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멘터리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포스터. 삼백상회 제공

다큐멘터리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포스터. 삼백상회 제공
‘성덕(성공한 덕후)을 향한 개인의 여정이 연대를 통해 모두의 서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2026년 10월28일 개봉 예정인 다큐멘터리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박효선 감독의 이 작품은 그의 우상이던 할리우드 유명 배우 메릴 스트립을 만나기 위한 ‘맨땅에 헤딩’식 고군분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페미니즘 운동 10년의 역사가 녹아 있는 것은 물론 독립영화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이 담겨 있다. 때론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진중하지만, 때론 좌충우돌 발랄하다. 다큐멘터리영화 한 편에 그렇게 겹겹이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처음 기획부터 개봉까지 무려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법도 하지 않은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제작에 돌입한 작품이지만, 그저 기다릴 뿐 누구도 “도대체 왜 영화가 개봉하지 않냐”고 추궁하지 않았다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박효선 감독을 10월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마주했다.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박효선 감독이 2026년 10월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왜 메릴 스트립이었을까?’ 박 감독은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라며 첫 번째 이유로는 당연히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춤을 좋아해 공연예술에 푹 빠져 있던 중학생 시절, 우연히 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 메릴 스트립한테 반해버렸다.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메릴 스트립이 발로 냉장고 문을 닫는 그 장면에서 사랑에 빠졌다”는 박 감독. 이어진 웹서핑과 자료조사에서 그가 단순히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를 넘어 페미니즘과 인권운동에 참여해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단다. “메릴의 인터뷰를 보면, 내가 말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던 것들을 거침없이 얘기하고 있었어요. 문화적 충격이었죠. 어쩌면 처음엔 답답한 한국 사회를 벗어나고 싶어 만든 일종의 ‘도피처’였던 것도 같아요. 국외 팬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메릴 스트립에게 더더욱 빠져들었죠. 나도 메릴 스트립의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번개 맞은 것 같은 첫사랑’에 빠져 학창 시절 블로그를 만들어 메릴 스트립에 관한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다 20대 중반 ‘여성으로서 한국에선 영화 일을 할 수 없어 떠나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기,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한국으로 옮겨붙었다. “2016년 트위터(현 엑스(X))를 타고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고, 문화계에서 시작한 미투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어요. 그때 저는 ‘찍는 페미’를 결성해 영화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활동을 했죠. 그런데 이왕 하려면 재미있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만든 게 ‘메릴 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라는 트위터 계정이었어요.”
이 계정은 ‘일종의 놀이’였다. 페미니즘의 아이콘과 같은 배우 메릴 스트립을 키워드로 그의 작품, 캐릭터, 대외활동, 인터뷰, 일화 등을 편집해 전달하고 해석을 달아 공유했더니 사람들이 열광했다. 리트위트가 기하급수로 늘었다. “아니, 한국에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어? 그를 통해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시작된 것이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였다.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한 장면. 박효선 감독의 15살 때 꿈은 ‘메릴 스트립의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삼백상회 제공
“사실 ‘메릴 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라는 괴상한 계정을 만들 때부터 저는 ‘빅 피처’를 그리고 있었어요. 이걸 영화로 만들어보자! 이참에 영화도 찍고 성덕도 돼보자는 야무진 꿈을 꾸며 빌드업을 해나갔던 거죠, 하하하.” 대체 왜 대한민국 2030 여성들이 70대 할리우드 배우인 메릴 스트립에게 열광했을까? “메릴이 해온 여성주의적 활동이나 인권운동도 영향이 있었겠죠. 여성 영화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발언을 완벽하게 거세해버리는 한국의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 사람이 저 하나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70대 여배우가 아직도 커리어의 정점에서 주연을 맡고 정치적·사회적 목소리를 내면 많은 사람이 귀 기울이는 것을 보며 열광했다고 생각해요. 멋지고 힘 있는 그런 모습.”
영화 제목은 일찌감치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로 정하고,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한 여정을 담기로 결심했지만 뜻하지 않은 고민도 생겨났다. “제가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이 ‘박효선’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 모습을 찍고 제 모습을 편집하는 것 자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이거든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대중 앞에 나를 다 내던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거든요. 다소 뻔뻔해지기로 했죠, 하하하.”
영화화를 목적으로 한 ‘빌드업’은 2016년 12월에 시작됐지만, 이 작업이 ‘돌이킬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가 된 것은 2019년 10월 텀블벅을 통한 펀딩을 하면서였다. “통 크게 4천만원을 목표로 펀딩을 진행했는데, 1619명이 참여해 모금액이 6200만원을 넘었어요. 깜짝 놀랐고 행복했어요. 그런데 그땐 미처 몰랐어요. 이 펀딩이 저의 족쇄이자, 마음의 빚이 될 줄은. 영화 완성까지 2년6개월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거든요.”
야심 차게 시작한 프로젝트는 그 후 코로나19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난다. 땅과 하늘길이 막힌 것은 물론 누구를 만나서 인터뷰하는 것 자체가 민폐가 되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영화에는 그 암담한 시기를 견뎌내는 ‘웃픈’ 모습도 여과 없이 담겼다. 메릴 스트립을 만나기 위해 그의 에이전시에 연락하고, 수차례 전자우편을 보내고, 영상을 찍어 소포를 보내고, 미국 땅을 두 번 밟고, 수없이 많은 대책 회의를 한다. 그야말로 ‘맨땅 헤딩’이다. “메릴이 이 프로젝트의 정체를 알면 분명히 만나줄 텐데, 왜 에이전시는 안 된다고만 할까?” 그 와중에 메릴 스트립의 대표작인 ‘맘마미아!’ 싱얼롱(영화를 보며 관객이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는 관람)이나 좌담회 등 다양한 행사도 진행한다. 쉴 틈이 없다.

