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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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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의로 쌓아올린 세계, <너를 닮은 사람>의 유보라 작가

[22WRITERS] <너를 닮은 사람>의 유보라 작가 인터뷰
허무 말고 희망, 냉소 말고 치열
등록 2023-03-14 01:40 수정 2023-03-14 07:26
유보라 작가가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유보라 작가가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여자의 적도, 여자의 편도 여자다. 고현정(희주)과 신현빈(해원)이 팽팽히 맞서는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과 김향기와 김새론이 서로를 지탱하는 영화 <눈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인물에게 가닿는 시선을 보면 참 다정한 작가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여성에게,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에 각별한 애정을 지닌 유보라 작가는 언젠가 꼭 일제강점기에 여성 독립운동가로 우뚝 서는 한 소녀의 여정을 쓰고 말 작정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 외에도 세월호 참사를 모티브로 외상후증후군을 그린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희생하고 대속하는 여성을 내세운 매운맛의 복수극 <비밀>을 썼고, 장편 데뷔 전엔 <드라마 스페셜-연우의 여름>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은 단막극의 귀재로 불렸던 유보라 작가의 작업실을 3월3일 찾았다.

문을 열자 유기묘 출신 반려묘 보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 쓰러진 입간판을 세워놓고 가는 사람, 고양이가 있으면 “안녕” 하고 가는 사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치열한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을 믿는다던 작가와의 섬세하고도 강건했던 대화를 싣는다.

―작업 공간이 근사해요. 술과 향초가 많네요.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냄새가 나는지에 따라 공간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많이 가져다 놨어요. 술 냄새를 빼는 정화용이기도 하고.(웃음)”

―위스키병이 쌓여 있어요. 글 쓰는 데 좋은 파트너인가요.

“글렌모렌지 시그넷에 푹 빠져 있는데요. 초콜릿 향이 나서 안주 없이 훌훌 마시기 좋아요. 제가 의지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때려치우고 술이나 한잔해’ ‘차라리 자고 다음날 리셋해서 다시 생각해’ 싶을 때 마시곤 하죠.”

―포스트잇에 쓴 메모가 어마어마하게 붙어 있습니다.

“‘주저앉았지만 아직은 링 위다.’ 최근 본 미드 <털사 킹>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70대 마피아를 연기하며 한 대사죠. 전 늘 확신 없이 글을 쓰고 다음 걸 또 쓸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인데, 그 장면이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인데 제 오랜 신념이에요. 아주 예전부터 써놨던 메모인데 요즘 더 와닿아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허무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겠다고 믿고 싶어져서요.”

유보라 작가가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유보라 작가가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재에 좋은 책이 많더군요.

“제 자료실이죠. 책을 공들여 선별해서 사요. 최근엔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좋아하는 소설은 정지아 작가의 <검은 방>이에요. 노모가 딸의 방을 바라보며 사념을 풀어놓는데, 이런 게 정말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17>이나 <덩케르크> 같은 영화를 보면, 서사가 없더라도 ‘저게 영화지’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검은 방>도 그런 소설이에요.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데 다 읽었을 때 묵직한 울림이 오죠.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다시 쓸 수 있을까>는 77살의 작가가 다시 글을 쓰는 의지를 풀어낸 책인데요. 그는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던 작가가 무기력을 딛고 다시 쓰기 시작하는 이야기예요. 저도 ‘고작 나 따위가 안 쓸 순 없지, 오만하지 말고 정신 차리자’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습니다.”

―고현정과 신현빈이 열연한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을 재미있게 봤어요. 복수란 참 강력한 모티브예요. 최근 <더 글로리> 열풍도 그렇고, 사람들은 복수 이야기를 참 좋아하죠.

