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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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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한 뼘씩 지워가는 연습, 반복

쓴다는 건 관찰하고 의심하고 끙끙 앓다 최선의 답을 건네는 일
등록 2024-12-20 21:59 수정 2024-12-25 17:02
2024년 12월4일 새벽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글쓰기는 뭔가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냥 글쓰기 자체가 목적이고, 그 목적조차 지워버리는 일이다. 어찌 이 목표 없는 반복, 소소한 일상을 하루아침에 바스러뜨린 쿠데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연합뉴스

2024년 12월4일 새벽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글쓰기는 뭔가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냥 글쓰기 자체가 목적이고, 그 목적조차 지워버리는 일이다. 어찌 이 목표 없는 반복, 소소한 일상을 하루아침에 바스러뜨린 쿠데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연합뉴스


2024년 12월3일, 밤 11시40분.

얼굴은 본 적 없고 질문이 있다며 통화 한 번 했던 학생한테서 카톡 메시지 하나가 왔습니다.

‘교수님, 부디 몸조심하세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그 학생은 왜 얼굴도 모르는 제가 떠올랐을까요?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제 안위가 걱정됐을까요? 고맙다고 답하면서도 ‘몸을 조심해야 할 정도로 내가 뭘 한 거지?’ 되묻게 되더군요. 슬프고도 분했습니다. 학생이 선생을 걱정해주는 ‘사태’가 발생하다니.

비극적 망상 하는 겁쟁이일지라도

고백건대, 저는 겁쟁이입니다. 겁쟁이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떨어질까봐 정글짐에 올라가지도 못했고, 물놀이를 가도 물이 어깨까지 차오르면 바로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짜릿함을 즐기라고 고층빌딩이나 전망대에 만들어놓은 투명 유리바닥 위로는 올라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조금만 흔들려도 눈을 감고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번지점프는 언감생심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내란수괴 전두환 집권 때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벌벌 떨고 있는데, ‘피라미라 내보내준다’는 형사의 퉁명스러운 말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피라미’인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전투경찰을 향해 짱돌 하나 닿지 않게 던지고 돌아서 뜀박질할 때 등 뒤로 느껴지는 찌릿한 두려움이란….

비겁한 사람의 마음속은 늘 옹졸하고 비루한 상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비극적 망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쯤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겁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친일 앞잡이였을까, 독립군이었을까? 전쟁이 일어난다면 뭘 했을까? 군인을 자원했을까, 남쪽으로 튀었을까? 건물에 불이 난다면? 노약자들을 먼저 구할까, 바람처럼 도망쳤을까? 이번처럼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내가 군인이었다면, 나는 항명했을까, 명령에 복종했을까? 저는 언제나 후자더군요. 맞서지 못하고 비켜서고 도망치고 굴복하는 자. 삶의 모든 국면에서 세계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쩌다가 ‘몸조심하시라’는 걱정을 듣게 됐을까요? 평소에 타인이 걱정할 만한 뭔가를 했나봅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렇게 된 건 마음의 반복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비겁하다’는 자각을 수시로 반복하다보면, 비겁함의 근원을 따져 묻게 됩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죽음’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제 고향 탄광촌에서는 죽음이 일상이라,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를 묻게 되더군요. 지옥 불에 던져지거나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거나 귀신이 되어 날아다니다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나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완벽하게 사라져버리더군요. 존재의 깨끗한 소멸에까지 생각이 이르니, 어린 저는 견디지 못하고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바느질하고 계신 어머니한테 소리쳤습니다. “엄마, 나 안 죽으면 안 돼요?”(어머니 왈, “싱거운 놈!”)

제 비겁함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비겁함을 말하는 이유는 이런 비겁함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사무치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자신의 비겁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조금 허덕거리며 살긴 하지만, 약간의 허세와 자신감으로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습니다.

반복한다는 건 행동한다는 것

그래서 제 생애 두 번째로 맞이한 이번 쿠데타가 싫습니다. 지긋지긋합니다. ‘다시 내 비겁함이 들통나겠구나.’ 그런데도 비상계엄이 발표되던 날 밤 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습니다. (겁나지만)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딸이 경찰 대열 한가운데로 빨려들어가 있을 때도 저는 손을 뻗어 그 아이를 빼내올 생각만 했습니다.(저는 나서는 걸 싫어합니다) 퇴각하던 군용 트럭이 갑자기 유턴해 국회의사당 뒤편 도로로 진입하는 것을 딸아이가 맨몸으로 막아설 때도 ‘이제 돌아간다고 하잖아. 물러서’라고 할 뿐, 제 마음속에는 겁쟁이 아저씨가 머리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습니다.

