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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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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어디서 누구로 살고 싶은가… ‘80억 분의 1’ 게임으로 오라

172개국 통계 기반으로 타인의 삶 살아보기… ‘출발점 달라도 누구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일깨워
등록 2026-10-29 21:22수정 2026-11-02 07:42
‘80억 분의 1’ 게임 첫 화면 갈무리.

‘80억 분의 1’ 게임 첫 화면 갈무리.


 

내가 태어난 해와 같은 1990년에 중국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예방접종 몇 가지를 놓쳤지만 다행히 살아남았다. 줄곧 가난하게 자랐지만, 결혼하고 딸 하나를 낳아 77살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중국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가난 탓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뒤늦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쓰촨 대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졌다.

같은 해 멕시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축구선수를 꿈꾸며 평탄하게 성장해 21살에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부상으로 5년 만에 은퇴해야 했지만,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부유하게 살다가 증손주가 태어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는 무난히 국립대학을 졸업해 첫 연봉으로 5천만원을 받는 사무직이 되었지만, 29살에 원인 모를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AI 활용해 제작한 무료 인생 게임

 

이 삶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해 그 나라 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높은 확률로 겪었을 삶이고, 운 좋게 혹은 불운하게 낮은 확률로 겪게 된 의외의 사건들이 만든 삶이다. 이 삶들은 게임 ‘80억 분의 1’(https://1in8b.life) 속에서 임의로 생성됐다. ‘80억 분의 1’은 전세계 172개국의 실제 인구, 보건, 경제 등의 통계를 기반으로 한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한국인 개발자 ‘진휘어스’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제작했다. 회원가입이나 결제 없이 스마트폰과 컴퓨터 웹브라우저에서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다. 2026년 10월7일 출시된 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각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 게임 속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는 통계는 매우 다양하다. 그해 그 나라의 출생아 수, 성별 기대수명, 영아 사망률, 소득 불평등 지수, 교육 접근성, 대학 진학률은 물론이고 살인율, 흡연율, 조혼율 등도 반영된다. 한 국가 또는 세계 전체를 뒤흔든 사건들도 적절히 반영됐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이라크에서 태어난 삶은 사회에 진출하자마자 이라크 전쟁과 이슬람국가(IS) 집권기를 맞이해야 하고, 2020년대를 살아낸 모든 삶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변화된 생활 방식을 수용해야 한다.

게임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들이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는지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1950년에 태어난 사람과 2000년에 태어난 사람의 삶, 똑같이 1950년에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의 삶, 똑같은 한국이라 해도 빈곤층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과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모두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의 투자가 워런 버핏이 제시한 ‘난소 복권’(Ovarian Lottery)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80억 분의 1’은 여기에 개인적 기질 또한 확률에 맡긴다. 예를 들어 선천적 장애 여부와 재능의 차이, 성적 지향 등이다.

이상의 조건들 가운데 게이머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는 시대 하나뿐이다. 1950년부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중 한 해를 고를 수 있다. 그러면 그해 각국의 출생아 수에 따른 확률로 태어날 나라가 정해지고, 그 나라의 소득분포에 따라 태어날 가정이 정해진다.

당연히 태어날 나라를 정할 수 있게 해달라는 문의가 쏟아졌단다. 하지만 제작자는 한 인터뷰에서 딱 잘라 대답했다. “우리 누구도 (태어날 곳을) 고르지 않았다. 원하는 나라가 나올 때까지 다시 했다는 반응은 오히려 이 시뮬레이션이 보여주려던 것과 닿아 있다. 태어난 곳이 삶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 알기 때문에 다시 누르는 거니까. 현실에서는 그 버튼이 없다.”

 

 

‘80억 분의 1’ 게임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 여성의 인생 카드. 화면 갈무리

‘80억 분의 1’ 게임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 여성의 인생 카드. 화면 갈무리


 

나라, 가정환경, 성별, 건강 선택 불가

 

태어난 다음에는 선택의 여지가 조금씩 생긴다. 두 살이 되면 아이의 기질을 고를 수 있다. 활동성과 호기심, 인내심, 배려심을 암시하는 선택지가 제시된다. 성장하면서 어떤 활동에 초점을 맞출지 고를 수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숫자로 표시되기도 한다. 돈이 모이면 어디에 쓸지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학교 진학과 진로 설정,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무엇을 결정할지도 게이머의 몫이다. 처한 환경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선택’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공 확률을 따지는 ‘도전’으로 표현되는 디테일도 있다. 살아가다보면 불법 도박을 제안받는 경우도 있다. 불륜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태어난 나라와 시대상에 따라 구체성이 달라지니 “80억 명 가운데, 단 한 번뿐인 삶이었다”는 게임 속 문구가 이해된다.

