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히히덕거리다’. 컴퓨터 앞에서 이번 주 신문 칼럼을 쓰는데 저 단어에 빨간 밑줄이 그어졌다. 엥? 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더니 별다른 설명 없이 ‘→ 시시덕거리다’라고만 나온다. 즉, ‘히히덕거리다’는 틀렸고, ‘시시덕거리다’가 맞는 말이라는 뜻. 고민이 든다. 패기 있게 ‘히히덕거리다’를 그대로 쓸지, 비굴하게 ‘시시덕거리다’로 고쳐 쓸지, 일말의 ‘쫀심’을 지키기 위해 아예 다른 표현으로 바꿀지. 결국 다른 표현으로 바꿨다. 몇 주 전엔 ‘흐리멍텅하다’가 비표준어임을 알고는 분기탱천했는데, 글을 쓸수록 이런 경험이 쌓인다(‘흐리멍덩하다’가 표준어라오).
장면 2: 2011년, 표준어사정심의위원회. 국립국어원에 전문가들이 모였다. 왜 ‘짜장면’을 못 쓰게 하냐는 사람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자 ‘복수표준어’라는 묘안을 짜낸다. 이들은 2017년 전에는 비표준어였던 ‘택견, 품새, 간지럽히다, 맨날, 복숭아뼈, 쌉싸름하다, 허접쓰레기, 개발새발, 눈꼬리, 먹거리, 끄적거리다, 두리뭉실하다, 손주, 어리숙하다, 섬찟, 꼬시다, 놀잇감, 딴지, 마실, 주책이다, 걸판지다, 까탈스럽다’ 등 74개 단어를 표준어로 ‘사면 복권’시켰다. ‘쭈꾸미, 꼼장어, 깡총깡총, 오돌뼈, 어줍잖다, 으시대다’ 같은 말은 여전히 비표준어, 즉 틀린 말이다!(‘주꾸미, 곰장어, 깡충깡충, 오도독뼈, 어쭙잖다’만 표준어이다).
두 장면은 표준어가 한국어 사용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현실에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표준어는 그저 목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명령으로 존재한다. 국가에 의해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표준어는 국가가 말의 질서를 독점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 행동을 통제하고 우리의 생각과 습관을 지배한다. 국가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명령의 방식은 간단하다. 사전에 ‘→’ 표시만 해놓으면 된다. ‘으시대다: → 으스대다’ 식이다. “당신이 쓰는 틀린 말을 버리라.” 이 속에서 말을 대하는 우리 태도는 그저 ‘맞느냐, 틀리냐’를 찾는 데 머문다. 그렇게 우리는 이분법의 틀 안에서 옴짝달싹 못한다.
그렇다면 표준어 수를 더 늘리라고 요구하는 게 답일까? 사투리에도 표준어에 포함할 말이 꽤 있으니 하루빨리 위원회를 소집하라고 요청해야 할까? ‘표준어-사투리’라는 위계 속에서 틀렸다고 ‘억울하게’ 낙인찍힌 말이 복수표준어로 선포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국가 중심의 표준어 정책 자체를 문제 삼고 이를 근원적으로 혁파해야 할까? 나는 후자의 길을 걷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온갖 장치 속에 산다. 개인의 몸짓, 생각, 취향을 규정하거나 독려하거나 금지하고 제어하는 모든 것이 장치이다. 학교, 병원, 교회, 회사, 군대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신용카드, 메신저, 숟가락, 젓가락, 넥타이, 치마도 우리의 삶과 행동과 사고를 틀 짓는 장치이다. 그중에서 언어는 가장 오래된 장치이다.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이 장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어는 세계를 마주한 인간이 세계를 자기화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천 속에서 생성됐다. 말 자체가 장치인데, 말의 자유로운 소통을 통제하는 표준어는 훨씬 가시적이고 억압적인 장치이다. 표준어 정책의 가시적 명령집인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괴물을 동굴 속에 가둬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표준어 정책을 역사화하고 상대화해야 한다. 지금의 표준어 정책은 특정한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조건일 뿐이며, 이 조건을 변경해 억압적 장치에 포획된 우리가 스스로 해방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일환으로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한국의 표준어 정책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마침 일본인 유학생이 있어 잘됐다 싶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 규정이 제국주의 일본의 표준어 규정과 판박이라는 걸 증언해줄 사람이 나타났으니 기대가 컸다. 그 학생에게 물었다. “일본의 표준어 규정이 어떻게 되나요?”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이렇다. “그런 게 있나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데요. 제가 알기론 그런 거 없어요.”
