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목적은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읽기의 즐거움’은 여느 즐거움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여행이나 놀이를 하거나 맛난 음식을 먹거나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즐겁습니다. 유쾌하고 신나고 보람도 있죠.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책 읽기는 ‘마음이 가라앉는 즐거움’ ‘겸손한 즐거움’ ‘무거운 즐거움’ 같은 겁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대학도서관 서가에는 216만 권의 장서가 꽂혀 있습니다. 촘촘히 서 있는 서가를 지날 때면 그 무수한 책 앞에서 ‘죽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는, 아니 ‘책 제목도 다 볼 수 없다’는 자기 한계를 확인합니다. 책은 계속 출판되니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 같고, 나는 죽음이라는 낭떠러지에 다가가는 종이배 같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겸손해지죠. 책의 우주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 그래서 내가 뭔가를 ‘안다’고 하는 것도 이 거대한 지적 성취 앞에서 극히 일부분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읽은 책’은 무수한 ‘읽지 않은 책’과 함께 생각할 때, 다시 말해 ‘독서’는 ‘비(非)-독서’와 등을 맞대고 있다는 감각을 가질 때, 책 읽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이란 재미난 책이 있습니다. 독서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니 ‘어떤 책’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를 따지기보다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책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총체적 인식을 가지라고 권합니다. 그러니 읽지 않았지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기 얘기를 하라고 합니다.
이 책의 가장 기발한 아이디어는 본문에서 다룬 책에 대한 분류(약호표)입니다.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UB: Unknown Book)
대충 뒤적거려본 책(SB: Skimme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HB: Heard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FB: Forgotten Book)
책을 이렇게 분류하다니 재미있군요. 여기에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거나 ‘읽었고 내용도 기억하는 책’ 같은 게 없습니다. 저자의 이런 분류 방식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책을 읽지 않고도 책에 대해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겐 내 이야기와 생각과 맥락이 있으니까요.(제게 저 책은 ‘대충 뒤적거려본 책’(SB)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현기형의 소설 ‘순이 삼촌’을 읽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제주 4·3 항쟁을 다룬 소설이라는 것도, ‘순이 삼촌’이 실은 여성이라는 것도, 삶의 터전인 옴팡밭에서 벌어진 학살의 비극도 모른다고 해보죠. 누가 “너 ‘순이 삼촌’ 읽어봤어?”라고 물으면, “안 읽었어”라고 하되 기죽지 말고 그다음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국가폭력에 대해, 인간성에 대해, 삶에 대해, 기억에 대해, 다른 책에 대해.
물론 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할 얘기가 없을 겁니다. 읽지 않고도 책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책의 본질,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의 관계 속에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책 읽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솔직담백한 걸 좋아하고 규율과 과장된 격식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허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세야말로 인간다운 면모라고 생각하기조차 합니다. 저는 집 밖으로 나설 때면, 하다못해 편의점에 도착한 책을 찾으러 갈 때도 머리를 감고 세수하고 나갑니다. 허세죠. 남들이 나를 허투루 보지 않게 하겠다는 허세.
책 읽기도 비슷합니다. 허세의 성격이 강합니다.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사서 겨드랑이에 끼고 올 때의 뿌듯함, 도서관에서 책을 한 아름 빌려 가방에 들고 올 때의 ‘있어 보임’, 책장에 무수히 꽂혀 있는 읽지 않은 책을 보며 ‘언젠가 읽고야 말리라’ 하며 다짐할 때의 굳건함 같은.
얼마 전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열 권이나 빌렸습니다. 대출 기간이 2주밖에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제목이나 목차를 훑어보거나, 본문 중에서 눈길 가는 쪽을 펴서 잠깐 살펴보다가 계속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빌립니다. 책 열 권은 그렇게 집에까지 와서 책상 한 귀퉁이에서 작은 탑을 이루고 있다가 반납일에 고스란히 도서관으로 돌아갑니다. 그래도 나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빌린 책 중에는 ‘알고리즘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란 책이 있습니다.(이런, ‘어떻게 수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란 책도 빌렸네요.) 프롤로그에 이런 얘기가 나오더군요. 도서관장은 처음 출근한 사서에게 새로 배달된 1천 권의 책을 저자명 순으로 책장에 꽂아놓으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알고리즘이 적용된다고 하더군요. 손에 잡히는 대로 알파벳 순으로 서가에 집어넣는 삽입 정렬이란 알고리즘으로 하면 17일 소요되는데, 퀵 정렬 방식을 쓰면 3시간도 안 걸린답니다. 도서관장이 예뻐했겠네요. 우리의 거의 모든 일상에 들어와 있는 알고리즘을 코드가 아니라 사례와 이야기로 풀어 쓴 책이니 나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겠다 싶어 빌렸습니다. 읽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과 마주앉아 인간의 역사는 알고리즘을 발전시켜온 역사라는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 인공지능 전문가를 만나도 주눅 들지 않을 겁니다.
