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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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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목적 없이 일 시작하면…올지도 몰라 글 쓰는 계기

글 쓰는 사람의 조건은 ‘시작하는’ 사람, 몸을 던져 사건을 만들어보는 건 어떤가
등록 2023-06-30 23:05 수정 2023-07-02 23:44
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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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글을 쓰면 좋을까요?

가끔 말의 감수성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거나 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일터 민주주의를 위한…’,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넘어서기 위한…’, ‘주변을 보듬고 세상과 연대하는…’과 같이 앞에 붙는 수식어가 달라지긴 하지만, 결국 말에 대한 감수성을 어떻게 키울지 얘기해달라는 겁니다.

승낙해놓고 나면 늘 후회합니다. 강의는 실패하고 원고는 변죽만 울리다 마칩니다. 왜냐? 저에게 그런 감수성이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있다고 한들 그게 말로 알려줄 수 있는지도 몰라서입니다. 감수성은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고 느끼는 거죠. 모종의 섬세한 감각인데, 그걸 말로 들으면 머리만 커지고 이성만 자극될 뿐입니다. 자신의 몸뚱이(육체)를 움직여 이 세계와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비로소 조금씩 길러질 수 있습니다.

고소공포증을 앓는 산악부 지도교수

글을 쓸 때도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외부 세계, 이를테면 타인·사물·사건·자연·예술작품 등과 접촉하며 순간순간 정서적 감흥이나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으면서 느끼는 육체적 감각과 함께 공감, 동정심, 희열, 분노, 슬픔, 즐거움, 감정이입, 정의감 같은 다양한 감정이 출렁거립니다. 외부 세계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감수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뭔가를 자꾸 느껴보려 하기보다, ‘행동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 어떨까 싶더군요. 저는 워낙 감각이 둔해서 그런지 뭘 느껴보려 해도 잘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궁여지책으로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감수성을 길러보자는 건데, 꽤 괜찮더군요.

저는 옥상 난간에 기대서지 못합니다. 투명한 유리로 밖을 볼 수 있게 만든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손잡이를 꼭 잡고 눈을 질끈 감습니다. 어릴 때 날쌘 친구들이 담장 위를 뛰어가거나, 철봉으로 만든 구름다리 위로 올라가 걷는 걸 보면 부러웠습니다. 저는 다리가 후들거려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몇 년 전에 알았습니다. 등산하는데 공황장애처럼 갑자기 공포가 밀려와 발을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습니다. 서 있을 수도 없어 주저앉았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잘 올라갔는데 갑작스럽게 고소공포증이 찾아오더군요. 일행 중 한 분이 손으로 제 발을 잡고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줬습니다. 평지에 내려올 때까지! 그 뒤로 높은 곳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저는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학교 산악부 지도교수입니다. 산악부 모임에서 저를 소개할 때마다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지도교수 김진해입니다’라고 합니다. 학생들도 의아해하는 표정입니다. ‘왜 산을 타지도 않는 선생이 우리를 지도(?)하는가?’ 매주 암벽등반이나 실내 클라이밍을 가자는 연락이 오지만 절대 가지 않습니다. 부원들에게 밥을 사주거나 평지에서 하는 행사(!)에만 갑니다. 그런데도 저는 산악부 지도교수입니다. 가끔 산악부 대표와 모임에 대해 상의하고 “에스컬레이터 없는 산엔 되도록 가지 말라”는 농담을 하며 지냅니다.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윤준환 5단)의 수련 모습. 윤준환 제공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윤준환 5단)의 수련 모습. 윤준환 제공

