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24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음악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잔심(殘心). 무도에서는 동작을 마친 후에 ‘잔심을 표현하라’고 합니다. 상대를 던지자마자 곧바로 자세를 바꿔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몸을 돌리는 게 아니라, 던져진 상대에게 계속 눈길을 주고 마지막 동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겨진 마음’을 표현하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이미 상대를 던졌기 때문에 상대는 내 손을 떠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남겨진 마음’ ‘잉여의 마음’ ‘머무는 마음’을 표현하라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던졌군요. 던져질 만하던가요? 던졌다고 당신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에요. 다음번엔 좀더 아름답게 던져드릴게요.’ 미련을 가지라기보다는 던져진 사람과 이어진 선(線, 인연)을 단칼에 끊지 말라는 뜻이겠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은 떠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어져 있어요.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글쓰기도 비슷합니다. 글쓰기란 쓰고 나서 쓰지 않은 게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쓰지 않은 걸’ 다시 찾아 쓰고 나서도 여전히 미처 다 쓰지 못한 게 남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다 썼다, 다했다’는 말이 도무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글은 편지를 부치고 나서 다시 쓰는 편지 같더군요. ‘쓰지 않은 글’을 기다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얄궂습니다. 사건의 핵심, 사물의 주요 기능, 행동의 목적, 말의 요지처럼 뭔가 중차대한 것이 마음 가운데 자리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사소한 것, 주변적인 것, 스쳐 지나가는 것, 덜 중요한 것에 마음이 더 쓰이고 기억에도 오래 남습니다.
제 딸은 탄핵 찬성 집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집에 오면 광장에서 받은 ‘스티커’ 자랑만 합니다. 같이 나간 날에도 옆에서 걷던 분이 ‘다시 만날 세계’라는 제목의 스티커를 주었습니다. 그게 인기 있어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데, 망설임 없이 딸에게 “이거 드릴까요?” 하며 주더군요. 제가 넘겨받아 가방 속 책 사이에 끼워두었습니다. 며칠 지나 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책을 이것저것 잡스럽게 읽다보니 어디에 넣어두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아빠, 스티커 찾았어?”라는 추궁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책이 아니라, 서류 파일에 얌전히 넣어두었더군요. 집회보다는 기발한 깃발들 구경하러 광장에 나간다고 하듯이, 저희 딸은 탄핵보다 스티커더군요!
운동화를 사도 깔창 하나를 따로 넣어주면 거기에 마음이 더 갑니다. 과자보다는 덤으로 끼워넣은 아이돌 사진에 마음이 더 갑니다. 책을 사도 책보다는 책방 주인이 끼워준 책갈피에 마음이 더 갑니다. 양꼬치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주인이 숙주볶음 한 접시를 슬쩍 내밀면 마음이 더 갑니다. 우리에겐 한발 비켜선 것들에 대한 감각, 별것 아닌 것에 대한 사랑이 있나 봅니다.
글쓰기는 좋은 일이지만 세상살이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취미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전업 작가는 글쓰기 쪽으로 몸을 더 기울이고 있지만,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은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에 발을 더 담그고 있습니다. 전업 작가들은 글감을 찾아 매 순간 촉수를 뻗치고 온 힘을 다해 글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에게 있는 이미지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글쓰기가 취미인 사람은 즐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름을 알릴 필요도 없고 자신의 에고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쓰는 순간엔 작가이고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닐 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취미로 하는 글쓰기에서 ‘한발 비켜선 것들’을 찾거나 ‘별것 아닌 것’에 대한 사랑을 즐기는 두 가지 놀이가 있습니다. 일명 ‘생각 얇게 저미기’와 ‘생각 풀어헤치기’. 먼저 ‘생각 얇게 저미기’. 이것은 사건과 사건의 사이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놀이입니다.
1단계. 오늘 눈뜨고 지금까지 한 일을 적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일어난다. 이불을 갠다. 세수한다. 옷을 갈아입는다. 가방을 챙긴다. 밥을 먹는다. 집을 나선다. 2번 마을버스를 탄다. 수유보건지소에서 144번 버스로 갈아탄다. 고려대 앞에서 내려 273번 버스로 다시 갈아탄다. 학교 앞에서 내린다. 연구실까지 걸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받아 와 끓인다. 물이 다 끓으면 녹차티백을 넣는다. 뜨거운 차를 홀짝거린다. 책을 읽는 척한다. 수업 준비를 하는 척한다. 에코백에 짐을 챙겨 강의실로 향한다.’(제 일상은 이리도 무미하고 소소하군요.) 이렇게 기억나는 대로 적습니다.
