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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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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볼, 맥주보다 ‘시원’, 폭탄보다 ‘짜릿’한…어디서 왔니?

18세기 영국 소다수서 시작된 하이볼, 서구에서 시들하자 일본서 재탄생
최근 ‘혼술족’ 늘며 국내도 인기… 하이볼용 위스키 ‘폐점런' 현상까지
등록 2023-05-05 07:10 수정 2023-05-11 05:26
하이볼과 하이볼 제작에 쓰인 위스키와 생강수.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하이볼과 하이볼 제작에 쓰인 위스키와 생강수.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냉동실에서 막 꺼낸 유리잔 겉면에 하얀 성에가 금세 빽빽하게 맺혔다. 상온에 나온 잔이 차가운 온도를 지키기 위해 친 방어막 같다. 사각사각. 작은 칼로 얼음 겉면에 붙은 작은 얼음 알갱이들을 긁어내는 소리다. “물의 개입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걷어내는 거예요.” 전영호 매니저가 싱글몰트(단일 증류소에서 맥아로 제조) 위스키 ‘오켄토션’을 왼손 손가락 사이에 낀 ‘지거’(칵테일용 계량컵)에 채우며 말했다. 유리잔에 위스키를 털어 넣고 표면이 매끈해진 얼음도 채웠다. 바스푼 뒷면을 따라 탄산수를 천천히 흘려보내자 잔이 점점 차올랐다. 바스푼으로 얼음을 한 번 들었다가 내렸다. 바스푼을 휘젓지 않아도, 이 동작으로 내용물이 섞인다. 그 위로 레몬 껍질을 쥐어짜면, ‘오늘의 하이볼’ 완성이다.

2023년 5월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하이볼 전문점을 찾았다. ‘오늘의 하이볼'을 주문한 뒤 물었다. “어떻게 먹어야 맛있을까요?” 전 매니저가 말했다. “빠르게 드시는 게 좋아요. 얼음이 녹으면서 맛이 바뀌고, 탄산도 점차 날아가니까요.” 탄산 기포가 올라오는 잔을 들어 올리니 은은한 레몬 향이 먼저 들어온다. 이어 진저에일의 달콤한 향도 느껴졌다.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짜릿한 차가움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목구멍 깊숙이 탄산이 때리는 타격감에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함께 내쉰 숨에서 위스키 향이 났다. 최근 인기를 끄는 유튜브 채널 <오사카에사는사람들TV>(오사사) 마츠다 부장이 하이볼을 마시며 뱉은 한마디가 떠오른다. “카… 죽인다, 이거.”

위스키에 탄산음료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 이 간단한 조합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이볼 전문점은 고사하고 일부 이자카야 등에서만 맛볼 수 있던 하이볼이 웬만한 술집이나 식당에서도 보인다. 심지어 테이블 위에 소주와 맥주병만 보이던 고깃집에도 하이볼 잔이 올려져 있다. 2022년 문화방송(MBC) 예능프로 <나 혼자 산다>에서 개그우먼 박나래씨가 ‘얼그레이 하이볼’을 만드는 모습이 나왔을 때 앞으로 다가올 열풍을 직감했다. 술을 다루는 인기 유튜버 ‘오사사’의 마츠다 부장과 ‘먹을 텐데'의 성시경이 하이볼을 주제로 콘텐츠를 찍은 것도 수개월 전이다. 이미 늦은 궁금증일 수 있겠다. 하이볼, 어디서 왔니?

두 번, 한 번 짧고 긴 휘파람처럼

많은 사람이 ‘하이볼' 하면 일본을 떠올린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구글에 영어로 하이볼을 검색하면 “일본에서 시작된 것인가?”라는 연관검색어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하이볼은 영국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소다수가 발명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소다수가 개발된 이후 영국인들은 주로 브랜디(과실 증류주)를 소다수에 타 먹었다고 한다. 소다수에 술을 타 먹는 문화가 위스키까지 이어졌다. 하이볼이 한동안 ‘위스키소다'로 불렸던 이유다.

하이볼이 처음 문헌에 기록된 것은 1895년이다. 1895년 미국에서 발간된 크리스 롤러의 <더 믹시콜로지스트>(The Mixicologist)에 ‘high ball’(하이 볼)이라는 명칭과 함께 제조법이 등장한다. “에일(맥주의 한 종류) 글라스(잔)에 얼음 한 덩어리를 넣고 위에서 1인치를 남기고 소다를 넣은 다음, 브랜디나 위스키를 지거의 반잔 정도 넣는다.” 지금의 하이볼 제조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해리 존슨이 1900년 발간한 <바텐더 매뉴얼>(Bartender's Manual)에는 처음으로 띄어쓰기 없이 ‘Highball’(하이볼)이라고 쓰였다.