‘겁이 많다’는 생각을 평생 거듭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겁 많은 자는 한 뼘 정도 발을 내디뎌도 별로 티가 안 나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용기 있는 사람의 큰 걸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조금만 힘을 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몸담은 학교의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나서, 한 걸음만 더 내디뎌보자는 마음으로 가두행진을 준비했습니다. 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고, 담당 형사에게 “다섯 명이 모이더라도 가두행진을 할 거고, 인도가 아닌 차도로 가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겁이 났지만, 겁나지 않은 듯이 말했죠. 어떤 힘이 그랬을까요. 바로 반복 때문입니다.

반복한다는 건 행동한다는 겁니다.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생각만 하면 저처럼 겁쟁이가 됩니다) 모든 독특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역설적이죠. 반복하는 행동은 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제 심장이 알려주더군요. 제 심장은 부정맥이라 가슴에 손을 얹고 느껴보면 맥박이 매번 다르게 뜁니다. ‘두근, 두우근, 두두근’.(어디 성한 곳이 없군요) 심장은 방금 전의 동작을 다시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건 정상이고, 어떤 건 이상하거나 특이한 게 아닙니다. 저의 모든 심장박동은 다 독특합니다. 모든 존재가 다 독특하듯이.

서울 신촌의 합기도(아이키도) 도장에서 2012년 9월12일 회원들이 동작을 반복해 연습하는 모습. 틀에 박힌 생각은 사람을 경직되게 하지만, 틀에 박힌 행동을 유지하는 건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게 한다. 섬세한 감각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길러진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 신촌의 합기도(아이키도) 도장에서 2012년 9월12일 회원들이 동작을 반복해 연습하는 모습. 틀에 박힌 생각은 사람을 경직되게 하지만, 틀에 박힌 행동을 유지하는 건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게 한다. 섬세한 감각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길러진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틀에 박힌 행동이 필요한 이유

저의 일상은 틀에 박혀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세 번 합기도(아이키도) 수련을 합니다. 도장에는 25개의 빈칸에 수련한 날짜를 적는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각자 알아서 적습니다. 칸이 다 차면 지우개로 쓱쓱 지우고 그 앞의 숫자에 합산해놓습니다. 그렇게 7년이 됐네요.(아직도 초보입니다) 보통 두 사람이 같은 동작을 여덟 번 또는 열두 번을 주고받습니다. 같은 동작으로 한다지만, 매번 다릅니다. 상대가 내미는 손의 힘과 기세가 다르고, 그걸 받는 제 위치와 자세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데 하나도 지겹지 않습니다. 같은 동작을 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즐겁고 만족스럽습니다.

틀에 박힌 생각은 사람을 경직되게 하지만, ‘틀에 박힌 행동을 유지하는 것’은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게 합니다. 섬세한 감각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길러집니다.(저는 여행을 잘 다니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아무런 차이를 못 느낄지 모릅니다. 매번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보고 또 보다보면 나와 대상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저와는 전혀 다른 것 같은 사람을 만나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들어도, 반복해서 보고, 또 듣다보면, 저 사람도 그렇구나, 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지요.

반복은 지겹지 않습니다. 지겨움은 강박적으로 새로움을 찾는 데서 비롯됩니다. 만족은 몸에 새겨진 반복 속에 존재하며, 익숙한 주제를 미묘하게 변조하면서 끝없는 풍부함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조지 레너드, ‘달인’)

수련할 때는 스승이 먼저 보여주는 동작을 따라 하기 바빠 도장 밖의 소란에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관찰하기’는 자기가 뭔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돼 있다는 자각과 함께 그것을 표현할 말이 필요한 행위입니다.(움베르토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언어가 없으면 관찰하기도 불가능합니다. 인간만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는 단지 쥐를 쳐다볼 뿐입니다. 고양이는 자신의 행위를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지 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찰’은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삶의 기술’(Art of life)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반복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관찰은 사물의 진면목을 알아차리는 것을 방해하는 나의 모든 거짓 신념을 포기할 수 있는 힘과 자세를 길러줍니다. 우리는 평소에 관찰을 자주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되묻지 않고 그저 그 일을 계속할 뿐입니다.

반복하려면 관찰해야 합니다. 제대로 관찰하려면 반복해야 합니다. 반복은 단순히 같은 행동을 지속하는 게 아닙니다. 차이를 발견하는 겁니다. 차이를 발견하지 않는 관찰은 그저 ‘멍때리기’일 뿐입니다.

