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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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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쌓고 공감은 나누고… 글쓰기 공동체를 이루는 법

큰 소리로 읽기·대화하기·말하지 않아도 되기, 세 가지 수칙으로 운영
등록 2024-11-15 19:43 수정 2024-11-22 11:38
연구실 테라스 난간에 둔 플라스틱 화분. 잠깐 꽃이 피었다가 이내 말라 죽었는데, 흙을 버리지 못하고 달걀 껍데기·귤껍질·사과 꽁다리 같은 것들이 생기면 파묻어줬다. 좋은 흙이나 되라고 했는데, 무성한 풀꽃이 자랐다.

연구실 테라스 난간에 둔 플라스틱 화분. 잠깐 꽃이 피었다가 이내 말라 죽었는데, 흙을 버리지 못하고 달걀 껍데기·귤껍질·사과 꽁다리 같은 것들이 생기면 파묻어줬다. 좋은 흙이나 되라고 했는데, 무성한 풀꽃이 자랐다.


제 연구실 테라스 난간 위에는 볼품없는 플라스틱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게으른 주인 때문에 잠깐 꽃이 피었다가 이내 말라 죽어 흙만 담겨 있었습니다. 흙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화분이 생기면 분갈이할 때 섞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달걀 껍데기, 귤껍질, 사과 꽁다리, 안 먹어 썩어가는 복숭아 같은 것이 생기면 파묻어줬습니다. 양분이 없는 흙은 혈색 없이 딱딱한 덩어리가 되지만, 유기물이 풍부하게 들어간 흙은 곱고 보드랍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흙에서 이름 모를 싹 몇 줄기가 툭 솟아났습니다. 기특해서 물을 자주 줬더니 한 달이 안 돼 초록 이파리가 가득한 화분으로 바뀌더군요.

‘생명이란 저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예측 불허! 바람결에 풀씨가 날아왔는지, ‘흙이 알을 낳았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좋은 흙이나 되라고 했는데, 무성한 풀꽃이 자랍니다. 배움도 예기치 않게, 무엇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게 불쑥 자라는 풀 같은 것 아닐까요.

나의 글이 우리의 글이 되기까지

글쓰기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비슷합니다. 저는 1년에 한 번 ‘기록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라는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대상 하나를 정해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고 스스로 편집·출판까지 해야 하는 ‘빡센’ 수업입니다. 수업은 단순합니다. 발표를 맡은 학생이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 앞에서 자기 글을 큰 소리로 읽어줍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학생들이 그 글에 대해 이러저러한 대화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고, 서로의 목소리를 알게 됐습니다. 예측 불허의 이야기들이 뒤섞여 서로를 자라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디자인을 전공하는 성주는 애초에 자신을 거쳐간 ‘운동화’를 중심으로 운동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글이 다른 쪽으로 간다는 것이죠. ‘예술을 사랑하기도 전에 예술을 사랑하는 척해야 했다.’ 그러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입시 전쟁터를 통과해 어렵게 들어온 대학은 갑자기 자신에게 온전한 예술가의 풍모를 요구합니다. 대학 입시만 준비해온 자신에게 예술가이기를 강요한 거죠. 원치 않는 자리에 가서도 즐거운 듯 자신을 속여야 합니다. 그럴수록 외로웠습니다. 계속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사는가? 그렇게 방황할 때 알게 된 노래 하나가 자신을 지탱해줬다는 글이었습니다. 운동화에 얽힌 생활 얘기를 경쾌하게 쓰려고 했는데, 자꾸만 예술가적 한계, 예술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만이 보일 뿐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슬픔의 정서와 무게를 알게 된 거죠.

다희는 “너의 아픔을 잘 알겠어. 우리도 비슷해”라며 위로합니다. 그러면서도 “너의 글에…” 하면서 “그 노래가 너에게 어떤 위로가 됐는지, 너를 어떻게 성장시켰는지가 더 드러나면 좋겠어”라고 말합니다.

버거운 삶을 사는 친구의 글을 마주하면 학생들은 뭐라 말할지 몰라 한참 동안 침묵합니다. 감정에 북받쳐 흐느끼는 친구에게 ‘글 자체’에 대해 논평하는 건 모두에게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학생들은 요령 있게 잘해냅니다. “그래도 문장을 이렇게 고쳐봐.” 그 말 한마디가 과거에 사로잡혀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글쓴이를 구출합니다. 우리는 슬픔을 나누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슬픔을 잘 ‘표현’하고 더 많은 이들이 그 슬픔을 공유할 수 있게 다듬어야 하는지와 같은, 자신들의 ‘본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는 이질적인 주제의 글이 이어집니다. 애인과의 알콩달콩한 사랑 얘기와 연락을 끊고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아버지를 찾아간 얘기가 ‘한자리’에 모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당한 따돌림과 차별을 다룬 글과 손녀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다룬 글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전혀 다른 경험, 문체, 목소리, 주제, 정서가 ‘한자리’에 모이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거나 가벼이 여기지 않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집중합니다.