책은 영상이나 이미지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독서는 이미지나 영상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지적 능동성,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볼 수 있지만, 멍하니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일과 동시에 할 수도 없습니다.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합니다. 설거지하면서 드라마도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 쏙 빠져 있으면서 그릇에 묻은 때를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른 뭔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뉴스 아나운서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만큼 책 읽기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일(노동)이죠.
그런 면에서 책은 고약한 장치입니다. 보이는 걸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한 줄로 늘어선 언어로 굴절시킵니다. 우리가 읽은 것들은 애초에 입체로 시작되어 납작한 평면으로, 가느다란 글자들로, 거기서 다시 나약한 몇 개의 선들로, 결국 단 몇 개의 점들로 뿔뿔이 흩어져버릴 뿐이겠지만, 언젠가 무엇에 관해 쓰려고 할 때 띄엄띄엄 놓여 있던 그 점들이 우연히 하나의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읽기는 쓰기의 아주 작은, 혹은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실마리가 되고야 마는 겁니다.
글 읽기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읽기란 누군가(작가)가 어떤 이야기(주제)를 문장과 낱말과 글자들로 쪼개고 분쇄한 작업을, 다른 누군가(독자)가 다시 이어붙이고 새롭게 모양을 만들어 무언가(해석)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우리 앞에는 이 고약한 방식을 습관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어떤 책, 어떤 작가, 어떤 장르인지는 관계없습니다. 문장과 낱말과 글자로 해체된 조각을 다시 붙여 장면과 메시지로 탈바꿈시켜야만 하는 작업을 좋아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읽는 행위 자체를 즐거워하느냐는 것이죠.
‘1111 법칙’이란 게 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만들었습니다, 하하.) 우리는 살면서 1천 권의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구경합니다. 그중에 100권을 읽습니다. 그중에서 열 권이 마음에 남는 책입니다. 그중에서 한 권이 자신의 세계관, 철학,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인생 책’입니다. 그 한 권도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중요한 건 1천 권의 책이 내 앞을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자동으로 됩니다.
글쓰기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살면서 우리는 1천 편의 글을 끄적거립니다. 그중에서 100편의 글이 완성됩니다. 그중에서 열 편은 그럴듯한 글입니다. 그중에서 한 편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담은 ‘인생 글’이 됩니다. 그 한 편의 글도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그 글은 아직 쓰지 않은 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욕심부리지 말고 1천 편의 조각 글을 무심히 만들어내는 겁니다.
무술(합기도)을 수련하는 목적은 근육질 몸매를 만들거나 기민한 동작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양도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양도체는 구리처럼 전기를 ‘잘’ 흐르게 하는 물체입니다. ‘양도체적 몸’은 에너지를 한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흘려보냅니다. 우리 몸은 힘을 축적하는 건전지가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힘이 지나가는 길목입니다. 결국 수련을 통해 아집을 버리고 투명한 심신을 만들어가는 것이죠.(우치다 다쓰루,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1천 권의) 책이 내 몸을 ‘지나가게’ 해야 합니다. 어떤 책이든 내 속에 머무르게 하면 안 됩니다. 머물러서 나를 너무 좌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앞에 든 책 얘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떤 포도주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 한 통의 술을 모두 마실 필요는 없다. 반 시간 정도면 어떤 책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다. 사실 6분이면 충분하다.’