손뼉 칠 때 왼손이 오른손을 만나듯이

산악부 지도교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왠지 모르게 해보고 싶더군요. 산에 미쳐 있는 친구들이랑 어울려보고 싶기도 하고, 저에게 어떤 역할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언제 저렇게 씩씩하고 순박하고 믿음직스러운 청년들을 만나겠나 싶기도 했고요. 이유가 정확하진 않았지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합기도(아이키도)를 수련하게 된 것도 그랬습니다. 여러 일로 삶이 황폐해졌을 때, 상대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무도라 알려진 합기도에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사람에겐 왠지 모르게 하고 싶은 게 있고, 왠지 모르게 하기 싫은 게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아는지, 가진 게 얼마나 되는지와는 상관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내 앞에 닥친 어떤 계기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계기’(契機)란 말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 일을 하게 됐나요?”라고 묻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계기를 만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이나 기회’라는 뜻인데, 무도에서 ‘기’(機)는 조금 다른 뜻으로 읽힙니다. ‘기’란 복수의 사물이 어떤 동작을 협동적으로 달성하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이 녹아 뒤섞인 상태, 입력과 출력이라는 순차적 과정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어렵지 않습니다. 손뼉을 쳐보면 압니다. 손뼉을 칠 때 오른손이 먼저 출발하고 왼손이 나중에 따라오는 게 아니죠. 오른손이 저런 움직임으로 다가오니 거기에 맞춰 왼손이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손뼉을 치는 사건 자체만이 존재합니다. 오른손의 일과 왼손의 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학생과 선생이 배움이라는 사건을 동시에 만든다는 뜻으로 쓰는, ‘줄탁동기(啐啄同機) 또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도 껍데기를 깨기 위해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껍데기를 쪼면 어미 닭도 알 밖에서 껍데기를 쪼는 동시적 상황을 빗대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선후가 없습니다. 주체와 객체가 나뉘지 않습니다. 이런 게 ‘(계)기’입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수많은 계기가 쌓여 한 사람의 인간성을 만듭니다.

문제는 이런 순간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거죠. 우물쭈물하다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왠지 모르게 하고 싶은 일과 왠지 모르게 하기 싫은 일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도장에서 몸을 굴리고 상대의 기술에 걸려 바닥에 던져져 보니 알겠더군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몸을 움직여 부딪치고 던져지는 가운데 상대와의 호흡을 찾아가는 것을요. 단언컨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몸을 움직여 계기를 만들어가는 거야말로 인간적인 방법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 한겨레 자료

한나 아렌트. 한겨레 자료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용서’와 ‘약속’

이 주제와 연결되는 얘기를 좀 더 해보죠.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에는 ‘행위’라는 제목의 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행위’라는 개념은 인간관계의 그물망(Web) 속에 말로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함으로써 인간세계에 참여하는 활동을 뜻합니다. 인간만이 ‘말하고 행위하면서 자신을 보여주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인간세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말과 행위는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만 나타납니다. 타인과 함께한다는 뜻의 ‘공동존재’ 상태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고립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버립니다.

아렌트는 인간이 가진 가장 인간적인 능력은 이 세계, 이 지구, 이 인간관계의 망 안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전에 없던 길을 찾고, 전에 없던 시선을 확보하며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라는 거죠.

이 장을 읽다가 눈에 번쩍 띄는 대목이 있더군요. ‘환원 불가능성과 용서하는 힘’,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과 약속의 힘’. 운율을 맞춘 듯한 이 제목을 제 맘대로 다시 조립해보죠. ‘환원 불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용서하는 힘과 약속의 힘’. 앞은 우리가 맞닥뜨린 운명적 상황이고 뒤는 그에 대한 인간적인 대책으로 읽힙니다. 우리가 한 행위는 되돌릴 수 없고(환원 불가능하고), 우리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예측 불가능합니다). 막막하군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기에 ‘용서와 약속’이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방법이 제시됩니다. ‘용서’는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는 것입니다. 용서와 정반대의 행위인 ‘복수’는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새로움이 없죠. 당한 일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비슷한 행위를 반복할 뿐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 새롭고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합니다.(다만 ‘벌’은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라는 차원에서 유용합니다.)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는 능력은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바다에 안전한 섬 하나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 섬(약속)이 없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에 지속성도 연속성도 없을 겁니다. 약속은 사건의 불확실성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타인과의 새로운 ‘행위’로 나아가겠다는 윤리적 다짐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환원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우리 삶의 조건에서, 용서와 약속은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세우고 새로운 행위를 시작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인간적인 사람이 글을 썼으면

새로운 행위를 시작하려면 몸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머리가 아닌, 몸을 쓰세요. 내 몸의 기억을 믿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을 쌓아가야 감수성이 길러집니다. 우리 몸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하는 바탕입니다.

대만 아동문학의 거목인 린량의 산문집 <작은 태양>에 실린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아이들이 ‘싸우는’ 경험을 해야 굳건해진다는 얘기인데요, 설득력이 있습니다(아이들을 때리라거나 폭력을 옹호하는 글 아닙니다!).