글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친구는 무조건적인 공감과 격려를, 어떤 친구는 맞춤법을, 어떤 친구는 글의 흐름을, 어떤 친구는 주제를 가지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차이를 말살하지 않으면서도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하면서 가르침과 배움이 동시에 이뤄지는 현장을 경험합니다.

“어때? 어디 고칠 데 없어?”라는 말은 자신의 글을 겸손하게 내어놓는 것입니다. 타인의 의견을 듣고 그 목소리를 내 글에 반영하겠다는 수용적 자세입니다. 물론 다 반영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 대목이 마음에 든다고 하고, 어떤 친구는 좀 고치면 좋겠다고 하니까요. 어떻게든 두 얘기 중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경험과 시선이 교차하며 함께 성장

글쓰기는 혼자 하는 일입니다. 고독하고 내밀한 행위입니다. 동시에 글쓰기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두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고독은 공동체와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고독한 글쓰기는 글쓰기 공동체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고독한 사람이야말로 공동체를 이룹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개인의 고독과 존엄성을 철저히 보호합니다. 각자의 고독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모두의 고독은 당연히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떡갈나무 숲속에서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김동환, ‘아무도 모르라고’)라는 시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 있습니다. 그 샘물이 기쁨일지 슬픔일지 좌절일지 희망일지는 모릅니다. 나만의 고독한 경험입니다. 싫든 좋든 그것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고독을 옹호해주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런 공동체야말로 개인의 고독을, 달리 말해 개인의 존엄성을 지켜줍니다. 글쓰기 공동체는 각자가 ‘아무도 모르는 샘물’에서 퍼온 물을 나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글쓰기 공동체를 만들어보세요. 글쓰기 공동체는 ‘글쓰기를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왜냐고요? 지금 내 앞에 어떤 글이, 즉 어떤 삶이 도래할지 모르니까요. 우리는 내 앞에 도래한 글(삶)에 순간순간 조응하고 반응할 뿐입니다. 어떤 현실적 목적도, 엄밀하고 불변하는 기준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내 앞에 도래한 이야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일 뿐입니다. 그러니 글쓰기 공동체는 텅 비어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공즉시색·空卽是色) 거울처럼 누가 지나가더라도 그를 비출 뿐 담아두지 않습니다.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영원히 아마추어입니다. 아마추어가 모인 글쓰기 공동체는 낯선 골목에 들어선 여행자처럼 호기심과 열정을 갖고 모든 걸 천천히 관찰하며 자기 속에서 생경하게 솟아나는 직관을 즐깁니다. 자신의 글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글도 그렇게 대합니다. 가득 찬 사람, 모든 걸 아는 사람, 즉 전문가들은 공동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글쓰기 공동체는 글 쓰는 힘을 길러줍니다. 두 사람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이어가고 내 글을 조금씩 더 나아지게 하려면 내 글을 읽고 비판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글을 읽고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다보면 ‘부드러운 단단함’이 생깁니다. 마을이나 일터, 아니면 지인들과 함께, 그마저 어려우면 인터넷 블로그를 만들어 내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좋습니다.

어느 날 흙에서 이름 모를 싹 몇 줄기가 툭 솟아났다. 배움도 예기치 않게, 무엇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게 불쑥 자라는 풀 같은 것 아닐까. 김진해 제공

어느 날 흙에서 이름 모를 싹 몇 줄기가 툭 솟아났다. 배움도 예기치 않게, 무엇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게 불쑥 자라는 풀 같은 것 아닐까. 김진해 제공


글쓰기 넘어 민주주의 실천의 장

글쓰기 공동체의 ‘운영 원리’는 간단합니다. 두 개의 원칙과 하나의 부칙!(인원, 장소, 횟수, 글 주제는 상황에 맞춰 알아서들 하시고요)

 

[제1원칙] 큰 소리로 읽기. 육성(肉聲)이야말로 글쓰기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입니다. 눈으로만 읽으면, 읽는 사람은 마치 심사자가 된 듯합니다. ‘어디 잘못된 데 없나?’ 하면서 글을 평가합니다. 큰 소리로 읽는 행위는 자신의 글을 공동체 속에 공식화하는 일이자 글을 인간화하는 일입니다. 글 쓰는 사람에겐 자신감을, 듣는 사람에겐 글의 육체성을 놓치지 않게 합니다. 큰 소리로 읽기는 참여한 모두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익히는 장입니다.

[제2원칙] 대화하기. 대화는 사람들 속에 있는 지혜를 이끌어냅니다. 내 글에 대한 감상을 듣는 것은 내 경험을 사유화하지 않고 타인에게도 그 경험을 해석할 권리를 나눠주는 것입니다. 적대감 없이 무엇이든 말하세요. 맞춤법과 띄어쓰기와 같은 형식적인 것에서부터 문장, 단락, 글의 흐름, 그리고 주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겁니다. 모든 글은 해석입니다. 내 경험을 쓴 글도 하나의 해석입니다. 거기에 타인의 의견을 묻는 것은 ‘내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에 대한 (타인의) 해석’을 구하는 것입니다.(‘해석의 해석’이라니, 어렵군요) 그러면 내 글에 타인의 목소리가 스며듭니다. 그 목소리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마세요. 대화하기도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익히는 장입니다.