박효선 감독이 메릴 스트립에게 쓴 영문 편지. 영화 속에는 메릴 스트립을 만나기 위해 맨땅에 헤딩하는 박 감독과 동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삼백상회 제공
영화는 단순히 박 감독이 메릴 스트립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과정만 담아내는 것이 아니다. 전자우편 한 통을 보내고, 영상을 찍어 소포로 보내고, 수십 통의 전화를 돌리는 데는 수많은 ‘동지’의 도움이 있었다. 누구는 아이디어를 보태고, 누구는 통역하고, 누구는 전자우편 표현을 함께 다듬고, 누구는 인터뷰에 응한다. 참여자 중엔 유명인도 있다. 대표적으로 배우 임예진과 문소리가 참여했다. “임예진 배우는 제 또래인 딸이 당시 텀블벅 펀딩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참여를 적극 권했다고 해요. 먼저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어요. 문소리 배우 역시 아는 피디님 소개로 참여해주셨죠. 정말 감사한 연대와 응원의 마음이었어요.”
영화에는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리거나 분노케 한 각종 사건을 둘러싼 여성들의 움직임도 등장한다. 미투 운동을 비롯해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2016년 5월) 관련 시위, 낙태죄 폐지 시위(2017년), 안희정 1심 무죄 판결(2018년 8월) 규탄 시위, 신당역 여성 살인사건(2022년 9월) 관련 시위, 이태원 참사(2022년 10월) 진상규명 시위, 딥페이크 성범죄 처벌 시위…. 그 모든 현장에는 박 감독과 동료들이 있었다. 영화가 마치 지난 10년, 우리 사회 페미니즘 운동의 기록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이유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많은 사람에게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그 후로도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죠. 페미니즘 운동만 놓고 보면 10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에요. 백래시도 거셌는데, 일부에선 ‘그때 반짝 달아올랐지만 그래서 뭐가 바뀌었는데?’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달라졌죠. 예를 들어 ‘영화 촬영 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의무화’만 봐도 그래요. 2021년 8월 법이 개정된 뒤 토를 달 순 없잖아요. 미투 운동 이후 적어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죠.”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가 완성되기까지 10년 동안 박 감독은 물론 그의 동료들도 자랐다. 영화 초반 ‘이민 준비 중’이거나 ‘취업 준비 중’이던 여성들은, 영화 후반 기자·통역가·번역가·변호사 등의 타이틀을 달고 여전히 프로젝트를 함께 돕고 있다. “그들이 사회에 나와 각자의 직업전선에서 우리가 옳다고 믿고 추구했던 모습으로 살고 있잖아요. 영화는 연대했던 우리 모두의 성장을 보여주는 셈이에요.”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박효선 감독이 2026년 10월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박효선 감독이 2026년 10월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래서 결국 메릴 스트립은 만났나?’
사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질문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메릴 스트립이 아니다. 고군분투 끝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박효선 감독은 메릴 스트립을 찾아 뉴욕 거리를 헤매지 않는다. 대신 ‘미나리’와 ‘페어웰’ 등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영화에 참여한 이용옥 미술감독을 비롯해 영화판에서 살아남은 다양한 여성 영화인들과 만난다.
“메릴 스트립을 향한 열렬한 러브레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굿바이 레터”라는 박 감독의 표현처럼, 메릴 스트립은 결국 하나의 메타포에 불과했다는 걸 영화를 보고 나면 깨닫게 된다.(2026년 4월 메릴 스트립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개봉을 기념해 최초로 내한했다는 것 따위도 중요치 않다.)
“메릴 스트립의 영화처럼 흥미롭고 불완전하고 생동감 넘치는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갈망했던 박 감독은 수많은 여성과의 연대를 통해 비로소 그런 영화를 만들어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요. 이제부턴 내 얘기를 쓸게요”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박효선 감독을 비롯해 그와 연대했던 여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얘기를 써내려 갈 것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 고민이라는 박 감독은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냐는 물음에 “‘동방불패’ 같은 무협영화를 만들고 싶다. 기회가 되면 시트콤도 만들고 싶다. 무엇보다 모든 작품을 재밌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곧 박효선표 재미난 무협영화를 볼 수 있는 건가? 설마 또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인터뷰 말미, 정말 궁금했던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메릴 스트립을 만난다면 무슨 얘길 하고 싶었느냐’고. 박 감독의 대답은 이랬다. “메릴이 미래의 페미니스트 리더는 아시아에서 나올 거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되레 메릴에게 묻고 싶었어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고.”
*뱀발: 아, 미처 이 프로젝트에 연대하지 못했다고? 10년의 프로젝트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영화 개봉을 위한 2차 텀블벅 펀딩(2026년 10월14일까지)이 진행 중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를 찍던 감독과 스태프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행진’에 참여한 모습. 삼백상회 제공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트럼프, 젤렌스키가 ‘공격 중단’ 요청 6차례 무시하자 푸틴과 경유 거래”