조선어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어를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일본어(국어)가 아닌 조선어를 엉겁결에 사용한 학생이 발각되면 ‘방언찰’(方言札)을 목에 씌워 복도에 나가 서 있게 하기도 했다. 우리 표준어가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말이듯이, 그들이 강요했던 일본 표준어는 일본제국 수도의 언어인 도쿄말이었다. 표준어는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단일한 근대국가를 구축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장소에서 통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할 만한 효력이 있는, 일본국 내에서 모범으로 사용되는 언어’여야 했다. 한국은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를 성립시키기 위해 도쿄말을 중심으로 만든 표준어 정책을 본떴고 그 기조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랬던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의 표준어 정책을 버렸다. 제국주의 일본 시절엔 ‘교육받은 도쿄인이 쓰는 말’인 일본 표준어를 강요했지만, 패전 이후 사투리를 차별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성찰하면서 도쿄말 중심의 표준어라는 개념 자체를 버렸다. 지금은 표준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전국에서 두루 쓸 수 있는 말’ 정도의 뜻인 ‘전국 공통어’(공통어)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이렇게 느슨한 개념으로 공통어를 정의하다보니, 지역 방언이라 해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쓰이면 공통어에 포함한다. 공통어 여부는 각 지역의 신문사, 방송사, 출판사가 자율적으로 판단한다. 사전 천국인 일본에서는 작은 사전이더라도 사전 편집자의 재량에 따라 방언도 상당수 수록된다. 우리만 송장을 등에 지고 살고 있다(똑같은 방식으로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급의 이상과 생활 감정에 맞도록 규범화한 공용어’인 ‘문화어’를 쓰는 북한이 있으니, 아주 외롭진 않다).
한국의 표준어 정책은 프랑스의 엘리트적 권위에 기댄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을 본뜬 일본식 언어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표준어는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단일한 말로 소통해야 한다’는 언어적 근대의 강령 아래 한국어에 일정한 질서와 공통성을 부여했다.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합의된 철자법도 없고 변변한 사전도 없던 상황에서 이룬 성취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쓸모없다. 온갖 말과 글이 넘치게 생산되는 민주사회에서 말에 대한 검열을 국가에 맡길 수 없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신문, 방송, 출판 등 다양하고 입체화된 언어 소통 환경 속에서 시민들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언어적 공통성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다. 아니, 국가의 개입을 틀어막아야만 말에 대한 시민적 역량을 꽃피울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하는 표준어가 없는 영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영어에서 ‘요구르트’의 철자가 어떻게 될까? ‘yogurt’ ‘yoghurt’ ‘yoghourt’ 등 세 가지 철자로 쓰이는데, 이 중에서 무엇을 쓰라고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 사전 편찬자들이 단어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시기별로 자료를 축적해서 사전에 어떤 철자형을 올릴지 자체 판단하면 그만이다. 미국에서는 ‘yogurt’가 월등히 많이 쓰이니 사전에 ‘yogurt’만 올릴 테고, 영국에서는 ‘yogurt’와 ‘yoghurt’가 비슷하게 쓰이니 두 단어를 함께 올릴 것이다.
여러분이 미국 영어를 공부한다면 어떤 사전을 고르겠는가? ‘yogurt’만 실려 있어도 충분한 사전을 사겠는가, ‘yoghourt’ ‘yoghurt’ ‘yogurt’ 세 개가 모두 다 실려 있어서 무겁고 두껍기만 한 사전을 사겠는가?
표준어 제도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 듯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 독일도 소수 엘리트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독일어를 모어로 하는 시민들에게서 언어적 공통성을 찾으려 했다. 독일은 말이 올바른지 잘못됐는지, 꼭 필요한지 없어도 되는지를 정부 당국이 결정하는 것에 반대하는데, 독일어가 망가졌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한국은 여전히 근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표준어 정책은 단일한 언어적 근대를 만들기 위한 상태에서 정체돼 있다. 국가 주도로 이뤄진 단일한 언어 질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으며, 언어공동체 내부의 크고 작은 정체성을 모두 배제하게 된다.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언어적 근대를 만들기 위해 외면했던 언어의 지역성과 잡종성을 복원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이 지긋지긋한 서울공화국에서 벗어나려면, 사투리와 공통어가 역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말의 질서를 새로 마련해야 한다.
표준어 정책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나태한지를 보여주는 증표이다. 아무리 ‘표준어와 사투리는 대등하며 상호보완적’이라고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작동한 적이 없다. 말에 대한 결정 권한을 국가에서 시민에게 돌려줘야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언어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겁낼 일이 아니다.
표준어는 말에 대한 억압적 국가 장치이다. 표준어를 폐지하라.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진해 교수의 ‘무적의 글쓰기’는 1회 순연됩니다. 제1504호에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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