나는 애들이 싸우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집에서 ‘자기네끼리’ 싸워도 괜찮다는 뜻이다. 다른 집 아이하고 싸우는 건 결사반대다. 형제자매끼리 싸우는 건 일종의 ‘교육’, 상당히 유익한 ‘싸움 교육’이다. 그런데 다른 집 아이와 싸운다는 것은 인류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니 그냥 놔둬서야 되겠는가!‘싸움 교육’은 형제자매처럼 극도로 친밀한 관계에서나 실시해야 한다. 관계가 달라지면 싸움은 해로운 것이 된다. ‘관계’란 싸움과 대단히 깊은 관계가 있다.나는 우리 아이들이 남에게 ‘주먹질’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주먹질’이 어떤 일인지는 알았으면 한다. 우리 애들이 남을 때리지는 않았으면 하지만, 맞는 경험은 좀 해봐도 괜찮다고 본다.나는 우리 아이들이 고귀한 생각을 품길 바라지만, 또 충분히 굳세지 못할까 걱정이다. 앞으로 커가면서 뺨을 한 대 맞는다면, 그때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썼다고 느낀다면,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그건 큰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맞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맞아도 더럽혀지지 않는 존엄함을 길러야 한다. ‘싸움 교육’의 목적은 ‘맞는 경험을 해봄으로써 육체의 고통과 자기 비하 간의 연결을 끊고, 교육받는 자에게 폭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굳건함과 모욕으로 더럽힐 수 없는 존엄함을 심어주는’ 것이다. ―린량, <작은 태양> 중 ‘싸움 교육’ 일부-

저는 인간적인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비인간적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사람은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글 쓰는 사람도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관조하는(바라보기만 하는) 삶이 아닌, 행동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사건을 만드세요. 인과관계나 논리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을 행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능력이니까요. 아무 목적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세요. 그런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다가온 계기를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아들이는 사람이.

왠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하고 나니 무겁고 재미없는 얘기였군요.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지난번 주제가 ‘시사 칼럼’이었는데, 열아홉 분이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성함과 글 소개만으로 이 상자를 채울 수 있겠는걸요. 가정사부터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울분에 찬 목소리와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 많았습니다.
자전거 수리를 해주신 분을 통해 선한 이들이 성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람(선님), 만 나이로 통일될 때 음력·양력도 함께 정리하라(영현님), 만 나이로 통일로 생기는 부조화와 혼란을 기억하라(담이님), 한전 적자의 원인은 따로 있다(YJ님), 서울국제도서전에 아쉬운 점이 많다(선옥님), 함께 기후재앙에 대응하자(정선님), 음식 배달 문화는 퇴행적 현상이다(진철님), 자신이 사는 지역을 알려 노력해야 한다(기상님), 세대 공백 현상이 혼란과 갈등을 부추긴다(민규님), 이용 편이만을 위한 KTX 세종역 신설을 반대한다(숙연님), 노조 활동을 부서 이동으로 보복하는 직장 상사(왕과장님), 전임 대통령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언론(홍현님), 산업의 전초기지로 전락한 대학(양흔님), 정치인은 공감과 포용의 말을 써야 한다(체스카님, 그간 빠뜨렸는데 미안합니다.)
개인사를 쓴 글이 몇 편 되는데요. 학생 때 홀짝으로 거액을 번 기억(기범님), 육아에 무심한 남편(다원님),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에 대한 상념(리나님), 여러 회사를 옮기면서 느낀 애환(쭌님), 가정폭력이 심했던 아버지(혜정님). 시사 칼럼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어떤 글이든 쓰면 되죠, 뭐.
시사 칼럼은 쓰기가 어렵습니다. 객관성과 주관성이 적절히 섞여야 합니다. 자신이 문제 삼은 상황을 사실을 바탕으로 분석해야 하고, 거기에 자기주장을 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합니다. 게다가 주장은 그 자체보다 근거가 더 중요합니다.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는 거야 쉽겠지만, 근거를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죠.
포커페이스란 말이 있죠.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 글 쓰는 사람이 왜 감정이 없겠습니까. 칼럼 주제로 쓸 정도면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겠죠. 그럼에도 내 반대편에 있는 사람마저 ‘저 얘기는 들을 구석이 있군’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려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죠. 되도록 쓰지 맙시다.

<br><strong data-large=*무적의 글쓰기: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


*무적의 글쓰기: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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