주민 돕는다더니…법원 “태안 기름유출 피해단체들 2800억원 반환해야”

윤석열 김건희 부부 21억원 영치금…“무기징역이니 천억대 부자 되겠다”

대구 상가서 천장 패널 쏟아져 38명 부상…이 대통령 “구조·수습 총력”

교수님 눈물로 준비한 ‘동성혼’ 축사…“극히 평범한 결혼, 사랑의 본질은 같아”

트럼프 “8개 전쟁 끝냈는데 노벨상 못 받아”…미 국무 “ICC 산산조각 낼 것”

주우크라 대사 오전 소환 귀국…정부, 18년 만의 강경 외교 조치

“교사 없는 교실, 화장실 휴지도 없다”…프랑스 고교생들의 ‘혁명 2.0’
![선비라던 조희대 범죄 의혹만 7개…“수사·탄핵 쌍끌이” 주장 증폭 [논썰] 선비라던 조희대 범죄 의혹만 7개…“수사·탄핵 쌍끌이” 주장 증폭 [논썰]](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1010/17915908069634_20261009501834.jpg)
선비라던 조희대 범죄 의혹만 7개…“수사·탄핵 쌍끌이” 주장 증폭 [논썰]

안창호 인권위원장 “사형 집행 중단 30년…폐지 의정서 가입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