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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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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뿔테 안경! 자화상을 그려볼까요

일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환유’… 언어의 불합리성이 당신의 글쓰기를 자유롭게 하리라
등록 2024-06-21 17:37 수정 2024-06-23 14:06
‘자화상’은 얼굴만 그린 그림이지만 우리는 ‘자화상’이 자신의 전체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도리안 그레이> 속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자화상’은 얼굴만 그린 그림이지만 우리는 ‘자화상’이 자신의 전체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도리안 그레이> 속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오늘은 글쓰기보다는 언어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언어의 불합리성이랄까 불완전성이랄까 하는 얘기를요. 아니, ‘용기’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먼저 연필이나 볼펜과 함께 백지 한 장을 가져와볼까요. 거기에 당신의 자화상을 정성껏 그려보세요(제발). 종이도 없고 귀찮기도 하다면, 좋습니다. 머릿속 상상만으로라도 그려보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렸나요? 자화상이라고 그린 그림은 아마도 당신의 얼굴일 겁니다. 눈, 코, 입, 귀, 목, 얼굴선, 머리카락 같은 걸 그렸겠죠. 어깨선까지 그렸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시 묻습니다. 왜 그렇게 그렸나요? 당신의 몸은 얼굴 말고도 손도 있고, 배도 있고, 다리나 발도 있을 텐데요. ‘온몸’, 몸뚱이 전체가 당신을 이루는 모습일 텐데 어째서 얼굴만 그리 열심히 그리셨나요? 우리는 얼굴만 그려놓고선 ‘나야!’라거나 ‘내 자화상이야!’라고 말합니다.

얼굴만 그리고선 ‘내 자화상!’

게으르거나 숨기려고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얼굴이 다른 사람과 가장 잘 구별되기 때문일 테지요. 손이나 발만 보여주고 그 손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얼굴은 쉽죠. 그래서 주민등록증이나 여권에 붙은 증명사진은 전신이 아닌 얼굴만 나오나봅니다. 얼굴만으로 온몸을 대신 보여준다!

숨바꼭질할 때 술래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를 외치고 친구들을 찾아다닙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장독대 뒤에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이나 ‘옷자락’만 보고도 친구가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동물들과 공유하는 능력입니다. 동물들도 대상의 일부분만 보고 대상 전체를 알아차립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처럼 일부분으로 전체를 대신 나타내는 방식을 언어에서는 너무나 흔하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밥 먹고 나서 ‘식탁 좀 치워줘’ 하며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있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식탁을 번쩍 들어 한쪽 구석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식탁 위에 있는 그릇을 부엌으로 옮겨달라는 뜻으로 읽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실제로 하는 행동은 ‘그릇’을 치우는 건데, 말로는 ‘식탁’을 치운다고 합니다. 선생이 학생한테 ‘칠판 좀 지워줘’라고 할 때, ‘칠판을 어떻게 지우라는 말씀입니까?’라고 항의하는 학생은 많지 않겠죠. ‘칠판을 지우다’라는 말은 칠판이 아닌, 칠판 위에 적힌 ‘글씨’를 지운다는 뜻입니다(정말로 칠판을 ‘지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손을 씻다’와 ‘손을 들다’의 상황은 무척 다릅니다. ‘손을 씻다’는 손목 끝에 달린 부분을 씻는 것이지만, ‘손 들어’라는 말에 ‘손만’ 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손이 붙어 있는 팔을 함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손과 팔을 함께 들라고 하지 않고 손을 들라고만 합니다.

<한겨레21> 독자 선옥님은 ‘사서 교사’로서 학교 도서부 운영과 관련한 저항과 그로 인한 고민을 담담하게 썼다. 사진은 대전의 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 한겨레 자료

<한겨레21> 독자 선옥님은 ‘사서 교사’로서 학교 도서부 운영과 관련한 저항과 그로 인한 고민을 담담하게 썼다. 사진은 대전의 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 한겨레 자료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사건에 대한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건은 시간 흐름에 따라 앞뒤가 있습니다. 앞에 벌어진 일이 있고 나중 일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고기를 굽는다’라는 말은 고기를 불에 올려놓고 굽는 겁니다. 안 익은 고기를 불에 올려놓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고기가 익습니다. 안 익은 고기가 익은 고기로 변하죠. 물 끓이기도 마찬가지죠. 찬물을 불에 올려놓고 시간을 보내면 보글보글 끓는 물이 됩니다.

