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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천 개의 서랍, <유미의 세포들>의 송재정

[22WRITERS] <유미의 세포들>의 송재정 작가 인터뷰
신기한 이야기는 꿈과 즐거움을 준다
등록 2023-03-14 05:55 수정 2023-03-17 04:14
송재정 작가가 작업실 테이블에 앉아있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송재정 작가가 작업실 테이블에 앉아있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하지만 송재정 작가의 드라마에는 새로운 게 있었다. 시놉시스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전에는 다루지 않은 소재가 있었다. <W>의 오연주(한효주 분)는 인기 웹툰 속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과 사랑에 빠졌고, 증강현실 기반의 게임 판타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하 <알함브라>)에서는 유진우(현빈 분)가 16회작 내내 NPC와 싸우며 레벨100의 마스터가 됐다. <유미의 세포들>은 ‘어떻게 애니메이션이 실사와 붙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를 뒤집고 애니메이션 세포들이 실사 못지않게 사랑받으며 전에 없던 형식의 드라마로 완성됐다.

새로운 상상력은 독특한 자극을 준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시간을 되돌렸는데 연인이 조카가 되어버렸을 때(<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이하 <나인>, 나를 유일하게 믿어주던 동료가 죽어서 게임 속 버그로 나타났을 때(<알함브라>), 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결심하는 내 마음의 목소리를 인격화해서 지켜보게 될 때(<유미의 세포들>), 그때의 애잔하고 뭉클한 감정은 일상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준다. 이런 새로운 상황들은 어떻게 빚어지는 걸까? 아침 9시면 책상에 앉아 직장인처럼 하루를 보낸다는 송재정 작가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3월6일 서울 여의도의 작업실에 마주 앉아 송재정 작가에게 <유미의 세포들> 이야기부터 물었다.

“이곳에 남자주인공은 없어. 이곳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유미의 세포들>

<유미의 세포들>은 송재정 작가가 먼저 스튜디오드래곤에 제안한 작품이다. “<알함브라>를 마치고 쉬다가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비행기 안에서 볼만한 걸 찾다가 친구들에게 ‘<알함브라>처럼 피폐한 이야기 말고 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웹툰 몇 개를 추천해줬어요. 그중 하나가 <유미의 세포들>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거 꼭 해야겠더라고요.” 로맨스물을 잘 쓰는 후배 작가들이 많으니까 대본은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크리에이터로 참여하기로 했다.

“겪어보니 신인 작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기획 초기에 콘셉트 잡는 일이더라고요. 편성 채널의 요구에 맞는 기획을 내는 피칭도 어려워하고요. 이런 부분은 경험자가 코칭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크리에이터를 떠올렸어요. 외국에선 작가들이 드라마를 회차별로 나눠 쓰는 구조라 크리에이터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죠. 저희는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있어요. 제가 크리에이터였지만 제 기획하에 작가가 한두 명뿐이라 나중엔 저도 대본을 쓰게 되면서 업무 구분이 모호해지더라고요. 저도 <유미의 세포들>을 통해 좌충우돌 경험해보고 배운 셈이지요.”

―<유미의 세포들>의 경우 크리에이터로서 어떤 역할이 가장 중요했나요.

“인기 있는 웹툰이었는데도 아직 원작이 팔리지 않은 상태더라고요. 원작자의 마음에 들 만한 기획이 아직 없었던 거였겠죠. 사실 여자주인공이 여러 명의 남자주인공과 연애하는 이야기는 <섹스 앤 더 시티> 이후 우리나라에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이걸 납득시켜야 했어요. 이전에 제안한 다른 분들은 아마 미니시리즈를 떠올리셨을 거예요. 저희는 여자주인공의 남자가 바뀔 때마다 텀을 두고 순차적으로 방송하겠다, 시즌제를 활용하겠다고 하니 긍정적인 답이 왔어요. 시트콤 구성으로 하나의 완결성을 가진 에피소드를 떠올렸고 지상파 규격에는 맞지 않을 테니 OTT 쪽으로 제안했고요. 세포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서도 다들 배우가 쫄쫄이를 입고 등장할 생각을 해서 무조건 애니메이션과 실사로 가겠다고 했어요. 원작가님의 귀여운 그림체가 큰 몫을 하니까 무조건 그걸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어떻게 붙겠냐고 다들 난감해했지만 이런 모험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는 일도 크리에이터의 역할이에요.”

송재정 작가가 작업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송재정 작가가 작업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유미의 세포들> 이전에도 작가님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해오셨어요. 이전 작품들도 기획서로만 보면 모두가 난감해할 만한 이야기인데요. (웃음) AI 기반의 게임 판타지라든지 웹툰 속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든지요.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나요.

