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지니 웃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제야 그전에는 보고 싶지 않던 사람들의 삶이 보이더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가 지리산 현장학습에서 학생들을 만나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나눈 이야기다. 작가는 이야기에서 인물을 살아 있게 구축하기 위해 창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찰이며 만남이라고 했다. 이 관찰과 만남이 글쓰기의 원천인 자기의 경험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관찰과 만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 이야기로 풀어냈다.
작가는 사람과 만나는 일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잘 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자신이 ‘시티걸’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고, 허락받지 않고 방문하거나 접촉하는 것을 무엇보다 견디지 못하는 무례로 받아들이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다고 생각하며, 그 안에서 모두로부터 인정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듯 만남과 경험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깊이만을 추구하는 ‘진정성’의 존재가 자신이었다고 했다.
그 자신만을 위한 진정성은 작품 안의 등장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물이 됐다. 정지아 작가가 예를 든 것은 속물이다. 속물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그 행동의 결과가 어떤 여파를 미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속물이 그런 의도와 방향을 가지고 행동했을까. 모든 사람에게 다 속물로 똑같이 행동했을까. 속물이 다른 모습을 보일 때는 없었을까.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이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이 드러나야 인물은 살아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살아 있는 인물을 구축하려면 속물들의 삶을 세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다가서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아무리 작가라지만 내가 왜? 가장 끔찍하고 징그러운 것이 바로 속물들의 모습인데 작가라 해서 그걸 해야 하는가?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 가장 혐오스러운 것에 다가서야 하는 일, 그것이 작가의 가장 큰 고통이라는 말이다. 그걸 하면서까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가?
참가한 학생들이 가장 공감하며 자신들이 직면한 만남과 경험의 어려움에 대해 작가에게 질문한 첫 번째가 바로 이 점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의 어려움 말이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이 가장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일상생활에서 취재하고 유심히 관찰하는 것까지 사람 대하는 일이 무섭고 어렵다고 학생들은 토로한다. 특히 그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 내가 혐오하는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이야기를 위해서라지만 그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순간마다 불쑥불쑥 넘쳐나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
혐오하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사람에 대한 깊은 불신이 경험적으로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뜨겁게 둘도 없는 친구나 동료로 만났다가 한순간에 갈라서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경험이 생각보다 많다. 둘이 갈라서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갈라선 다음에는 편을 나눠 집단 괴롭힘 같은 가혹한 심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은 학생들에게 ‘아무도 믿지 마라’는 행동강령을 남겼다.
그래서 학생들은 현장을 찾아가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려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참조해 인물을 만들려 하지, 현장을 직접 취재하거나 당사자를 만나 부딪치는 일을 무서워했다. 한 학생은 솔직하게 자신은 이런 만남으로 혹여나 생길 수 있는 상처와 고통에 매우 취약하다고 고백했다. 사람에게서 내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자기를 먼저 내보여야 하는데 그것만큼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학생들의 질문에 정지아 작가는 처음 ‘시티걸’로서 전남 구례에 내려갔을 때 자신이 느꼈던 황당함을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일례로 노크는 고사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묻기도 전에 방문을 먼저 여는 구례 ‘시골’의 견딜 수 없는 무례함. 오만 일에 다 간섭하고 소문이 되는 그 참을 수 없는 익명성 부재. 풀메이크업을 하고 힐을 신고 마트에 들어섰을 때 “쟈는 여 것이 아닌디?”라며 일제히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 ‘근대’가 만들어놓은 개인이라는 아름다운 내면의 공간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처음 그가 느꼈던 그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학생들에게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미웠다.”
미웠으니 목표는 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섞이고 싶지 않았다. 섞이고 싶지 않고 벗어나려 하니 그들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들 삶의 모양새가 어떠한지 빤히 안다고 생각했다. 세상만사는 멀리서 보면 아주 확실하게 보인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아름다운 것도 조잡하고 추하다. 그렇기에 거리 유지야말로 내 우아함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곳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은 것은 근대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들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과 혐오. 그들 삶의 방식은 이해할 가치조차 없다. 왜 저렇게 사는지 너무 빤해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게다가 그것은 ‘근대인’에게 삶의 방식에 관해 의미 있는 교훈을 주지도 못한다.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없는 삶의 방식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타자도 되지 못한다.
