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무서운’ 인물이 있습니다. 소설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인데,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모래알과 수많은 별과 수많은 파리와 수많은 나뭇잎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 똑같은 두 개의 모래알이나 똑같은 두 개의 별, 똑같은 두 개의 파리, 똑같은 두 개의 나뭇잎은 없다. 그것은 모두 다 제 나름대로 독특한 모양을 갖고 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 그러나 이 모래알이나 별, 나뭇잎을 표현하는 데 꼭 알맞은 말은 하나밖에 없다.’ 다른 글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물에는 오직 하나의 명사, 움직임에도 오직 하나의 동사, 그것을 형용하는 데도 오직 하나의 형용사가 있을 뿐이므로, 작가는 하나밖에 없는 이 말을 찾아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가장 적확한 단어 하나’를 찾으라는 말인데, 이런 주장을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라고 부르더군요. 이런 말을 들으면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 겁먹게 됩니다. 과도한 완벽주의라고 할까요? 자신이 쓴 단어가 ‘가장 적확한 단어’라고 아무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누가 보증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있으니 찾으라고 하니, 막막하고 두렵군요.
그가 작가의 감정 개입을 거부하고 당대 현실을 무심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탐색한 사실주의 작가라는 점에서 저 말은 하나의 사물에 고정불변의 본질이 있고 거기에 완벽히 들어맞는 단어가 반드시 있다는 뜻으로 읽히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뜻만 통하면 되는 거 아냐?’라며 대충 눙치고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겠죠.
다만, 문장에 뿌려지는 단어는 ‘사물’과 일대일 관계로만 정해지는 게 아닙니다. 훨씬 복합적이죠. ‘사물’과 ‘단어’의 관계뿐만 아니라, ‘단어’와 ‘단어’의 관계도 중요합니다.(앞뒤에 어떤 단어가 왔는가?) ‘단어’와 ‘작가’의 관계도 중요합니다.(어떤 메시지와 정서를 표현하고 싶은가?) ‘단어’와 ‘독자’의 관계도 고려해야 합니다.(이 글을 누가 읽는가?)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학생이 낭창낭창한 목소리와 초롱초롱한 눈매로 발표를 하면, 나는 “뻔뻔하게 발표를 잘한다”고 칭찬한다.’
‘낭창낭창한 목소리’와 ‘초롱초롱한 눈매’란 표현을 갖고 고민을 했습니다. ‘낭창낭창하다’라는 말이 학생의 목소리를 잘 표현하는 단어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당한, 또렷한, 분명한’ 따위를 떠올려봤지만, ‘낭창낭창하다’라는 말보다 ‘적확해’ 보이지는 않더군요. ‘초롱초롱한’은 앞에 ‘낭창낭창한’이 있기 때문에 쓴 단어입니다. 운율을 맞추기 위해 이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낭창낭창~, 초롱초롱~!’)
물론 수식어 없이 건조하게 ‘학생이 발표를 잘하면’이라거나 ‘학생이 자신감 있게 발표하면’이라고 써도 됩니다. 하지만 뒤에 오는 ‘뻔뻔하게 발표를 잘한다’는 말의 반어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발표가 멋졌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독자들이 글을 읽는 리듬감에서 오는 즐거움도 주고 싶었고요. 이렇듯 단어 선택에는 복합적인 동기가 발동합니다.
이러고 보니 일물일어설보다는 ‘일물다어설’(一物多語說)을 주장하고 싶어지는군요.(누가 들어주기나 하려나?)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적확한 단어는 여럿이다.’ ‘나뭇잎’이라는 단어도 그 말이 쓰인 맥락, 단어가 주는 어감, 문장 속에서 풍기는 말맛과 문체적 효과, 글쓴이의 의도나 정서에 따라 ‘이파리’ ‘잎사귀’ ‘잎 쪼가리’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듯이, 단어도 혼자서는 살지 못해서 결국 글 안에서 다른 단어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의미를 ‘쌓아나가는’ 것입니다. 가장 쉽고 평범한 단어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두터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어야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적확한 단어 찾기’는 태도의 문제이지 ‘어딘가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적확한 단어를 찾는 사람은 익숙한 단어를 생경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단어를 쓰고 나서 그걸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나도 알 수 없는 ‘플러스알파’(+α)가 존재한다는 결여감, 미완성의 찜찜함, 좌절의 감정을 잃지 말자는 겁니다.