2단계. 그런 다음, 위에 적은 일 중에서 아무 데나 이어지는 두 사건을 고릅니다. ‘밥을 먹는다’와 ‘집을 나선다’ 사이를 골랐다면, 두 사건 사이에 적지 않은 일을 찾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밥을 먹는다. 다 먹은 그릇과 수저를 개수대에 갖다놓는다. 관절 약을 먹는다. 가족에게 인사한다. 문을 나서면서 현관문 손잡이 버튼을 눌러 잠근다. 오래되어 뻑뻑해진 연립주택 유리문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 열고 다시 닫는다. 마당에 나온다. 마당에서 자라는 보리수나무, 산수유나무, 대추나무와 텃밭에 심어둔 허브와 푸성귀를 둘러본다. 지난해 담벼락 옆에 심은 포도나무 두 그루를 본다.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간다.’
3단계. 그러고 나서, 다시 이 중에 이어지는 두 사건을 다시 고릅니다. 예를 들어, ‘포도나무 두 그루를 본다’와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간다’ 사이. 저는 버스 타러 가기 전에 포도나무 앞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요. 이랬습니다. 제 선생님은 은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기도 가평으로 낙향해 포도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저도 포도를 키워보고 싶다’고 하니 포도밭 한쪽에 묘목을 심어두셨더군요. 지난해 그중 두 그루를 담아주셨습니다. 봄이 됐지만 하나는 아직 어려 그대로였고, 하나는 새순이 몇 알갱이 돋았습니다. 연분홍빛 새순에 손을 내밀어 솜털의 감촉을 느껴봅니다. 며칠 전 내린 비에도 바싹 마른 채 껍질이 길게 벗겨져 있었는데, 오늘 보니 그 메마른 가지를 뚫고 어린 새순이 돋아나는 게 기특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래봤자 흙을 북돋워주고 거름을 둘레에 부어주고 가끔 물을 주는 정도입니다. 깡마른 가지 사이로 틈을 벌려 비집고 솟아나는 힘은 오직 포도의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생각해내는 게 ‘즐겁습니다’. 나의 순간순간이 뭔가로 채워져 있구나 하는 충만감이랄까요. 굵직굵직한 일로 일상이 듬성듬성 엮여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이사이를 채운 소소한 것들이 내 삶을 온통 감싸고 있더군요.
다음은 ‘생각 풀어헤치기’. ‘생각 얇게 저미기’가 놓쳐버린 기억을 더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면, ‘생각 풀어헤치기’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매 순간이 예측 불허라는 걸 즐기는 일입니다. 내 글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것이 걱정거리가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거죠. 이 놀이는 너덧 명이 한 모둠이 되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불쑥 떠오른 문장 하나를 적습니다. 왜 그 문장을 썼는지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다음 사람이 어떤 문장을 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가게’ 하면 됩니다. 예컨대, 어느 강의에서 ‘엄마가 돌아왔다’라는 문장을 주고 돌아가면서 한 문장씩 써서 이야기를 완성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으스스한 글을 쓰더군요.
엄마가 돌아왔다. “왜 돌아왔어?”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내내 울기만 했다. 나갈 때는 웃으면서 나갔는데, 돌아와서 울기만 하니 나로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는 엄마를 보며 답답하기도 했지만 더 몰아세우면 또 나가버릴까봐 묻지 못했다.
사건은 작년 겨울에 시작되었다. 여동생의 일기에는 이런 말이 자주 쓰였다. ‘오늘 아빠 생신인데 너무 그리워서 마음이 아프다.’ 아빠가 실종된 지 벌써 1년6개월이 지났다. 엄마와 동생은 수없이 아빠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우리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엄마가 집을 나가던 날 아침은 조금 달랐다. 엄마는 무슨 꿈을 꾸었다고 하더니 웃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길로 집을 나간 엄마는 다음날에 돌아왔다. 엄마는 꿈에서 아빠를 만났다고 했다. 꿈에서 아빠는 본인이 사라지면 뒷산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 아침 엄마는 뒷산에 갔다가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온 것이다.
“엄마도 봤구나! 내가 묻은 시체.”