하나의 삶을 살아내고 나면 그 삶의 궤적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80억 분의 1’은 이 기록을 추모관이라는 공간에 보관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누군가의 삶을 살아본 게이머가 그 삶에 대해, 혹은 그 삶을 살다 간 누군가에 대해 남긴 소감이 여기에 보관된다. 추모관에는 다른 게이머가 살아본 삶들도 함께 기록돼 있어 그들의 추모관에 들러 촛불을 켜줄 수도 있고 방명록에 한마디 말을 남겨놓을 수도 있다.

50살에 일찍 생을 마감한 중국 여성의 삶을 살아본 게이머는 이렇게 남겼다. “너무 일찍 가버렸지만 춤을 출 수 있어서 기뻤어요.” 그 여성은 아마도 춤을 취미로 삼아 평생을 살아냈을 것이다. 니제르 농촌에서 살다 간 아이의 삶에는 “삶에 열심히 임한 사람, 잊지 않을게요”라는 따뜻한 말이 남겨졌고, 탄자니아에서 60살까지 살아낸 여성의 삶에는 “다음 생엔 꼭 대학교까지 졸업한 기깔나는 여성으로 살아”라는 연대의 말이 남겨졌다. 북한 남성으로 태어난 누군가는 “탈북은 했지만 대한민국 생활도 헬”이라고 감상을 나눴다.

게임은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30분가량의 플레이 타임 동안 별다른 이미지 없이 오로지 텍스트로만 진행된다. 그런데도 앞의 소감들에서 보듯 그 몰입감이 상당하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탄생시킨 이 삶이 무사히 끝을 향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택지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그만큼 통계에 기반을 둬 탄생한 삶들은 현실적이고, 주어진 조건에 맞춰 텍스트로 표현되는 삶의 궤적은 정겹고 때로는 애처롭다.

 

‘80억 분의 1’ 게임 첫 화면에 추모관이 보인다. 화면 갈무리.

‘80억 분의 1’ 게임 첫 화면에 추모관이 보인다. 화면 갈무리.


 

수치와 기록으로 확인하는 삶의 궤적

 

누군가는 밑바닥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능한 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누군가는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살다가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누군가는 최대한 오래 산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누군가는 자신의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게임 속에서 대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많은 한국인이 막대한 자산가로 만드는 플레이를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살아본 삶 가운데에는 이런 삶도 있었다. 1950년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10살이 되는 동안 말라리아, 폐렴, 가뭄, 홍역, 대기근을 모두 경험했다. 3살에 엄마를 잃었고, 8살엔 아빠까지 사망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기술을 배워 16살에 목수가 됐다. 이제 좀 제대로 살아보려고 했건만 25살에는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했지만 국경에서 붙잡혔고, 늘어난 빚에 병원도 못 가고 일만 하다가 32살에 설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에티오피아 아이는 30년이라도 살아봤다. 1960년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난 아이는 첫돌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난해서 예방접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변변한 기록도 남을 수 없었던 아이의 삶 앞에서 말문이 콱 막혔다. 이 삶을 목격한 다음부터는 어떤 삶을 살든 그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게임의 끝을 보기 위해 각종 막장 선택지만 골라 누르다가도, 어느새 가장 안정적인 선택지로 돌아오게 됐다.

‘80억 분의 1’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했지만, 아무래도 게임이라는 특성상 현실 속 삶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결정적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 게임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에 해당하는 ‘선택’ 자체다.

현실의 우리도 매일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선택 대부분은 구체적인 숫자와 명확한 확률,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에 기반을 둬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한 결과를 짐작하며 무언가를 선택하지만, 현실에서 짐작은 종종 빗나간다. 선택을 통해 얻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바로 알기 어렵다. 때로는 작은 선택이 아주 의외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80억 분의 1’의 선택은 통계에 기반을 둬 설계됐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택의 결과가 수치로 명확하게 표현된다는 점에서 실제 우리 인생과 다르다. 게임 속 인물은 자신이 무엇을 꿈꿀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에 더 투자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파악해 선택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글 생성형 인공지능(AI) 제미나이에 “‘80억 분의 1’ 게임 이미지 만들어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서 만든 이미지.

구글 생성형 인공지능(AI) 제미나이에 “‘80억 분의 1’ 게임 이미지 만들어줘”라는 지시어를 입력해서 만든 이미지.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래서일까. 이 게임을 해본 게이머 중 다수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반응부터 보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속수무책으로 사망하는 삶이나 전쟁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살아가는 삶을 대리 체험해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기 어렵다. 제작자는 이러한 반응에 대해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으면 좋겠다”며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답변을 내놨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그 책임을 이 게임과 제작자에게 물을 일은 아닐 테다. 제작자가 의도한 단계로 나아갈 책임은 결국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의 몫이다. 지금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 게임이 제공하는 광범위한 대리 경험이 그 일을 해내기 위한 첫걸음 정도는 되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오래된 조언이다.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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