모든 책은 ‘자신’에게로 수렴됩니다. 책을 지나치게 세심하게 읽는 것은 읽는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책 읽기는 잠자고 있는 자기 고유의 시각을 발견하는 실마리 정도의 역할이면 족합니다. 책은 신줏단지가 아니라 ‘나’의 실마리입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책 추천하는 글’을 열 분이 보내주셨습니다. 책 제목과 소개 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SF소설인데도 인간의 감정을 잘 다루고 있다/수정구슬님), 제시카 브루더의 ‘노마드랜드’(집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대안적 삶을 취재한 책. 본인도 이 체제에 저항할 길을 찾고 있다/주영님), 임영태의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대필 작가를 다룬 소설. 밥이 먹기 싫으면 이 책을 꺼내 읽는다. 맛있는 문장들이 넘쳐난다/영희님), 박주영의 ‘어떤 양형 이유’(인간성을 중시하는 판사로서 소외된 사람들의 사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다/선옥님), 오카다 준의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상상은 수수께끼 같은 한 인물을 재구성한다. 어릴 적 필자도 ‘찢어진 눈’을 가진 사람을 다짜고짜 수상하게 여겼다/원영님), 박노해의 ‘눈물꽃 소년’(자전 수필, ‘어머니가 내게 좋은 자식이 되어주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이 되고 나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었다’라는 문장만으로도 충분/정선님),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비판받는 책이지만, 방황하는 나로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라는 충고가 도움이 된다/담이님), 이묵돌의 ‘여로: 요절할 결심’(지긋지긋한 일상을 떠나 요절할 마음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탔으나, 코로나로 인한 격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우여곡절을 겪는다/준준님),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고개가 끄덕여지는 구절이 넘친다/풀레님).
이번호에는 영미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시집이나 시를 소개하는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은데, 본인의 경험을 기둥 삼아 시가 던지는 메시지를 맛깔나게 버무린 글입니다. 책이 ‘지나가는’ 느낌을 주더군요.
감자 이삭줍기
노트북 검색창에 ‘시, 과일, 벌레’라고 쳐 넣는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과수원에 떨어진 과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벌레가 먹었다. 과일을 하나 더 집어 든다. 놓인 자국이 썩었다.
문자가 왔다. 감자 이삭줍기할래요? 문자로 찍어준 번지로 찾아가니, 천 평 밭에 감자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트랙터로 땅속 깊이 박혀 있던 감자를 파헤치면, 그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일꾼들이 굵고 흠 없는 것들을 추려서 플라스틱 상자에 담고, 수백 개의 상자가 트럭에 산처럼 쌓여 실려 가고 남겨진 감자들이 한낮의 햇볕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감자밭 주인은 술기운에 잠긴 목소리로 동네 사람들 모두 데려와서 밭에 남은 감자를 다 가져가라고 한다. 감자에 싹이 나기 시작하면 무를 못 심는다고. 이번 감자 농사는 굼벵이 때문에 망쳤다고.
감자 한 알을 들고 뒤집어보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내려놓는다. 다른 한 알은 작고 구멍 난 데도 없다. 바구니에 담는다. 목장갑 낀 손으로 감자를 요리조리 돌려보다가 옆에서 감자 줍는 할머니 바구니를 보니 찢어질 듯 불룩하다. 할머니는 굼벵이가 먹은 자리를 잘라내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모두 주워 담는다. 굼벵이가 먹다 만 것, 트랙터에 잘린 것, 울퉁불퉁하게 생긴 것 모두 다.
나는 여전히 감자 한 알을 들고 파인 상처를 들여다본다. 깜깜한 흙 속에서 굼벵이가 뚫고 들어오던 날 맑은 눈을 뜨고 있었다고, 트랙터가 가까이 다가와 살을 베어버리던 때 귀를 열고 듣고 있었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난 듯해 밭을 둘러봤다.
집으로 돌아와 베란다 그늘에 감자를 널어놓고 시인의 이름도 시의 제목도 기억해내지 못한 채, 노트북 키보드를 누른다. 시 시인 과일 벌레 사과 과수원 썩은 오래된 그 시간의 모든 단어를.
시인이 화면 맨 아래 떠오른다. ‘김종삼, 원정(園丁)’
어제 주문한 시집이 오늘 왔다. 까막눈처럼, 나는 한 장을 채 넘기지 못한다.(우영미 님)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에는 편지를 써보겠습니다. 이제는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은 엉뚱하거나 독특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편지만큼 마음을 깊고 또렷하게 담을 수 있는 매체도 없습니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주제: 편지
분량: 1천 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4년 9월29일
보낼 곳: han21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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