“<모범택시2>도 인기잖아요. 현실에서 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벌받지 않는 사회라 사적 복수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같아요. 그처럼 시원한 이야기가 없기도 하고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보다는 드라마에서 그런 갈망을 충족하는 편이 낫죠. 사실 그런 면에서 저는 <너를 닮은 사람>이 어떤 면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복수 이야기가 ‘사이다’와 카타르시스를 주려면 주인공에게 온전히 이입되고 복수의 대상이 파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데, 저는 해원에게 온전히 이입할 수도 없고 희주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이야기는 단순한 게 최고인데 욕심이 앞서 그러질 못했죠.”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감정을 파고들어
―저는 한 여자가 자신을 닮은 듯 다른 여자에게 품은 호기심과 선망, 질투심과 애증이 입체적으로 그려져서 좋았어요. 여자와 여자가 맞서는 와중에 사이에 낀 남자는 욕망의 대상이자 예쁜 들러리처럼 보이죠.

“원작 소설에서도 그 부분이 정말 매력적이어서 드라마화를 결심했어요. 두 여자의 관계를 더 밀도 있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미련이 남네요. ‘바람피웠으면 남자를 잡아야지, 왜 여자를 잡아’ 같은 시청자 의견도 있었는데 저는 여자들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어요.”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나의 시작은 여기, 아니야, 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 너다.” 희주의 내레이션과 함께 카메라는 남자를 비추다 해원에게로 향하죠. 그 의도는 선명하게 보였어요.

“둘은 서로에게 분신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해원도 남자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가장 믿었던 언니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던 거죠. 단순히 바람피워서 복수하겠다는 게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언니기에 그냥 말해줬으면 보내줬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해원이 깊이 상처받은 거예요.”

―젊은 신인 김화진 작가의 소설 <나주에 대하여>를 보면, 자기 남자친구보다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가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여자가 나오거든요.

“진짜 그렇지 않아요? 내 남자가 누구랑 사귀었는지 사귈 건지 되게 궁금하고 저 여자는 어땠을까, 저 여자는 왜 좋아했을까 되게 궁금하지 않아요?(웃음)”

―여자들은 여자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미워하기도 하고요.(웃음)

“그런 이야기가 늘 우리를 사로잡죠. <너를 닮은 사람> 원작인 정소현 작가의 소설을 보면, 여자주인공이 젊은 여자를 보면서 자신의 젊을 때와 닮았지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빛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죠. 그 감정을 파고들고 싶었어요.”

―작가님도 <너를 닮은 사람>이나 <비밀>의 주인공처럼 누군가를 애증해본 적 있나요.

“저라면 지쳐서 끝내죠.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안 돼요. 저를 닮은 인물이라면 허무주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처럼 술이나 마시는, 영화 <어나더 라운드> 같은 이야기가 최선이겠죠.(웃음)”

유보라 작가가 글을 쓰는 책상 등 작업공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유보라 작가가 글을 쓰는 책상 등 작업공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고등학생 시절 겪은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여성 투톱물을 좋아하죠? 영화로도 선보인 <눈길>은 위안부로 끌려간 종분(김향기 분)과 영애(김새론 분)의 연대를 그려냈어요. “죽는 게 무섭니, 죽지 못해 사는 게 더 무섭지”라는 고고한 영애, “죽는 게 제일 쉽다, 살아서 돌아가야지”라며 달래는 꿋꿋한 종분. 두 여성 캐릭터를 대비하며 극을 끌어나가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이야기에서 먼치킨(능력이 뛰어난 캐릭터)인 한 인물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길 원하지 않아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결핍을 존중하고 채워주는 이야기를 좋아하죠.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종분뿐 아니라 의식이 있고 엘리트 계급이라고 생각했던 영애도 같은 처지가 돼요. 이들이 어떻게 연대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성을 주인공으로 쓰게 되는 건, 제가 남성을 주인공으로 쓰게 되면 제 안의 로망에 가까운 남자들을 쓰게 되거든요. 그러다보면 날것의 느낌이 안 나요. 그래서 제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세월호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죠. 대한민국의 외상후증후군을 그리며 위로를 보내는 드라마예요. 이야기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작가님 글에선 늘 그런 점이 또렷하게 느껴져서 좋습니다.