“소재가 아니라 장면 하나에서 시작해요. <알함브라>는 이런 장면이 떠올랐어요. 천둥 치고 비가 오는 날, 외국의 어느 허름한 호스텔의 방문을 딱 열었더니 나랑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 나에게 총을 쏘는 거예요. 보조 작가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하면 ‘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겠다’고 하죠. (웃음) ‘내가 나한테 총을 맞고 죽는다’는 모티브에 꽂혔는데 이게 가능하려면 어떤 설정이 필요할까? 타임슬립으로 미래의 내가 왔을 수도 있고 내 아바타일 수도 있죠. 어떤 소재나 기술을 더하면 그 장면을 구현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알함브라>가 시작됐어요. 답을 못 찾은 상태로 몇 달 돌아다니다가 <포켓몬고> 게임을 알게 됐죠. 그걸 해보고 ‘아, AI 게임으로 가면 되겠다’ 생각했고요.”

내 캐릭터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흥미롭게도 <W>를 구상할 때 처음 떠올린 장면도 흡사했다. “내가 나한테 와서 총을 쏘는 주인공. <W>도 나를 미워하는 내 피조물에 관한 장면이었어요. 보통은 피그말리온 신화처럼 내가 만들어낸 존재와 사랑에 빠지잖아요. 그런데 그게 나를 너무 미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순수미술 화가와 조각을 떠올렸는데 너무 옛날 스타일처럼 느껴져서 당시 트렌디하게 부상한 웹툰을 떠올렸어요.” 웹툰 작가와 웹툰 속 주인공이 목숨 걸고 갈등하는 <W>는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내가 나를 공격한다’는 모티브에 빠져 있었을까. “제가 시트콤을 오래 했잖아요. <순풍산부인과>도 그렇고 한번 하면 3년씩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내가 쓰는 캐릭터들이 진짜 내가 아는 사람 같아요. 김병욱 피디님과 작업할 때 새드 엔딩으로 많이 갔거든요. 나와 가까운 사람의 일처럼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내가 공들여 만든 것들을 내가 무너뜨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될까? 저 캐릭터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서 비롯된 생각 같아요.”

“동맹이니까요.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겁니다. 끝까지 같이 가시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이나 <W>, <알함브라>도 온전히 해피 엔딩을 맞진 못했는데요.

“저는 진심으로 이 인물이 저기로밖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쓰거든요. 처음에는 분명히 저와 제작진, 시청자가 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저 혼자 다른 길로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엔딩에 가까워지면 대본을 받은 감독님부터 ‘내 생각에도 그래’ 하고 바로 납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럼에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거든요.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고 타협하거나 거짓을 써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엔딩에 관해 비판을 많이 받아서 이제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그때그때 맞춰보려고 자주 물어요. 보조 작가들에게도 ‘나 이렇게 가고 있는데 어때?’ 하고 계속 묻습니다.(웃음)”

가공의 세계를 사실로 믿게 하는 힘
―새로운 소재나 기술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끌리는 편인가요.

“시청자로서 저는 전통적인 휴먼 드라마를 좋아해요. 최근에 <나의 해방일지>와 미국 드라마 <석세션>을 재미있게 봤고요. 인물들이 감정적으로 얽히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엄청 좋아했습니다. 볼 때 재미있는 것과 쓸 때 재미있는 것은 다른 차원인 것 같아요. 대본을 쓸 때는 복잡한 퍼즐을 푸는 방식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나인>의 경우 여러 제약이 있잖아요. 9개밖에 없고 20분만 타는 향. 이런 조건이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을 제한하고 이 인물이 어떻게든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시퀀스를 만들어나가는 게 재미있어요. 함정을 잘 파고 탈출할 수 있는 문도 잘 설계해야 하고요. 이렇게 미로를 짜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껴요. 순전히 이야기를 쓸 때만 그렇지 실제로는 방탈출이나 게임, 수사물은 즐기지 않습니다.”

―한 편의 시트콤을 완성할 때도 작가마다 장기가 달랐을 텐데요. 왠지 작가님은 유머나 캐릭터보다 상황극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어렸을 땐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잖아요. ‘너는 상황 만드는 걸 잘하는구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지된 후에는 복잡한 상황 설정이 필요한 아이템이 전부 저한테 왔죠. 난처한 상황에 빠져서 그걸 빠져나가는 아이템도 주로 저에게 맡겨졌어요.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믿게끔 하는 것, 제가 만든 가공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실제 감정을 느끼게끔 하는 일이 흥미로워요.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어요.”

송재정 작가의 대본집. 백종헌 <씨네21> 기자.

송재정 작가의 대본집. 백종헌 <씨네21> 기자.

