결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뿐만 아니라 ‘미지의 질병’ 전파 방향이 달라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콜레라 이전의 질병은 대부분 ‘문명’ 사회에서 이른바 ‘비문명’ 사회로 전파됐다. 중동이나 아시아에서 토착화된 질병이 서쪽 또는 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반면 콜레라는 인도 벵골 지방의 토착화된 질병이 영국 군대가 그 지역에 주둔하면서 전파됐다. ‘비문명’ 지방에서 미지의 질병이 전파된 것이다. 농경사회 수립 뒤 대유행과 풍토화를 몇 차례 거치며 유지된 인간-질병 생태계가 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새 국면에 이르렀다.
콜레라 전파 초기, 의학자들은 유행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세균이 질병을 전파한다는 세균 이론과 오염된 환경의 물질이 부패해 발생하는 나쁜 기운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장기 이론이 경합을 벌였다. 존 스노의 연구로 물이 콜레라의 전파 경로임이 밝혀졌고, 로베르트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해 세균 이론이 정립됐다. 특히 콜레라균 발견은 세균 발견에서 일본을 포함해 서구 문명국가들의 경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콜레라 유행의 유산은 세균 이론 정립에만 있지 않다. 좀더 중요하게는 위생 청결과 소독이라는 새로운 관습을 남겼고, 이는 서구 근대 문명의 이정표로 자리잡았다. 세균 이론이 서양의학의 과학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었던 때는 19세기 말이다. 이전 제국주의 시기에는 서양의학의 역할이 위생과 구분, 청결의 관습에 더 많이 기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에드윈 채드윅 등 당대의 유명한 위생개혁론자들은 콜레라가 전염된다는 것을 부정한 장기 이론의 신봉자였다. 이들은 공중보건 도시 행정을 개혁하고 병원을 청결하게 함으로써 감염병 유행 정도와 여러 질병의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위생개혁론자의 주장도 사회개혁에 기여했지만 서구 사회의 두려움도 한몫했다. 즉, 콜레라는 ‘아시아에서 온’ 질병에 노출된 서구 사회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다른 유행병도 대규모 사망자를 냈지만 오염과 불결함, 더러움으로 가득 찬 질병이 문명화된 사회에도 얼마든지 전파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미국 같은 경우 1832년 처음 콜레라가 생겼을 때 ‘구세계의 타락한’ 질병은 빈곤층 외에 발 딛지 못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후 세 차례 더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위생개혁을 하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콜레라 유행은 감염병에 대한 새로운 근대적 이해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관습, 문화, 행동 양식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콜레라는 제국주의 정부에 근대적 공중보건 체계를 앞다퉈 세우게 했다. 당시는 신종 감염병이던 콜레라 자체가 제국주의의 산물이었고, 서구 문명은 새로운 전염병에 적응하는 위생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 발달한 위생 지식과 관습으로 무장하고 또 다른 식민지를 찾아나섰다. 구한말 콜레라 유행에서 조선 사회가 서구 문명에 압도됐던 검역과 위생, 격리 조처 등은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말라리아와 기생충 연구, 제국의 의학
제국주의 시대 중요한 질병(또는 팬데믹)으로 콜레라만 거론하는 건 어쩌면 불공평한 처사일지 모른다. 제국 본국에 영향을 미친 질병 중심의 기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지역에는 이미 높은 수준으로 황열병·말라리아 등이 있었고 제국주의 침범이 가속하면서 유라시아뿐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퍼졌으나 이는 어디까지 열대기후성 질환으로 간주됐다. 말라리아는 군대와 관료 등 식민지 거주민에게는 심각한 질병이었으나 제국의 ‘본국’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콜레라처럼 공중보건의료 체계까지 변모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라리아는 제국의 의학이 식민지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끔 변모시켰다. 열대성 질환을 퍼뜨리는 원충을 발견하고 원충과 매개동물인 모기의 감염 주기를 규명했고, 열대성 질환이 유행하는 지역에 의학연구소를 세워 질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연구를 했다. 식민지에서 제국의 의학자들이 건너와 연구했던 내용 중 기생충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경성제국대학에 기생충학교실을 만들어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 의학 연구가 식민지인들의 삶을 개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국 지배자들은 말라리아 감소를 위해 늪지대를 없애고 모기를 박멸했으나, 어디까지나 군 주둔 지역 중심으로 행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 농지 개간이 늘면서 말라리아 유행이 오히려 늘어나는 양상도 보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예방적 치료제인 키니네를 투여했으나 당시 효과적인 방법으로 입증된 매개곤충인 모기를 박멸하는 데까지 인력과 경비를 투여하지 않았다. 말라리아 유행이 소멸 단계에 이른 건, 해방 뒤 한국 정부가 세계보건기구(WHO)와 공동으로 디디티(DDT)를 이용한 말라리아 박멸 사업을 벌이면서다.
콜레라 외에 자본주의 도시화가 낳은 질병으로 결핵을 들 수 있다. 콜레라가 무차별로 전파돼 휩쓰는 질병으로 이해됐다면, 결핵은 조용히 침투해 치명적인 사망으로 이어지는 질병에 가까웠다. 좁은 주거 환경과 낮은 영양 수준을 배경으로 전파되는 결핵은 도시화를 거치면서 더 유행되는 양상을 보이며 1600~1800년대 유럽의 전체 사망자 수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결핵은 워낙 빈곤 가계를 중심으로 전파된 탓에 오랫동안 유전병으로 오인됐다. 결핵의 전염성이 밝혀진 것은 1882년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하고 나서다. 하지만 결핵균이 등장한 이후에도 균이 결핵의 주요 원인인지는 의심받았다. 같은 균에 노출돼도 결핵에 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컸다. 결핵은 세균이 원인이더라도 영양과 면역 상태에 따라 이환율(병에 걸리는 비율)이 달라질 수 있음을 최초로 보여준 질병이었다. 코흐가 결핵 치료제로 내놓았던 투베르쿨린이 이전에 결핵균에 노출된 적이 있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인체 저항력, 즉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최은경 경북대 의대 교수
* [감염병 역사] 인류는 '질병 공동체'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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