엄마가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엄마는 살았을 것이다. —K대 학생들, ‘악마의 일기’
이 놀이를 하다보면, 글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됩니다. 무한대에 가까운 선택지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을 들여놓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저는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마치 발의 개수를 늘리는 것 같은 일입니다. 설령 발아래에 갑자기 땅이 꺼지더라도 다른 발이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는 삶의 축(軸)을 글쓰기 외에도 몇 개 더 만들어두어야 합니다. 제 직업은 선생이니 제가 수련하고 있는 합기도는 취미입니다. 하지만 취미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흰 천에 쪽물이 들듯이 제 삶에 무도는 깊게 물들어 있습니다. 무도가 제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조화와 공존 추구, 환대하기, 용서, 완력 쓰지 않기, 순간에 충실하기, 생각 많이 하지 않기, 생각 많이 하기, 물러서기, 물러서지 않기, 굳어 있지 않기, 정체성을 계속 변경해나가기….
아마추어의 글쓰기는 당사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에 일상과 글이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일상이 글쓰기에 스며들고 마침내 글쓰기가 곧 일상이 됩니다.

글을 보내주신 성희님은 “어쩜 이렇게 고사리손이야!”라고 말한 사회 선생님의 말을 기억한다. 고사리손이 뭔지 몰랐지만, 거짓 없이 다정한 목소리와 포근한 손길이었다. 클립아트코리아
‘나를 사로잡은 한마디’란 주제로 다섯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 말이면 아무리 흔해 보여도 힘이 됩니다.
선옥님은 중단했던 학교 독서 동아리를 다시 시작하면서 “당신에게 그 일이 중요하다면, 계속해주세요”라는 말을 곱씹게 됐고, 정선님은 ‘습관이 의지를 이긴다’는 말을 되새기며 어릴 때부터 허리를 펴서 앉고 음양탕을 직접 만들어 먹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침실에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혜욱님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들었던 말 “힘 빼세요, 힘!”이란 말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수오님은 후배 아이의 시험장에 같이 따라가줬는데 후배한테서 “언니가 같이 가준 덕분에 우리 아이가 합격했어요”라는 말을 듣고 본인 아이에게 그러지 못했던 게 생각나 후회됐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성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어른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중학교 선생님의 다정한 말 한마디로 마음도 바뀌고 자존감도 높아졌다는 내용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쉽게 싫어지는데,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건 어렵다. 어린 시절 나는 어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내가 그린 그림과 읽었던 책 얘기를 들어줬으면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늘 둥근 벽시계를 쳐다보던 유치원 선생님은 종일반에서 가장 늦게 집에 가는 내게 안 좋은 느낌의 말을 했다.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눈물을 참게 하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사람을 개 패듯이 팬다’는 게 뭔지 보았다. 옆 반에 장난꾸러기 남자아이가 있었다. 옆 반에서 쿵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 우리 반 모두 복도로 나가 보았다. 옆 반 선생님이 그 아이를 복도로 밀치고는 빗자루로 마구 때리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아이가 울부짖었다. 어른에 대한 싫증이 강렬한 혐오로 변한 순간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중학생이 되었다. 나이가 많고 잔소리가 심해서 아이들이 싫어하는 사회 선생님이 계셨다. 하지만 나는 그 선생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재밌었다. 학년이 끝날 즈음, 교탁에서 선생님께 숙제 검사를 맡고 있었다. 선생님이 내 손을 잡으며 “어쩜 이렇게 고사리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고사리손이 뭔지 몰랐지만, 나를 귀여워하신다는 걸 느꼈다. 거짓 없이 다정한 목소리와 포근한 손길이었다.
모든 어른을 싫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된 후, 마음 맞는 선생님들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살다보면 누군가 때문에 괴로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나는 고사리손을 쫙 펼쳐, 사회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바라본다. “어쩜 이렇게 고사리손이야!” —성희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말 나온 김에 이야기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진실이 담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돌아왔다’라는 문장을 첫 문장 삼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주세요. 이 문장에는 엄마가 집을 나갔었다는 말이 숨겨져 있지만, 나간 이유나 다시 돌아온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궁금해집니다. 집을 나가서 어떤 일을 겪었고, 돌아와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생각을 풀어헤쳐보시기 바랍니다.
주제: ‘엄마가 돌아왔다’를 첫 문장 삼아 이야기 만들기
분량: 1천 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5년 5월4일
보낼 곳: han21 @hani.co.kr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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