그런데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곱씹다보면 전혀 다른 곳에 눈길이 갑니다. 보통은 ‘적확한 단어 찾기’를 강조하는데, 저는 ‘사물’(일물)에 신경이 더 쓰입니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좌절은 적확한 단어보다는 ‘사물’에 대한 ‘감각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일물’(一物)은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입니다. 사물 외에도 사건, 현상, 경험, 생각, 감정 등 모든 게 포함되죠.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제일 큰 문제는 ‘내가 이 세계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플로베르 얘기를 더 해보죠.
청년 시절 기 드 모파상이 플로베르를 찾아가 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대뜸 플로베르가 묻습니다. “어느 층계로 올라왔는고?” “나무 층계로 올라왔나이다.” “층계가 몇 개던고?”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는 소설가가 될 수 없네.” 모파상은 얼른 밖으로 나가 계단 수를 세어보고 와서 서른여섯 개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멈추지 않고 “일곱 번째 계단에서 뭘 발견했는고?”라고 묻습니다. 다시 가서 보니 일곱 번째 계단에는 못이 빠져 있었습니다. 못이 빠져 있더라고 대답하자 플로베르는 “그 일곱 번째 계단에선 어떤 소리가 나던고?”라고 묻습니다. 모파상은 그 소리를 들으려고 못이 빠진 계단을 수십 번 밟아봤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괴팍하죠.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글 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제1의 덕목, ‘세계를 감각하기 위한 집요함’이라는 것. 평소엔 흐리멍덩하게 지내더라도, 글을 쓸 때는 이 세계를 감각하려고 자신을 쥐 잡듯이 몰아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몰아세우다보면, 우리의 단어(언어)가 이 세계를 표현하기엔 턱없이 빈약함을 알게 됩니다. 말로 포착되지 않은 채 지나쳐버린, 언어라는 표면 저 아래 심연에서 꿈틀거리는 세계가 있습니다. 외국어를 만나면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도 ‘함께 식사를 마친 뒤에 자리를 뜨지 않고 빈 그릇을 앞에 둔 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죠. 스페인어에서는 이걸 ‘소브레메사’(sobremesa)라는 말로 부르더군요. ‘사랑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거나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찬란한 슬픔’(포르투갈어 ‘사우다드’·saudade)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어 내리는 일’(포르투갈어 ‘카푸네’·cafuné)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니 놀랍습니다.(마리야 이바시키나,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몰랐던 말을 알게 되니 놓쳤던 세계가 분명해집니다. 허술한 말에 가려져 지나쳤던 세계!
한 걸음 더 나아가 존 케닉이란 시인은 ‘슬픔에 이름붙이기’라는 책을 통해 우리도 한번쯤 마주쳤던 감정과 상황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을 했습니다. 미처 언어화하지 않은 ‘일물’(사물)을 찾아 모은 것이죠. 예컨대, ‘비행기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려다보며 느끼는 천상의 기분’(보란더·volander)에서 시작해,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깨달음’(산더·sonder), ‘독창성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두려움’(베이모달렌·vemödalen), ‘당신이 원하는 삶과 당신이 살고 있는 삶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기분’(오즈유리·ozurie) 같은 것들.
‘일물일어설’의 핵심은 ‘일물’입니다. 나에게 ‘이 세계(사물)에 대한 감각과 감응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나에게 못 빠진 계단의 소리를 듣는 귀가 있는가? 그 감각이 있다면 ‘삐걱’이든 ‘뿌지직’이든, ‘뚜두둑’이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런 감각이 없어 슬픕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아홉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원래의 수신자에게도 보내졌으면 좋겠네요. 선옥님은 어머니를 홀로 간병하는 지인의 아픔을 따뜻한 말로 위로하셨습니다.(예전에 ‘나를 위로해주는 것’이라는 주제로 보내신 글의 주인공인 듯합니다만) 정선님은 한국 여행을 좋아하는 40년 지기 일본 할머니(한국 이름 고현경)가 겪은 여러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할머니의 넘치는 도전 정신과 한국 사랑을 느낄 수 있게 전해주셨습니다. 준준님은 저한테 편지를 쓰셨는데요. 저와 겹치는 인연이 무려 세 가지(산악부, 평어, 글쓰기)나 된다고 하네요. 현님은 아버지의 구순 잔치 때 아버지와의 기억을 담은 책을 만들어 드리겠다는 각오를 써주셨습니다. 담이님은 요리를 직접 하면서 만나는 좌충우돌 상황에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더 사랑하게 됐나봅니다. 현재 상황과 과거 기억을 잘 배치했더군요. 풀레님은 마음이 상해 카페에서 글을 쓰면서 친구와 통화하다가 커피를 태블릿과 책에 엎질렀는데도 전화를 끊지 않으셨다는군요. 말씀처럼 책이 마르면 책에서 아픈 기억보다 그윽한 커피 향이 나기를 기대합니다. 정렬님은 훈련소에 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셨는데, 자신의 군대 기억과 아들에 대한 기억을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쓰셨습니다. 박노해의 시 ‘썩으러 가는 길’이 아드님에게 큰 힘이 될 듯싶네요. 영미님은 17년을 함께했던 반려견(?)을 떠나보내면서 느낀 안타까움을 편지로 전하셨습니다.