글을 쓰다 막히면? 계속 다시 써본다. “이런 케이스도 써보고 저런 케이스도 써봐요. 아이디어를 10개씩 내고요. 말로 설명하기보다 빨리 써서 대본으로 보여주는 식이에요. 그러면 상대방도 명확한 의견이 나오니까. 다른 일을 한다고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냥 계속해서 파는 게 방법이에요.”

―비현실적인 상상이 구체적인 이야기로 발전할 때 아이디어는 어떤 식으로 정리되나요.

“대답하기 어려운데요. 제 머릿속에는 체계가 있는데 막상 꺼내면 두서가 없어서 보조 작가들도 어려워해요.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는데 공감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뇌에 많은 서랍을 만들어놓고 필요할 때 꺼낼 수 있게 인덱스를 잘해놓는다는 얘기였어요. 결국 작가에게 중요한 건 새로 알게 된 지식이나 정보를 서랍의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지, 그리고 언제 빼낼지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나 관련 팩트를 알게 됐을 때 무조건 수사물이 아니라 때에 따라 휴먼 드라마 서랍에 넣는 식으로요. <W>를 어떻게 썼냐고 질문받았을 때 그룹 아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떠올렸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만 가지고 된 건 아니거든요. 앞에서 말한 피그말리온 신화에 관한 상상과 서랍 속에 있던 이것저것이 탁 엮이는 거예요. 그러니 어렸을 때 경험부터 최신 정보까지 자기 서랍 정리를 잘해야 잘 꺼내 쓸 수 있어요. 제 이야기들도 결국 제가 50년 동안 어디선가 보거나 경험하면서 캐치한 것들의 조합이니까요.”

―작가님의 서랍 정리 방법이 궁금해지는데요.

“제 서재를 보면 알겠지만 책마다 인덱스를 많이 해둡니다. 어떤 새로운 기술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여기에 붙일 만한 스토리를 떠올리는데, 그때 인덱스한 것들을 다시 찾아봐요. 제 옛날 추억을 뒤지기도 하고요. 이렇게 나의 경험과 책에서 본 강렬한 구절이나 저자의 철학, 그리고 뉴스나 트렌드로 접한 최신의 기술들. 이런 것들을 자주 엮어봅니다. 소재를 찾기 위해 억지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인덱스를 툭툭 해놓고 밥 먹고 여행하고 일상을 보내면서 낚시꾼처럼 엮이는 순간을 고요히 기다리는 식이지요.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보거나 새로운 일을 배우다가 뭔가 엮이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저렇게 기획안을 써보는 거죠.”

잠 못 이룰 즐거움을 주는 ‘찐한’ 이야기들
―평소 굉장히 진지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코미디 작가가 되셨나요.

“신문방송학과를 나왔는데 그때까지 글 쓴 적이 거의 없어서 작가라는 직업은 꿈도 꾸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자를 꿈꿨지요. 그런데 공부를 너무 안 하고 학점이 안 나와서 공채를 볼 수 없는 상황까지 간 거죠. 그때 방송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콩트 과제를 냈는데 코미디 파트 강사님이 저더러 소질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요? 한번도 남을 웃겨본 적이 없는데요?’ (웃음) 집에서도 믿지 않았죠. 맨날 말도 없이 혼자 앉아 있는 애가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고? 그래도 잘한다기에 제작사에 들어가 아이디어 작가로 열심히 했어요. 같은 제작사에 김병욱 피디님이 계셨어요. 새로운 시트콤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인원이 부족하니 참여하라고 해서 회의에 한 번 들어갔거든요. 앉아만 있어도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뭔가 막 배우려는 찰나에 그 프로그램이 조기 종영됐어요. 이후에 <순풍산부인과>를 한다고 아이디어 작가로 오겠냐는 제안을 받아 냉큼 갔죠. 코미디, 로맨스 등 모든 작법을 시트콤에서 배웠어요. 그땐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만일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날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 인생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인현왕후의 남자>

―시트콤을 10년 하고 드라마로 옮기셨죠.

“10년 정도 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조금 더 심각한 이야기가 좋더라고요. <거침없이 하이킥!>을 할 때도 제가 로맨스를 쓰면 깊게 들어갔어요, 성향이 반영되니 쓸데없이 진지해지고 울고불고하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지고요.”

―김병욱 피디님도 시트콤에서 웃음뿐 아니라 슬픔을 중요한 요소로 다루셨지요. 그런 면에서 피디님과 잘 맞으셨겠어요.

