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것 같다. 보통 ‘과학’은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수행하는 활동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개념일 텐데, 막상 과학자들은 이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주로 ‘자연’(Nature)과 쌍벽을 이루는 잡지의 명칭으로, 한담을 나눌 때나 사용되는 것 같다.
‘과학적 확실성’에 대한 과학자와 대중의 괴리
과학자는 ‘과학적’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예술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오히려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는 주로 ‘확실한’이라는 의미와 중첩되는 맥락에서 쓰인다. 근대과학이 탄생할 무렵에도 비슷한 현상이 사회를 휩쓸었다. ‘과학적’이라는 말 속에는 일종의 권위가 흡착돼 있다. 그 권위는 ‘확실한’이라는 이미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통속적으로 사용되는 ‘과학적’이라는 개념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확실한’이라는 의미 부여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괴리는 과학자들과 대통령을 비롯한 일반 대중이 느끼는 ‘과학적 확실성’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근대과학은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속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사회 전 분야로 전염시켜갔다. 계몽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몇몇 학문분과들의 성공에도, 정량화가 어려운 현상에 지나친 확실성을 부여하려던 대부분의 기획은 실패했다. 이후에도 자연과학이 확실성 추구를 멈춘 것은 아니다. 이론의 확실성은 실험에 의해 제한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축소돼갔다.
과학에 확실한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정보는 ‘대부분’ DNA로 구성돼 있고, 헤모글로빈은 ‘정말로’ 산소를 운반한다. 문제는 그러한 세부적 사실들의 ‘확실성’이 우리의 일상생활에까지 직접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불확실한 것들투성이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은 주어진 단서로 최적의 추론을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이 그런 판단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과학이 그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께서 촛불시위 2주년을 맞아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셨다고 한다. 당연히 반성하지 않는 지식인은 지식인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인은 종교인보다 더 큰 반성의 의무를 지녀야 한다. 이번 발언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대통령께서 국민들에게까지 반성을 요구하지는 않으셨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항변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께서 다수의 국민에게 반성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은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들을 표적으로 삼으셨다.
아마도 정치인은 지식인이나 종교인보다 더 많은 반성을 해야만 한다고, 우리 소시민은 자주 주장하는 것 같다. 대통령께서도 이런 소박한 주장에 반대를 표하실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반성이 요구되는 비슷한 맥락의 사건 앞에서라면 반성의 의무는 함께 짊어져야 할 듯싶다. 비슷한 사건이라면 당연히 형량이 같아야 한다고 소시민은 생각한다. 법의 집행에서도, 아마도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도덕적 차원의 실천에서도 그렇다.
〈PD수첩〉 보도 뒤에도 문병을 계획해대통령께서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의 한국 사회는 광우병으로 시끄럽던 2년 전과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당시에도 ‘과학’과 ‘과학적’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고, 2년 전 ‘괴담’과 ‘루머’ 속에 전 국민이 광우병 전문가가 돼갔던 것처럼, 2005년 한국 사회는 줄기세포 전문가로 가득했다. 당시 대통령께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 정치인들의 열화와 같은 ‘황우석 응원’ 열풍에 동참하셨고, 대통령께서 반성을 요구하시는 2년 전의 지식인들은 촛불을 응원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pd>의 보도가 있고 나서도 황우석 박사와 호형호제를 자처하시던 대통령께서는 문병을 계획하셨고 지지를 철회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지금쯤은 엄청난 지원금을 사기꾼에게 투자할 뻔했던 당시를 뼈저리게 반성하고 계실 듯하다.
황우석 박사의 논문이 조작되었는지 여부야말로 과학적 확실성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될 수 있는 적절한 사례다. 연구비 유용이나 다른 측면을 제외하더라도, 과학자 사회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이 이루어졌고, 논문이 게재되었던 ‘과학’지와 ‘자연’지는 게재를 취소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정치인들의 무차별적 지지는 대부분 철회되었지만 어디서도 그들이 반성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기사를 본 일이 없다. 심지어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여전히 황우석 박사를 지지한다. 반성은 실종되었다.
광우병에 관한 억측들이 존재했었다. 어린 학생들을 주축으로 ‘괴담’이 퍼져나갔고, 몇몇 사람은 그런 괴담에 휩쓸렸는지도 모르겠다. 과학계와 의학계의 의견은 양분돼 있었고, 그 상황은 여전히 그렇다. 소의 프리온이 인간 광우병의 원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과거 영국에서 집단으로 발병한 사례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하고 있다. 인간 광우병에 관한 최근의 논문들을 뒤져봐도, 과학자나 의학자들이 확실히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다. 발병 확률이 지극히 낮다고 해도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참 신중하다. 광우병의 원인을 찾는 과학적 조사는 여전히 진행 중인데, 쇠고기를 둘러싼 무역협정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사태는 복잡하다. 과학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듯 과학적 확실성이 결론을 내려주지 못할 때, 과거의 지식인들은 보통 소박한 합리성 혹은 ‘합당함’에 호소하곤 했다. 얼마 전 작고한 과학철학자 스티븐 툴민은 이럴 경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지’의 입장에 서서, 확실성보다는 소박하게 합당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대부분의 일상생활 영역에선 그런 합당함을 찾는 과정에서 올바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적 확실성이 적용되는 영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리고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진실과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 나아가 지식인들의 상반된 태도 또한 그 일상의 영역에 걸쳐 있다. 게다가 진단과 치료라는 의학의 영역은 과학과 동일한 방식의 인과관계가 적용될 수 없다. 그곳에선 과학적 합리성과 인문학적 합당함이 공존한다.
광우병과 황우석 사태의 차이
‘과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사건에서 몇 가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황우석 사태는 과학이 확실한 답을 준 사례다. 광우병 사태는 아직 과학이 확실한 답을 주지 못했다. 황우석을 열광적으로 지지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많은 억측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공개적으로 반성을 한 일이 없는데, 이제 대통령께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실히 판명나지 않은 일에 대해 지식인들의 사과를 요구하신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반성을 요구하는 이는 자기반성에 철저한 사람이어야 할 듯싶다. 과학적 확실성이 광우병에 관한 억측을 완전히 해명하는 그 시점에도 지식인들이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 시점에 지식인들이 반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께서는 황우석 박사를 지지한 과거에 대해 한 번쯤 공개적으로 반성해보실 생각은 없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지식인들은 반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회고해보게 될 것 같다.
과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이기도 한 에른스트 피셔는 그의 책 에서 “우리가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과학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과학을 많이 배운 사람은 과학에 대하여 많이 알지 못한다”는 말도 한다. 점점 세분화돼가는 전문지식 속에 함몰되면 모자이크 조각이 전체 그림의 어디에 놓이는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 체스터턴이 법정을 예로 들며 했던 말을 인용한다. “정말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은 당장 주위에 있는 평범한 사람 12명을 불러모은다. 기독교의 창시자들도 그렇게 했다.” 대통령께서는 기독교인이시고 소망교회의 장로이신 것으로 안다. 평범한 사람 12명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촛불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김우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원·초파리유전학</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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