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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은 당신보다 챗지피티가 100배 잘 쓴다

천편일률적인 기사를 밀어낼 수 있다면 인공지능은 기자들이 저널리즘에 집중하는 계기 될 수도
등록 2023-03-18 01:20 수정 2023-03-22 04:49
2023년 ‘디지털게릴라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교육부 직원들이 챗GPT를 체험해보고 있다. 연합뉴스

2023년 ‘디지털게릴라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교육부 직원들이 챗GPT를 체험해보고 있다. 연합뉴스

챗지피티(ChatGPT) 열풍이 좀처럼 식을 줄 모릅니다.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고, 논문 초록을 작성하며, 짧은 소설까지 써내는 이 대화형 인공지능이 불러올 파란에 대한 논의가 무성합니다. 언론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럴듯한 정보를 만들고 방대한 자료를 요약하는 인공지능은 좋든 싫든 저널리즘에 충격을 줄 겁니다. 기자라는 직업이 필요 없어진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노련한 질문, 고도의 심리전, 감춰놓은 자료…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언제나 환호와 공포라는 상반된 반응을 동시에 불러옵니다. ‘테크노필리아’(첨단기술에 대한 과도한 예찬)는 한동안 언론학계와 미디어 비평의 지배적 담론이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가상현실이, 블록체인이 저널리즘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장밋빛 기대를 담은 내러티브가 주어만 바뀌며 반복됐지요.

‘레거시 미디어’ 종사자들은 언젠가부터 ‘테크노포비아’(첨단기술에 대한 공포나 적대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 이후 신문과 방송이 몰락하고 언론사의 디지털 혁신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생겨난 기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새로운 기술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반응으로 이어진 것이겠지요.

어느 쪽이든 올바른 인식은 아닙니다. 기술을 과대평가해서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기술도 그 자체로 저널리즘을 구원하거나 망가뜨리진 않습니다. 기술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만, 그 변화의 방향과 수준은 인간이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기술을 수용하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챗지피티의 후예가 저널리즘을 바꾸어놓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우리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저널리즘을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은 저널리즘에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란한 기술 담론에 현혹되지 말고 좋은 저널리즘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저널리즘은 어떻습니까? 포털 뉴스의 절대다수는 출입처 보도자료를 받아쓰거나 다른 언론사 보도를 베껴 쓴 기사입니다. 이렇게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편일률적 뉴스를 찍어내는 데 머무른다면, 기자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미래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인공지능이 월등히 잘할 수 있고, 이미 잘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업무가 있습니다. 데이터를 학습해 결과물을 내놓는 인공지능은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은 잘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는 일은 할 수 없지요. 노련한 질문과 고도의 심리전으로 상대 입을 열게 하고, 누군가 감춰놓은 자료를 찾아내고, 자료 더미에서 서로 다른 정보를 연결해 의미를 발견하는 탐사보도는 인간 기자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

언론의 경쟁 상대는 인공지능·넷플릭스

누구나 다 쓰는 이야기를 함께 쓰고, 남이 내놓은 자료를 베껴 쓰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면 인공지능 시대에도 기자와 언론의 존재 가치는 큽니다. 하지만 대다수 인간 기자가 새로운 사실을 탐사하는 업무를 하지 않고 그런 노하우를 갖추지도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인공지능보다 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능력을 포기하는 거지요.

물론 ‘단독’ 중독증에 걸린 기자들은 늘 ‘새로운 사실’을 찾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제목 앞머리에 [단독]을 달았다고 모두 값어치가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단독, 어떤 사실이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언론사들이 찾아다니는 단독의 대부분은 독자가 아닌 경쟁사들 보라고 쓰는 기사입니다. 독자에게 정보로서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매체의 취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굳이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지요.

가령 공식 발표가 나면 다 알게 될 정보를 빼내어 먼저 내보내는 ‘시간차 단독’ 기사는 사회적 의미가 거의 없습니다. 고위직 인사 특종(‘장관에 ○○○ 내정’), 검찰 수사 속보(‘검찰, ○○ 압수수색’)가 대표적입니다. 언론이 이런 기사를 아무리 많이 쓴다 해도 시민의 살림살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이제 언론의 경쟁 상대는 다른 언론사가 아니라 넷플릭스나 유튜브, 인공지능입니다. 기자실 동료를 ‘물먹이는’ 기사가 아니라, ‘내가 취재해서 보도하지 않으면 세상이 영원히 알 수 없는 사실을 밝혀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진정한 단독 기사를 쓰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식 단독 기사를 남발하는 관행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남들보다 먼저 내보내려는 조급증 때문에 설익은 채로 세상에 나오는 단독 기사가 부지기수입니다. 특종을 위해 정확성을 포기하니, 오보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역시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 기자의 비교우위를 포기하는 미련한 선택입니다.

챗지피티의 치명적 결함은 ‘허언증’입니다. 부정확한 사실이나 허위 정보도 학습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생산한 정보는 제법 그럴듯한 형식을 띠더라도 사실과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철저한 검증으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차별성을 구현한다면, 저널리즘은 인공지능으로 대체 불가능한 효용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될 수 있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저널리즘이야!”

인공지능 시대 도래가 저널리즘에 위협 요인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자들이 저널리즘의 본령에 집중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 저널리즘을 로봇 저널리즘과 차별화하는 시도가 지금 당장 언론사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뉴스 생산 시스템을 쇄신하는 결단을 미룬 채 지금 수준에 머무른다면, 저널리즘의 기대수명은 더 짧아질 겁니다.

레거시 미디어 종사자는 낡은 관행과 체계는 하나도 바꾸지 않으면서 기술혁신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적이 신통치 않은 학생이 공부는 안 하면서 시험은 잘 보려는 심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먼저 저널리즘을 위기에 빠뜨린 기존 관행과 ‘헤어질 결심’부터 해야 합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저널리즘이야!”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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