그런데 ‘빵을 굽다, 콩나물국을 끓이다’ 같은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이 안 되는’ 표현입니다. 물론 어제 구워놓은 빵을 따뜻하게 먹고 싶어 ‘다시’ 구울 수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적당히 반죽한 밀가루 덩어리를 오븐에 넣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꺼내야 ‘빵’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밀가루 반죽을 굽는다’고 하지 않고, ‘빵을 굽는다’고 합니다. 어제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데우려고 다시 끓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찬물을 부은 냄비에 시간차를 두고 다시마와 멸치, 콩나물, 간장과 소금, 고추나 파 같은 국거리 재료를 넣어 끓인 결과물이 ‘콩나물국’입니다. ‘구멍을 뚫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죠. 벽에 드릴이나 망치로 조금씩 파서 ‘마침내’ 뻥 하고 구멍을 냅니다. 구멍은 구멍을 내는 일련의 과정 맨 끝에 생긴 결과입니다. 그전에는 벽만 있을 뿐 ‘구멍’은 없습니다. 그래서 ‘벽을 뚫다’와 ‘구멍을 뚫다’는 같은 듯 다른 표현이 됩니다.

인간의 언어는 이런 식으로 어떤 걸 정확하게 콕 집어서 말하지 않고 그 옆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대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그런 식이라는 뜻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그 곁에 있는 다른 무언가로 대신 이해합니다. 이것을 환유라고 부릅니다. 문학에서는 환유를 수사법의 일종으로 보지만, 언어학에서는 환유를 기교나 장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 세계를 환유적으로 이해합니다.

앞사람의 뺨에 점이라도 하나 있으면 눈은 어느새 그곳을 향합니다. 눈곱 낀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아닌 눈곱을 봅니다.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특이한 것, 두드러진 걸 선택적으로 봅니다. 어떤 편향이나 경향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름 모를 사람을 지칭하면서 ‘저기 앉은 단발머리’ ‘저기 뿔테 안경’ ‘저기 반바지’라고 하는 거죠.

특이한 것, 눈에 띄는 것만…

그런 점에서 언어는 불합리합니다. 비논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똑 떨어지게 말하기보다는 대충 말합니다. 옆에 있는 것, 특이한 것, 눈에 띄는 것만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조금도 거짓 없이 모두 말하는 게 도리어 이상합니다. 대전에서 사는 사람이 고향인 부산에 왔습니다. 친구가 “어떻게 왔어?”라고 물으면 보통은 ‘기차로 왔지’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이걸 친절하게 말한답시고, ‘집을 나와서 5분 동안 걸어서 시내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지. 201번 버스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했어. 계단을 올라 부산행 기차표를 사서 케이티엑스(KTX)를 탔어. 1시간37분 후에 부산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이 식당까지 왔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구구절절이 다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중간에 자리를 털고 도망갈 겁니다. 물론 저렇게 설명해본들, 본인이 한 모든 행동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언어 때문에 인간은 고유한 목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이 말은 결코 우리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가지고 태어납니다. ‘꼬끼오’는 닭의 목소리입니다. ‘어흥’은 호랑이의 목소리고요. 고양이는 ‘야옹’, 강아지는 ‘멍멍’ 합니다. ‘짹짹’은 참새. 목소리와 목소리 주인이 일치합니다. 본능에서 나오는 소리, 소리 자체가 그 주인인 목소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는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는 내 목소리가 아닙니다. 갖고 태어난 게 아니므로, 타인에게 배워야 합니다. 제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면 아랍어를 썼을 겁니다. 언어 때문에 자연의 목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육체와 본능에서 나온 운명적 목소리를 잃어버린 거죠.

그런데 그 언어가 부정확하고 불합리하다고 합니다. 말은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택시는 사람도 아닌데 뉴스에 ‘택시 전면 파업’이라고 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바쁘니까 도시락 먹자’고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락’을 먹자고 하다니, 불합리하군요.

재해석·재구성·재창조의 공간

그, 래, 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언어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언어가 이 세계를 온전하게 담는 것이라면 우리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쓴 글이면 충분할 겁니다. 잘만 썼다면 덧붙일 게 없겠죠. 말하는 족족 세계를 거울처럼 비추는데 뭘 더 보태겠습니까.