하이볼이란 명칭이 어떻게 처음 붙여졌는지를 놓고선 명확히 남은 기록이 없다. 외국에서도 합의된 유래가 없다. 영국에서 골프를 칠 때 주로 위스키와 소다수를 섞어 마셨는데, 경기 후반부로 갈수록 취기 때문에 공이 자꾸 위로 올라가서 ‘하이볼'이라고 지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열차 안의 바텐더들 사이에서 사용한 ‘슬랭'(은어)이 굳어졌다는 설과, 기다란 유리잔에 탄산수를 부었을 때 동그란 얼음이 올라오는 모양을 보고 하이볼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포시즌스호텔서울의 헤드 바텐더였던 로렌초 안티노리는 최근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기고한 글에서 하이볼이란 명칭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설을 소개했다. 열차의 물탱크 안에 있는 공을 이르는 용어인 ‘하이볼'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당시 열차를 운행하던 승무원들은 증기 동력을 만들기 충분한 만큼 물이 차올랐을 때 두 번의 짧은 휘파람과 한 번의 긴 휘파람을 불었는데, 하이볼도 이 공식에 맞춰 두 번의 짧게 따르는 술과 한 번의 길게 따른 탄산수가 어우러졌다고 말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하이볼가든’에서 김양진 <한겨레21> 기자가 하이볼을 시음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하이볼가든’에서 김양진 <한겨레21> 기자가 하이볼을 시음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본격 전성기는 2차 대전 뒤 일본에서

하이볼은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190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새로운 유형의 칵테일이 쏟아지며 인기 칵테일의 자리는 곧 다른 칵테일로 대체됐다.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은 건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으로 넘어와서였다. 그 중심엔 위스키 제조업체 ‘산토리사'의 전략적인 마케팅이 있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보도를 보면 “일본인들은 알코올 도수가 낮은 음료를 좋아했다. 1950년대 일본에선 맥주가 인기 있었고, 위스키 판매는 감소했다. 산토리의 전략은 ‘위스키 하이볼'이었다”고 설명한다. 위스키가 들어갔지만 저렴한데다, 부담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술에 많은 일본인이 공감했다.

이후 일본은 독자적인 하이볼을 발전시켰다. 1980년대엔 산토리사가 일정한 탄산을 유지하기 위해 생맥주 기계와 유사한 하이볼 기계를 도입하기도 했다. 서구권에서 시작했지만 금방 인기를 잃은 하이볼이 일본에서 재탄생한 셈이다. 하이볼은 아직도 일본에서 보편적으로 즐기는 술 중 하나다.

한국에선 언제부터 하이볼을 마셨을까. 인기야 최근 늘었지만,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하이볼을 즐겼다. 하이볼에 관한 기록은 1956년 2월7일치 <경향신문>에 처음 등장한다. “보고가 끝나면 ‘떨레스' 장관(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한 잔 때로는 두 잔의 ‘하이볼'을 마시고 묵상에 잠긴다.” 같은 해 <조선일보> 3월11일치에 실린 소설 <황혼의 여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명희는 자기의 무안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바텐에게 하이볼 한 잔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1960년대엔 하이볼이 물가의 척도로 언급될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1969년 12월25일치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일류다방에서는 2백원짜리 하이볼을 3백원씩 받아 손님들의 항의를 받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쓰여 있다. 1964년 7월6일치 <경향신문> 기사엔 “위스키를 그대로 마시는 것보다 하이볼로 해서 마시는 것은 건강에 매우 좋다”고 언급될 정도였다.

다만 1980~1990년대를 거치며 하이볼의 인기는 점차 식었다. 언론에서 언급되는 횟수도 확연히 줄었다. 199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하이볼은 “무라카미 하루키(일본 소설가)의 소설에서 처음 본 술”(<한겨레21> 신윤동욱 기자) 정도였다.

위스키 수입량 역대 최고치 기록 중

하이볼이 다시 떠오른 것은 2010년대 들어서였다. 2010년대 초반 수제맥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종류의 술이 관심을 받았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상황도 하이볼 인기를 촉진한 계기였다. 이른바 ‘혼술족'이 늘며 집에서 위스키와 탄산수를 조합해 하이볼을 타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 2014년부터 서울 신사동에서 하이볼 전문점 ‘하이볼가든'을 운영하는 김소봉 대표는 “불과 3~4년 전만 해도 하이볼은 엄청 마니아틱했다”며 “그러나 점점 대중화가 됐고 최근엔 20대부터 60대까지 누구나 쉽게 하이볼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이볼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하이볼을 취급하는 일반 술집이나 음식점도 늘고 있다. 서울 강서구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김태완(28)씨는 2023년 초부터 하이볼을 팔았다. 김씨는 “나이 지긋하신 분과 중장년층에서도 찾는 사람이 많아 메뉴에 넣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근엔 일본의 빔산토리에서 만든 하이볼 기계를 도입한 업체도 많아졌다. 포털 등에 하이볼을 검색하면 ‘하이볼 명가' 인증을 받았다는 곳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하이볼을 만들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산토리 위스키 업체인 빔산토리에서 인증했다는 의미다.