어떤 분야에 달인(베테랑)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다보면 알게 돼요.” 고기 잡는 데 베테랑인 어부는 무선 어군 탐지기(프로타)를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을 믿습니다. “여기에 어망을 내리면 잡히겠다” 하는 감. 하다보면 알게 되는 감이죠. 꾸준한 반복과 묵묵히 제 일을 하며 기다리다보면 감이 길러집니다.(희정, ‘베테랑의 몸’)

글쓰기는 결국 목표 없는 반복

글쓰기가 딱 그렇습니다. 관찰해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쓴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끝없이 관찰하고,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이 해석이 최선인지 의심하고, 끙끙 앓다가 그 순간 최선의 답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골치가 아프고 지겹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아침 반복해 밥상을 차려도 사랑하는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애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처럼요.

목표를 성취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회에서 목표 없는 글쓰기에 헌신하는 일은 쓸모없어 보일 겁니다. 그러라지요, 뭐. 우리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확인하는 미묘한 차이와 변주, 그리고 우리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뭔가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글쓰기 자체가 목적이고, 그 목적조차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글쓰기란 언제나 겁나는 일이지만, 쓰기를 반복하다보면 약간 덜 겁이 납니다.

그러니 어찌 이 무한 반복의 글쓰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 목표 없는 반복, 이 소소한 일상을 하루아침에 바스러뜨린 쿠데타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이번 글은 마음이 출렁거린 채 썼습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독자 글]

‘다시 태어난다면’이란 주제로 네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편수가 적기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계속 쓰는 사람이 있으면 됐죠. 선옥님은 친구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던 중학생 시절이 마음에 남았나봐요. ‘괴물’이라 불리며 외롭게 지냈는데, 다시 태어난다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필경사 바틀비’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으시다는군요. ‘엉뚱한’ 영희님은 78살이 되어 처음 한글을 배운 노인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삶의 우여곡절을 다 거친 다음에,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쓴 글이 따라오게 하겠다는 거죠. 재미있군요. 정선님은 한 우물을 파는 전문가로 살고 싶다고 합니다. 고통과 인내로 사는 달인의 삶은 충만하고 아름다울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러셨을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 같은데요!

이번호에는 혜욱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친구한테 쓴 편지문으로 감염병이 창궐한 곳으로 날아가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고 하십니다. 타고난 예지력으로 삶의 허무함을 깨달은 분만이 가고 싶은 헌신의 길입니다.

유리야.

여기는 사계절이 너무나 덥다. 생일선물로 갖고 싶은 거? 산더미만 한 초코아이스크림! 왜 이 고생을 하느냐고? 글쎄, 난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내가 치료해서 죽을 고비를 막 넘기고 살아난 사람들이 눈을 뜨자마자 나를 보고 웃어줘. 난 그 미소가 참 좋다. 어린아이들의 미소는 맑고 투명한 나로 서게 해주거든.

로또를 사서 거액에 당첨될 수도 있었지. 좋은 집에, 명품 가방에, 명품 옷에, 맛있고 비싼 거 먹고, 세계여행 다니고…. 그다음은? 그래서 남는 건 뭐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는 것도 다 돈 때문이잖아. 다들 아니라고 하지. 자아실현을 위해서 공부하는 거라고. 우리 사회는 명예와 돈으로 그 사람의 성공을 판단하며 잘 사는 척도로 사용하잖아. 정말로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은 얼마 안 돼.

제법 열심히 살아왔다던 혜욱이라는 인간의 삶이 참 허망하구나. 이렇게 한평생이라니. ‘허무하다, 허무하다’를 나이만큼 80번쯤 했을까. 눈을 뜨니 다시 고등학교를 입학하던 그 시점으로 가 있었어. 내과의사가 되자. 감염병이 들끓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어. 그길로 귀 막고, 눈 감고, 이기적이라고 욕먹으며 공부만 했어.

성수대교 무너지기 전에 버스 타지 말라고 전화했던 것도, 삼풍백화점 무너질 때 그 앞에서 미친 듯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것도, 넌 어떻게 알았느냐고 울면서 날 흔들어댔지? 그냥 ‘귀신이 시켰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어. 그 후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 나를 피해 다녔지만, 그래도 넌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옆에 있어줬어.

사고가 날 때마다 알면서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허망했어. 어차피 인생이 허무한 것이라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 길이라 믿었어. 다음번엔 조금 서늘한 나라로 가볼까 해.(정혜욱 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조금 고난도의 글쓰기를 해보겠습니다. 같은 대상이나 이야기를 정해서 다섯 번을 쓰는 것입니다. 글쓰기 실력이 수직 상승할 겁니다. 관점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당신이 달라질 겁니다. 뭐든 좋습니다. 숟가락도 좋고, 멧비둘기도 좋고, 사람도 좋습니다. 사건도 좋고 간단한 행동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이야기면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손톱만큼 작고 사소한 글감일수록 좋습니다. 같은 걸 다르게 쓰기! 다섯 편의 글을 모두 보내주세요(두 편 썼다면 두 편이라도!).

주제: 같은 이야기를 다섯 번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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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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