하지만 언어는 태생이 불합리하다고요! 허술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니까요. 그래서 용기가 납니다. ‘어떠한 글도 이 세계를 새롭게 말할 수 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겪은 일을 새롭게 드러내는 일이다. 이 세계는 말하는 사람의 입과 글 쓰는 사람의 손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겐 세상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은 불합리성으로 가득 찬 언어 때문에 길러진다.’ 그러니 우리의 글쓰기는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자유로울 뿐입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저항 또는 반항’을 주제로 아홉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정선님은 비평준화 고교에 다니며 실력 없는 선생을 바꿔달라고 학교에 요구했던 기억을 후회 섞인 목소리를 담아 보내주셨습니다. 담이님은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학교 규칙을 어기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새빨간 고무신을 신고 보란 듯이 등교한 사연을 쓰셨네요. 영희님의 글은 불경기로 사라진 공장 기계 자리에 짐이나 쓰레기가 쌓이자 매일 그걸 깨끗이 치우는 저항을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준호님은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이유 없이 나를 툭툭 건드리자 싸움보다는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는 쪽을 택했다는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풀에님은 퇴근 뒤 시고모부 장례식장에 늦게 도착해 자리에 앉았더니 주변에서 어서 일손을 도우라고 타박해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 나왔다는 얘기를 시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함께 들려주었습니다. 정윤님은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원치 않는 사람과 점심을 같이 먹곤 했는데, 요즘엔 더는 그러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변화를 자랑스러워하는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혜욱님은 눈과 귀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는데, 전철 승강장 벽 틈을 뚫고 핀 민들레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영미님은 집 근처 폐가의 빈터를 일궈 텃밭으로 가꾸면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이번호엔 학교도서관 사서이신 선옥님의 글을 싣습니다. 의욕적으로 이끌던 도서부가 자격 문제로 어려워지자 학교에 건의해 고쳤다는 글입니다.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만.

 

제목 :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을까?

“동아리가 없으니 편하겠어요.” 동료 교사가 말했다. “그렇죠”라고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도란도란 즐겁게 지내고 싶어요”라고 소심하게 덧붙였다.

학교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도서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건의를 드려 도서부를 조직했다. 교사가 아니라서 인기는 없었지만, 책에 관심이 있거나 심심한 아이들이 도서부에 들어왔다. 책을 정리하고 도서관을 가꾸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지만 아이들은 책을 읽고 싶어 했다. 그냥 읽으면 재미없으니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도서부 활동은 도서 정리와 독서토론이 됐다.

학교생활에 힘든 아이들에게 책을 미리 읽어오라고 강요할 수 없어 동아리 시간에 읽고 토론할 수 있는 그림책이나 단편소설을 읽었다. 도서 선정은 아이들과 상의했고 사서인 내가 계기에 맞게 지정하기도 했다. 독서토론은 미리 논제를 뽑아서 준비했는데 차츰 아이들도 토론 진행을 맡았다. 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에 동아리 활동 내용을 입력해줬다.

그런데 작년부터 교사만 동아리 활동을 입력할 수 있게 바뀌었다. 도서부를 사서가 운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서에게 지나친 업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상관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동아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스템에 저항했다. 도서부를 공동으로 지도하기로 했다. 실제 활동은 사서가 하고, 시스템 입력은 교사가 했다. 도서부 아이들은 봉사활동으로 도서를 정리하고, 동아리 시간에는 기존대로 책을 읽고 토론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아이들은 장편소설을 읽어 오기로 약속했지만, 잘 지키지 않았다. 더구나 도서 정리는 봉사활동이라 필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서부는 독서토론부로 바뀌었다. 사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닌 게 된 것이다. ‘굳이 도서부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없겠구나.’ 올해엔 ‘도서부’ 관련 활동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지난해 나의 저항은 틀렸을까? ‘사서가 학교에서 일하면 사서 교사다’라고 생각했는데.

-선옥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글이라기보다는 메모라고 생각하고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 또는 이전부터 알긴 했는데 오늘 보니 새롭게 보이는 사실이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과 주변을 관찰해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새로움과 낯섦에 신기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저는 신발을 신을 때 늘 왼발부터 신더군요. 가방을 멜 땐 오른팔부터 내밀고요. 컬러로 꿈을 꿔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도 오늘 알았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간단하게 메모해서 보내주세요. 많을수록 좋습니다. 매일 다섯 개씩!(너무 많으려나, 너무 적으려나.) 감각이 깨어나고 생을 음미하는 습관이 길러질 겁니다.

주제: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분량: 목록이니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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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곳: han21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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