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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따위 기대하지 말라… 자격과 조건 따지기 게임 된 ‘연프’

서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연애 프로그램의 역설… 존중과 사랑·공존 배우는 기회로
등록 2026-08-27 22:05 수정 2026-08-2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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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지옥5’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솔로지옥5’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덕후’지만 연애 예능 프로그램(연프) 애청자이기도 하다. 1990년대 맞선 예능 ‘사랑의 스튜디오’(MBC)부터 2010년대 초 ‘짝’(SBS)을 거쳐 2017년 ‘하트시그널’(채널A)까지 연프는 벼락스타라기보다는 스테디셀러에 가까웠다. 이 오랜 장르가 요즘처럼 범람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코로나19다. 2021년, 일상이 멈추고 관계가 단절된 틈새로 ‘환승연애’(TVING)와 ‘나는 솔로’(SBS Plus, ENA)가 연달아 등장했다. 이후 퀴어·모태솔로·돌싱·무속인·연상연하 등으로 대상이 넓어졌고, 결혼정보회사(결정사) 시스템을 구현한 ‘커플팰리스’(Mnet), 가족이 개입하는 ‘합숙 맞선’(SBS)처럼 한국 사회의 결혼문화를 투영하기도 했다. 연프는 방송과 유튜브 콘텐츠 말고도 ‘나는 절로’ 같은 현실의 소개팅 행사로도 확장하고 있다.

 

‘누난 내게 여자야2’ 포스터. KBS 제공

‘누난 내게 여자야2’ 포스터. KBS 제공


 

가성비가 쏘아올린 전성시대

 

연프는 왜 이렇게 자꾸 생겨날까? 가장 큰 이유는 가성비다. 드라마보다 저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으면서도 드라마적 구성이 가능하다. 부가 콘텐츠 생산도 쉽고 자극적 편집으로 화제를 모을 수 있다. 출연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결혼정보회사(결정사)로서 기능할 뿐 아니라 최근에는 인플루언서 등용문으로도 활용된다. 시청자는 남의 연애를 구경꾼처럼 관전할 수 있고, 나의 망한 연애와 실패한 인간관계를 돌아보는 거울 치료도 가능하다. 이 얼마나 가성비 넘치는 장르인가.

이런 ‘가성비 맛집’ 연프는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연프만 보면 모두가 연애를 원하는 듯하지만, 현실의 청년들은 오히려 연애에서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 최근 주간경향이 진행한 한국·중국·일본·미국·스페인 5개국의 청년 비교 조사에서 한국 20대의 27.5%(남성 31.9%·여성 24.9%)가 모태솔로로 집계돼 조사 대상국 중 두 번째로 높았고, 55.4%는 “연애에 관심이 없다”고 답해 5개국 중 가장 높았다. 특히 여성 청년은 60.8%로, 조사에 참여한 5개국 남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20대 기준 통계지만, 30대라고 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연애 실종’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요즘 연프에서는 도리어 연애 서사를 기대하기 어렵다. 연애와 결혼이 조건과 능력을 경쟁하는 게임화가 되었음을 씁쓸하게 확인할 뿐이다. ‘나는 솔로’나 ‘합숙 맞선’에선 출연자들이 직업과 재산 규모, 집안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솔로지옥’(넷플릭스)과 ‘누난 내게 여자야’(KBS2) 같은 20대 중심의 연프에서는 외모가 자산이며 경쟁력이다. 이들의 일상은 주로 운동 같은 자기관리와 개발로 채워지고, 이런 면이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 다른 연프보다는 비교적 평범한 일반인이 출연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나는 솔로’마저 사실은 서울·수도권에 사는 고학력자, 대기업이나 전문직 종사자, 공무원이 주를 이룬다. 연프가 보여주는 건 능력주의의 낭만적 적용이며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현재이다.

연프에서 연애만 어려운 게 아니다. 최근에는 연애 상대를 능동적으로 탐색하기보다 동성끼리 대화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출연자가 늘어 ‘이럴 거면 굳이 왜 출연했나’ 싶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연애는커녕 원만한 사회적 관계가 어려워 보이는 출연자의 비율도 늘었다. 그렇기에 점점 연애보다 다채로운 인간이 모인 사회실험실이나 자신을 상품화하고 홍보하는 장으로 여겨지거나, 빈 로맨스를 채우기 위해 빡센 ‘연애 부트캠프’처럼 운영된다.

‘나의 AI 파트너-기이안 연애’ 스틸컷. SBS 제공

‘나의 AI 파트너-기이안 연애’ 스틸컷. SBS 제공


 

정작 현실에선 ‘연애 실종’

 

결핍과 욕망이 적나라하게 전시되는 세계지만, 연프가 은폐하는 것들도 있다. 우선 사회구조의 문제를 보여주지 않는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모솔연애, 넷플릭스)는 ‘썸메이커스’의 도움뿐 아니라 심리치료와 스피치훈련 등을 출연자에게 제공하고, 외모를 개선해 속성으로 ‘연애 가능 상태’로 만든다. 이는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모태솔로인 게 정말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또한 연프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희망하는 걸 보여주거나 성역할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면서 가부장 체제의 문제는 슬쩍 비켜 간다. 돌싱 여성과 모태솔로 남성이 나오는 ‘돌싱N모솔’(MBC every1)의 경우 여성의 눈도 못 마주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던 남성 출연자들을 “(연애) 경력직” 여성 출연자들이 인내하며 조심스럽게 조언해 개선시킨다. 관계를 통해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서사를 2026년에도 반복하는 것과 같다.