이번호에는 영희님 편지를 소개합니다. 만난 적 없는 ‘무적의 글쓰기’ 동지인 선옥님에게 쓴 편지인데, 선옥님이 쓴 여러 글을 실마리 삼아 선옥님 모습을 그려보더니 이내 ‘읽어보련’ 하며 책을 권해주시던 어릴 적 사서 선생님 장면을 끼워넣어 두 장면이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겹치게 하셨네요. 독자 투고 단골손님들에 대한 우정의 마음과 함께.
친애하는 선옥님께
이 편지를 쓰는 순간을 오랫동안 상상해왔습니다. 저는 선옥님을 모르지만, 또 조금 알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자리를 정돈한 뒤 글을 쓰시고, 식당에서 한번 쓴 휴지는 단정하게 접어서 나오는 습관이 있으시지요? 늘 메고 다니시는 가방의 어깨끈은 그 무게와 시간을 견디느라 조금 늘어진 모양일 테고, 인중에는 날카로운 그릇에 찍힌 흉터를 갖고 계시다고요. 직장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 저와 달리, 선옥님은 동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부러웠습니다. 저도 언젠가, 동료와 복숭아를 먹으며 상념을 나눌 수 있을까요?
햇볕이 잘 드는 오후의 도서관 창가란, 저에겐 꿈같은 공간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다는 핑계로, 동네 구립 도서관에서 어렵게 빌린 책의 반납 기한을 매번 어기곤 합니다.
어린 시절 학교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새 책이 들어올 때마다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겨울밤에 호빵을 사서 아랫목에 감춰둔 외할머니처럼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쁘게 새 책을 건네며 물으셨죠. “읽어보련?” ‘봐라’ ‘볼래’도 아니고, ‘보련’. 그 말끝이 어쩐지 달고 맛나서, 저는 몇 번이고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곤 했습니다. 보련, 섣부른 권유도, 어른의 강요도 아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부드럽게 혀뿌리를 울리는 말.
저의 머릿속에 있는 사서 선생님은 그렇게 부드럽게 울리는 ‘보련’의 얼굴이라, 저는 선옥님을 떠올릴 때도 자꾸만 그런 얼굴을 상상하게 됩니다. “동아리가 없으니 편하겠어요”라는 동료분의 말에 “그래도 아이들과 도란도란 즐겁게 지내고 싶어요”라고 덧붙이실 때도, ‘도란도란’이라는 말을 고르고야 마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이 글쓰기 수업에서, 부드러운 지면 위에 적힌 몇 개의 이름이 눈에 익어갈 때마다, 저는 비밀 친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으로 두근거리며 다음번 문장을 기다립니다. 선옥님, 담이님, 혜욱님, 정선님, 이번엔 또 무슨 글을 쓰셨을까. 선옥님은 제가 제일 먼저 이름을 외운 분입니다.
지난여름엔 처음으로 ‘신비 복숭아’라는 걸 먹어봤습니다. 아주 달고 맛있었어요. 소중한 글쓰기 친구에게 이 맛을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김영희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10년 후 오늘’이라는 글을 써보겠습니다. 미래를 상상해보는 건 즐거운 일일지 두려운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무심히 맞이한 아침처럼 10년 후의 아침은 어떨까요? 변함없는 삶의 연속일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일지. 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요? 10년 후 맞이한 오늘을 ‘현재형’으로 써보시기 바랍니다.
주제: 10년 후 오늘(현재형으로)
분량: 1천 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4년 10월27일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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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