“시트콤 밖으로 향하는 질주 기차를 탔다고나 할까. (웃음) 비슷한 게 좋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달라야 서로 완충이 되는데 ‘이렇게까지 찐하게 써도 되나’ 하고 가져가면 피디님은 ‘너무 좋다!’ 이렇게 되니까. 배우들은 ‘나는 코미디 하러 왔는데 이게 뭔 일이지’ 싶고, 선배들은 ‘너무 딥하다. 보는 게 힘들어’라고 하고요. <인현왕후의 남자>를 할 때도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면 그렇게 됐어요. 울고불고 죽고 그런 길로 가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사랑과 야망> 같은 극단적인 사랑 이야기, <폭풍의 언덕> 같은 파멸을 맞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 스틸컷.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 스틸컷. 스튜디오드래곤 제공

습작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경험을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릴 때 저를 즐겁게 해준 작품들처럼 만들고 싶은가봐요. <나니아 연대기> <빽 투 더 퓨쳐> 같은 신기한 이야기가 저에게 단순한 재미를 넘어 엄청난 꿈과 즐거움을 줬거든요. 정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고요. 제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도 궁금증이 생겨서 상상하느라 잠 못 이뤘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물론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없으니까 그만해야겠다 싶기도 하지만, (웃음) 잘 만든 작품이 주는 엄청난 행복이 있잖아요.”

―후배 작가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주시나요.

“경험을 많이 하라는 얘기밖에 없어요. 세상만사 호기심 가지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싶은 욕망을 가져보라고요. 자기 삶을 그리는 데 만족한다 해도 내 삶을 재미있게 살지 않으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없거든요. 보통은 마음이 급하니까 경험할 시간에 습작을 하고 교육원에 다니죠. 그렇지만 경험치가 적으면 건드릴 수 있는 분야 자체가 좁아져요. 습작을 잘해도 경험이 부족하면 내 주변의 아주 작은 현실 연애나 자기 또래를 넘어 묘사하기가 어렵죠. 지루한 것 말고 다른 걸 가져와보라고 하면 공상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가져오고요. 그때도 자기가 빚어낸 세계라기보다 미국 드라마 같은 걸 보다 떠올린 클리셰적 세계관인 경우가 많아요. 문제는 그렇게 떠올린 세계관 속에서는 대사를 쓸 수가 없어요. 캐릭터들도, 그 세계도 잘 모르고 낯설기만 하니까.”

―작가님은 요즘 무엇에 호기심을 갖고 계신지요.

“이제까지 남자주인공 원톱물을 많이 썼다고들 하는데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지금처럼 여성 액션물이나 여성 주도적인 드라마가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유미의 세포들>을 통해 오랜만에 여자주인공 원톱물을 하니 그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차기작으로는 여자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요. 그리고 제대로 준비해서 본격적인 SF 드라마를 써보려고 해요.”

글 김수영 <씨네21> 기자, 사진 백종헌 <씨네21> 기자
에필로그

<나인>을 생방송으로 본 기억이 난다. TV 앞에 앉아 송재정 작가가 설계한 미로 속에 홀딱 빠졌던 그즈음의 내 일기장에는 온통 <나인> 얘기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작가 최소 천재 아닐까” 하고. 갈망하고 고대했던 일들이 낙심으로 끝맺기 일쑤였던 사회 초년생. 일을 바로잡으려고 시간을 돌릴수록 미궁에 빠지는 박선우(이진욱 분)를 보면서 감정이입했고 ‘시간을 되돌린다고 더 나아지리라는 법은 없다’는 이야기가 묘한 위로를 줬다. 송재정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인>의 마지막 회 대사가 떠올랐다. “20년 전 나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필요도 없어. 내 존재는 잊어. 네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20년 후에 거울에서 날 만날 거야.” 어머나. 그때가 2013년, 나 열심히 살아서 10년 후 여의도에서 작가님을 만난 건가! 선우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였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돌아왔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반성을 많이 하고 있고…” “그렇게 못 쓰니까…” 하던 작가님의 겸손과 우려의 말을 커서로 많이 지웠는데 이건 그저 팬심 때문은 아니었다. 여기에도 작가님의 진심이 담겨 있지만, 현장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상상력에 더 책임감을 가지고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다”는 각오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구상을 마치고 집필을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들었다. <나인>의 박선우처럼 <알함브라>의 유진우처럼 씩씩하게 온몸으로 굴러다닐 여주인공을 보게 되는 걸까. 벌써 신난다!

작품목록

<유미의 세포들> 시즌2(tvN, 2022년)

<유미의 세포들>(tvN, 2021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tvN, 2018~2019년)

<W>(MBC, 2016년)

<삼총사>(tvN, 2014년)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tvN, 2013년)

<인현왕후의 남자>(tvN, 2012년)

<커피하우스>(SBS, 2010년)

<크크섬의 비밀>(MBC, 2008년)

<거침없이 하이킥!>(MBC, 2006~2007년)

<귀엽거나 미치거나>(SBS, 2005년)

<똑바로 살아라>(SBS, 2002~2003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SBS, 2000~2002년)

<순풍산부인과>(SBS, 1998~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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