‘이성애의 비극’ 저자 제인 워드는 이성애 문화가 남성의 권위나 젠더 이분법의 기본 구조는 건드리지 않은 채 남녀가 서로를 좋아하도록 훈련하려는 산업 전반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이성애 교정 산업”으로 명명한다. 연프를 그 이성애 교정 산업의 사례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이 노력하면, 특히 여성이 남성을 더 이해하고 도와주면, 낭만적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이 환상은 누가 만들었고 무엇을 가리고 있을까? 그리고 누구에게 유익할까?

앞서 소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성은 연애를 경험한 후 굳이 다시 연애를 선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남성은 애초에 연애 경험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로 고용 상태와 경제적 여건 외에 ‘젠더 문제’를 꼽는다. 워드도 비슷한 진단을 한다. 여성들이 연애로부터 이탈하는 이유는 “성차별과 유해한 남성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영향권 안에 놓여 있으며” 이 두 가지가 묵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굳이’ 이성애 연애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남성 역시 여성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관해 모순된 경험을 한다. 워드는 “여성을 싫어하고 하대하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문화 속에서 성장해 사회화된 남자가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문화적 기대를 받으면 현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연예 프로그램이 은폐하는 것

 

연프는 스펙과 조건이라는 ‘보이는’ 결혼 시장의 논리를 전시하면서도 근원적인 구조의 문제는 보여주지 않은 채 개인의 노력으로 커플이 될 수 있다(혹은 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연프와 같은 방식을 적극 수용하며 생산하는 곳은 어디일까? 레거시 미디어, 지방자치단체, 종교기관, 그리고 결정사로 대표되는 ‘결혼 시장’이다. 즉, 연프의 범람은 ‘연애 실종’ 상태에서 결혼과 가족을 지속시키려는 기성 사회의 필요와도 맞물려 있다. 이렇게 반성 없는 체제 속에서 과연 연애가 가능할까? 가능하려면 어떤 전제가 필요할까?

연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연프가 꾸준하게 나오는 건 고무적이다. ‘나는 솔로’나 ‘합숙 맞선’과 같은 연프가 생산되며 성역할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전통적 가족 체제를 영속시키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걸 ‘남의 연애’ ‘메리퀴어’ ‘스탠바이미’(모두 웨이브) 같은 연프들은 보여준다. 이 다양성이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시청자를 겨냥한 또 하나의 상품에 머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약간의 우려에도 연프의 어떤 장면은 눈여겨볼 만하다. ‘모솔연애2’에서 아이돌 덕후인 여성 출연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남성 출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냥 너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성적 호감이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아. 뭔가 특수한 상황에 놓여졌는데도 그런 게 안 느껴지는 거 보면 ‘그냥 못 느끼는 사람이려나?’ 이런 생각도 들고 더 이상 그런 고민 때문에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여기 있기에는 사실 날씨도 좋고 예쁜 것도 많고 해서 그냥 밝게 지내려고 해.” 그 말에 남성 출연자는 담담하게 응답한다. “당연한 걸 수도 있어. 연애나 이런 거 없어도 너무 잘 살 수 있게 세상이 디자인되어 있잖아. 그래서 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비연애 상태를 반드시 교정해야 할 문제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연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들의 대화는 연프가 집요하게 장려한 유성애·이성애 중심 서사에 작은 균열을 낸다. 이런 장면을 보기 위해 연프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여전히 끊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연애 자격과 조건을 증명해야 하는 기존 연프와는 결이 다른 ‘내 남은 연애’(SBS)도 주목할 만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적이 있거나 심각한 투병을 경험한 이들이 만나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는 과정은 연프라기보다는 자조 모임에 가깝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에는 질병마저 전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샀지만, 차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경쟁력을 과시하며 조건을 맞춰가는 연프보다는 덜 자극적일지 모르나, 서로의 취약함을 이해하며 상호 돌봄이 가능한 관계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인간다운 관계 모색의 장으로

 

영화 ‘그녀'(Her)처럼 인공지능(AI)과의 연애에 도전하는 ‘나의 AI 파트너-기이안 연애'(SBS)도 흥미롭다. 자신의 이상형을 구현한 AI와 비접촉 대화만으로 연애 감정이 생길까? 경제력과 집안 등 실물적 조건을 제거했다고 해서 무조건 더 좋은 연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맞춰주는 관계를 상호적 관계라 할 수 있는지 미지수다. 또한 인간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거나 성차별적 문화에 무감각하다면, AI와의 관계 역시 차별하고 착취하는 형태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런 시도는 ‘비인간과의 연애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연애가 실종된 시대, 심지어 비인간과의 연애가 상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시대의 연프에 관해 생각해본다. 지금의 연프에 필요한 것은 조건과 자격을 갖춘 사람끼리 짝을 맺는 기술일까? 인간다운 관계의 모색일까? 예능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건지는 모르나 존중과 사랑, 그리고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면 연프가 아무리 많아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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