[부칙] 말하지 않아도 되기. 어떤 모임이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고, 말을 적게 하거나 아예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공동체적 우정을 쌓을 수 있습니다.(말 없는 사람에게 말을 권하면 ‘어떻게 참았을까?’ 의문이 생길 만큼 새롭고 놀라운 말을 합니다만) 이 부칙은 모임을 진행하면서 견고한 원칙을 강요하지 말고, 무엇이든 허용하겠다는 포용성과 개방성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개방성은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 기꺼이 자신의 관점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저는 글쓰기를 말하지만, 실은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글쓰기 공동체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맨흙에서 어떤 싹이 솟아오를지 아무도 모릅니다. 글쓰기 공동체라는 물을 주세요.

글·사진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독자 글

‘10년 후 오늘’이란 주제로 다섯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혜욱님이 오랜만에 글을 보내셨네요. 은퇴한 남편과 반년 동안이나 전국여행을 다니시더군요. 소설가와 화가가 되어 바쁜 예술가의 삶을 사는데, 그 계기가 10년 전 한겨레21에 실린 ‘편지’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영희님 때문이랍니다. 지면으로나마 우리가 연결돼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선님은 매일 아침 눈을 뜨기 전에 이불 속에서 손과 발을 돌리며 천천히 몸을 깨어나게 하는 운동을 하면서 삶의 뒤안길을 행복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희님은 바둑을 잘 두게 됐는데 ‘싸움 뒤 두 상자에 흑백돌을 담으면, 바둑판 그 어디에 승패가 남는가’라는 시구로 바둑처럼 담담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십니다. 일남님은 유기묘와 길냥이 네 마리에게 간식을 주면서 비인간 존재를 돌보는 자신의 새로운 인간성을 발견하고 스스로 위로받는다고 하시는군요.

이번호에는 선옥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선옥님은 책방을 운영하면서 작가를 초대했다는데, 누구일까요. 재미있는 상상이십니다.

 

밑줄 긋는 책방

그때 자존심을 눌렀어야 했다. ‘돈 많은 분인 것 같은데…. 생활용품이 모두 명품이고, 먹는 과자도 비싼 것만, 티백 차도 주문 제작한 것만 마시던 분이었는데….’ 공연히 지난 기억을 꺼내 푸념하고 있다. 그분이 내게 “책방을 하면 어울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상했다. 퇴직하면 책방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내게 어울린다는 말도 참 좋은 말인데…, 싫었다. 책방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정도로 싫었다. 그 사람의 가식과 허영을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더 가소롭다.

하지만 나는 지금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달리 바라는 것 없이 월세가 밀리지 않는 걸 목표로 꾸려간다. ‘책방 열면 책 사러 가겠다’ ‘후원하겠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막상 책방을 열려고 하니 아득했다. 혼자서 해보자는 욕심에 덜컥 가게를 계약했다. 퇴직하니 주변에 사람이 없다. 부자 친구는 더더욱 없다.

추천도서를 정하는데, 늘 알려지지 않은 책으로 정한다. 숨은 도서가 많으니까. 그것도 ‘밑줄 그어진’ 책이다. 우리 책방은 밑줄 그은 책을 전시한다. 기증받기도 한다. 새 책에도 밑줄을 긋는다. 그래서 책방 이름도 ‘밑줄 그은 책방’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다음주가 10월의 마지막이다.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근무했던 학교에 나가 아이들과 독서토론을 하는데, 이달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해야겠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작가와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젊은작가상’을 받은 신인을 초청했다. 올해 초 수상하고 한동안 바쁘게 활동했는데, 드디어 한적한 이곳에도 기회가 주어졌다. 작가 스스로는 미스터리를 쓰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리얼리스트’라 부른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갈등,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는 듯하다. 작가와 작품이 함께 성장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시대를 마주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에서는 작가와 참가자들이 작가의 소설에 밑줄 그은 것을 모두 모아 낭독하기로 했다.

조용히 작가님이 들어온다.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엄마, 나 물 좀 줘.”

-박선옥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과거로 가보겠습니다.(미래일지도) 우리 삶은 순간의 연속입니다. 잘게 쪼개어 봐도 순간이고 통째로 봐도 순간입니다. 남미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순간들’이라는 시에서 ‘내가 만일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이라고 묻고는 이렇게 답합니다.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완벽해지려고 버둥거리지 않으리라.’ 남다른 통찰이군요. 저라면 실수나 후회 없이 더 완벽하게 살겠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우리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새로운 방식의 순간성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삶을 꿈꿔보시겠습니까?

 

주제: 다시 태어난다면

분량: 1천 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4년 12월8일

보낼 곳: 한겨레21 대표 이메일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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