이렇게 타자의 삶이 만나 경험할 가치가 없는 상태에서 창작가를 유혹하는 것이 있다. 이야기에는 타자들이 등장해야 하지만, 그들을 재현하기 위해 불가피한 만남과 경험을 건너뛰게 하는 매체 환경의 변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같은 비대면 매체들은 이 비효율을 간단하게 해결해 성가신 만남과 경험을 대체하게 도와준다. 굳이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마치 관찰하고 경험한 것처럼 세밀하게 타인의 삶을 기록하고 해석해 보여주는 당사자 직접 제작 콘텐츠가 구경거리로 넘쳐흐른다.
이런 콘텐츠는 직접 대면과 대화의 어려움과 위험, 성가심을 크게 경감시켜줬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내밀한 모습까지 관찰하고 직접 이야기를 듣는 효과를 낸다. 게다가 그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서사화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도 같이 보여준다. 타자와의 부딪침 없이 쉽고 빠르게 참조할 수 있다. 그래서 만화는 만화를 참조하고, 공연은 공연을 참조하는 경향이 심화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쓸모없어지는 셈이다. 타자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기에 만남 역시 의미가 없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모르는 존재를 만나며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을 경험이라고 한다면, 타자를 통한 경험 역시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진다. 타자는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작가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나 만남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만드는 매체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바로 진정성이라는 이념이다.
진정성의 나르시시즘은 이야기꾼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 대가다. 나를 제외한 타자들의 삶은 빤해 보이지만 그렇게 빤한 것으로 그려서는 인물이 생생하게 구축되지 않는다. 빤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인물도 빤하게 그려진다. 빤한 사람이 등장하는 빤한 이야기를 누가 읽겠는가. 그 글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빤하다고 생각하는 ‘이념’뿐이다. 이 이념이 선명해질수록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삶에 대한 이념이 사람을 압도해 사람은 ‘쓰레기’가 돼버린다. 너는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존재이고 ‘나’만 고독하더라도 진정성을 끈질기게 부여잡은 ‘인간’이 된다.
진정성이 자기를 성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판단하는 이념이 되면 세상은 진정한 자와 진정하지 못한 자로 이분화된다. 그리고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신은 저 타락한 존재들을 보며 결코 웃을 수가 없다. 가뜩이나 진정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고뇌하는 정신’이 진정성인데 고뇌하지 않는 ‘무-지성’들을 보며 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뇌하는 정신은 이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이웃들의 타락에 대해 더욱 고독하게 고뇌하게 된다. 진정하지 못한 자신을 고뇌하기 때문에 진정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유일하게 진정한 존재로 홀로 남는 것이다. 이게 진정성의 나르시시즘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타자가 두려워 만남을 회피하고 경험하지 못하거나 매체에 의지해 ‘게으르게’ 경험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세계의 비밀을 다 안다는 오만함에 의해 결론은 이미 나 있다. 세계와 타자를 관찰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타자의 가치가 사라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의미 있고 진정한 존재인 자신에 대한 ‘경험’이다. 오직 관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자기 내면뿐이다. 따라서 이야기할 만한 것도 자신의 내면적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토로뿐이다. 혼자 주절거리게 된다. 이 주절거림을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이야기의 성좌는 진정성이지만 진정성 이념이 작가 자신에게도 이야기에도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이 되는 이유다.
물론 이는 진정성을 용도 폐기하고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학생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반대로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 대량 양산되고 그런 작품을 양산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창작 환경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게 작품을 고심하고 전개하면 독자에게 가기도 전에 공장에서 가혹하게 ‘수정’된다. 한 학생은 자기 작품의 페이스를 고집했다가 상업적 효용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 ‘공장’으로부터 “더 이상 ○○님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형 플랫폼에 ‘등단’한 학생은 연재를 시작한 날 내게 문자를 보내 “이렇게 성장한 것이 선생님의 덕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빨리 돈을 벌어 제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라며 기쁨과 씁쓸함을 동시에 전해왔다.
나는 이 학생들이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마음을 잘 간직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더욱 학생들에게 이 형편없는 세상이 동시대와 대결하려는 자신들의 무기에 발라놓은 독약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정성이라는 무기에 발라진 나르시시즘이라는 독약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환멸을 느끼고 이 역겨운 세상에 적당히 순응하고 살아가는 다른 이들은 혐오스러워 경멸할수록 타자는 상대할 가치가 없어지고 맞선 자기만 이야기될 가치가 있게 된다. 세상이 형편없어질수록 이 형편없는 세상에 맞서는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유혹이 커진다. 그러나 이렇게 진정성의 이름으로 나르시시스트가 된 자보다 더 형편없는 존재는 없다. 그 존재야말로 이 형편없는 세상의 왕관이니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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