하이볼의 인기와 위상이 높아졌지만, 최근 물가 상승이 가세해 가격이 높다. 한국에서 저렴한 곳이 한 잔에 7천~8천원이고 1만원 넘는 곳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집에서 하이볼을 즐기는 이가 많다. 위스키와 탄산수만 있으면 간단히 제조할 수 있는 점도 직접 만들어 먹는 사람이 늘어난 배경이다. 실제 국내 대형마트 3사에서 받은 위스키 품목 매출액 증가율을 보면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마트의 경우 2021년 위스키 매출액 규모는 전년 대비 300% 넘게 증가했다. 2022년엔 거기서 60%가량 더 늘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집에서 술을 즐기는 ‘혼술족'이 하이볼을 취향에 맞춰 만들어 마시는 트렌드가 확산하면서 위스키 매출이 급격히 상승했다”고 말했다. 홈플러스도 위스키 품목의 전년 대비 매출액 증가율이 2021년 30%, 2022년 39%를 기록했다. 이마트의 위스키 매출액 증가율은 2021년 45.7%를 기록했고, 2022년엔 매출액 규모가 전년보다 20% 더 늘었다.

위스키 수입량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2023년 1분기 스카치·버번 등 위스키류 수입량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78.2% 늘어난 8443톤(t)을 기록했다. 2000년 이후 역대 1분기 기준 최고치다. 2022년 4분기엔 8625t을 기록했는데 분기 기준 가장 많았다. 연도별로 보면 2022년 위스키 수입량은 총 2만7038t을 기록해 최근 10년 중 가장 많은 수입량을 기록했다. 2021년 수입량이 1만5661t이던 것을 고려하면 1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섞는 것도 귀찮아' RTD 하이볼 출시

하이볼과 잘 어울리는 위스키로 입소문이 난 품목의 경우 품귀 현상까지 있다. 직장인 류경인(30)씨는 2023년 3월 일본 후쿠오카를 다녀오며 산토리 가쿠빈 위스키를 면세 한도만큼 구매했다. 류씨는 “하이볼용 위스키로 가쿠빈을 추천받아 국내 마트와 주류판매점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결국 구하지 못했다”며 “일본 여행을 간 김에 사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1만원대 중반이면 살 수 있는 산토리 가쿠빈 위스키(700㎖)는 국내에서 평균 4만원 정도에 판매하지만, 그마저도 없어서 못 사는 일이 많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2023년 1분기의 경우 오픈런을 넘어 폐점런(폐점 때부터 줄을 서는 것)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로 특정 위스키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분이 많았다”며 “발베니나 산토리 같은 품목은 줄 서서 사가는 분이 많다보니 매장에 진열된 것을 보고 구매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산토리 가쿠빈을 수입하는 빔산토리코리아 관계자는 “구체적인 출고량 통계는 제공하기 어렵다”면서도 “수요가 워낙 많아 공급이 (수요만큼) 미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의 한 쇼핑몰에 진열된 산토리 가쿠빈 하이볼. 독자 제공

일본 후쿠오카의 한 쇼핑몰에 진열된 산토리 가쿠빈 하이볼. 독자 제공

인기의 여파는 편의점으로도 번졌다. 씨유(CU)를 운영하는 비지에프(BGF)리테일은 2022년 조직을 개편하면서 주류 전담 부서를 신설했다. 한 직원이 고깃집에서까지 하이볼을 파는 것을 보고 RTD(Ready To Drink·즉석음료) 하이볼을 출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2022년 11월 씨유에서 가장 먼저 캔 형태의 하이볼 두 종(어프어프 레몬토닉, 얼그레이)을 출시했다.

씨유를 시작으로 지에스(GS)25와 이마트24, 세븐일레븐도 연달아 RTD 하이볼 제품을 출시했다. 지에스25의 경우 일본에서 수입한 하이볼을 비롯해 열 종류의 하이볼을 팔고 있다. 이마트24와 세븐일레븐에서 출시한 하이볼까지 더하면 시중에 판매되는 RTD 하이볼 종류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가격대는 제품마다 다르지만 500㎖ 기준 4500~5천원이다. 지에스25가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하이볼은 조금 더 비싸다. 350㎖ 캔이 4500원이다.

다만 국내에서 출시한 하이볼은 아직 대부분 ‘진짜' 하이볼이 아니다. 위스키 원액 대신 오크칩을 넣어 위스키 향만 나도록 흉내만 낸 제품이 많다.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하이볼과는 향과 맛 자체가 다르다. 편의점 업계 관계자는 “위스키 원액을 넣으면 단가가 확 비싸진다”며 “일본에선 위스키를 넣어 만들지만, 국내에선 고객의 가격 저항선이 있어서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위스키 원액을 넣은 제품이 나왔다. 세븐일레븐은 2023년 4월 스카치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몰트위스키 하이볼을 출시했다. 가격은 350㎖ 캔 기준 6천원이다.

일본의 한 편의점에 진열된 RTD 하이볼(왼쪽, 독자제공)과 씨유(CU) 편의점에 진열된 RTD 하이볼(BGF리테일 제공)

일본의 한 편의점에 진열된 RTD 하이볼(왼쪽, 독자제공)과 씨유(CU) 편의점에 진열된 RTD 하이볼(BGF리테일 제공)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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