“제가 가장 예민하던 고등학생 시절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어요. 제가 다니던 보성여고가 성수대교와도, 삼풍백화점과도 멀지 않았거든요.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갑자기 선생님들이 수업을 다 멈추고 결원을 체크하는 모습이 아직도 떠오르네요. 세월호 때 다시 그 무력감과 절망감을 겪어야 했고요.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납득할 만한 대처와 수습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떤 부분은 치유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회에선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자꾸 제 드라마나 영화 <벌새> 같은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세계에 관심이 많죠.

“관심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웃음) 관심이 너무 많아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죠. 저는 냉소적인 태도가 가장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 해요.”

예술에 희망이 있는 건 책임을 말하기 때문
―파리바게뜨 공장에서 희생된 노동자, 신당역에서 살해당한 여성, 이태원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사회가 희망을 가지려면 선명한 잘못에는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는 재발하지 않게 노력하고 예방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 결국 허무와 냉소에 빠질 수밖에 없거든요. 어차피 글렀어, 망한 사회야.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거예요. 책임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작은 일에 책임지듯 큰일에도 책임져야죠. 그래도 요즘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에 희망이 있는 건, 그런 이야기를 계속하려 노력하잖아요. 그러니 절망할 건 아니라 생각해요.”

―오랜만에 당신을 히트 작가 반열에 올린 드라마 <비밀>을 보고 왔어요. 다시 보니 더욱더 매운맛 드라마던데요.

“다시 보면 ‘빻은’ 장면 천지이지 않아요? 요즘 옛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야, 저 때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구나’ 싶다니까요.(웃음)”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벽 치기 키스는 기본, 억지로 잡아끌고, 힘으로 제압하고, 버럭 소리 지르고 그런 것들이요?

“그때는 그게 이상한 건지 몰랐어요. 오히려 ‘이러면 좋아하겠지?’라면서 썼죠. 저도 이렇게 바뀐 걸 보면, 우리가 아무리 비관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사회는 분명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사람들은 1980~1990년대를 유토피아처럼 회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기억나거든요. 저희 옆집 아주머니가 늘 멍을 가리려고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던 것. 아저씨가 아무렇지 않게 여자애들을 만지며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라고 했던 것. 부모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기 애들을 때리던 것. 매일 어디선가 엄마들이 맞는 소리, 여자들이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애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좋아졌잖아요? 우리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가고 있어요.”

―작가님은 유정이나 종분처럼 꺾이지 않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같아요.

“<비밀>은 제가 늦게 투입된 작품이어서 대본을 쓰면 바로 촬영하는 상황이었어요.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여자주인공은 점점 더 앞만 보고 가는 강직한 인물이 돼가고 속도감이 붙으며 시원시원해졌죠. 저는 그런 캐릭터를 더 보고 싶어요. 요새는 여성 서사에 재미까지 더해진 작품과 캐릭터가 정말 많이 나와서 좋아요.”

이야기 전할 사람 없어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
―장편 데뷔 전엔 단막극 장인이었죠. <드라마 스페셜: 연우의 여름>은 명작이에요. <저어새, 날아가다> <태권, 도를 아십니까> <상권이> <청춘> 등 여러 계층의 사회문제를 다뤘어요.

“<청춘>은 원래 제목이 <18세>였는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당시 희생자 대부분이 17~18살이니 제목을 바꾸라고 권고가 내려와서 바꾼 거예요. 무섭죠?(웃음) 단막극은 이야기를 좀더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애정이 많아요. 작가들도 감독들도 신인이 많아서 만듦새는 다소 서툴지라도 진정성은 굉장하죠. 오티티(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시대라지만, 요즘에도 방송사 단막극 공모전은 계속해요.”

―극본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모든 협업의 기본은 대본이라는 책이에요. 굉장히 책임감이 무겁죠. 모든 사람을 충족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이해는 가는 이야기를 써야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휘둘리지 말아야죠. 결국 극본의 힘은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를 잊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쓰려 했던 걸 심지 있게 흔들리지 않고 써내는 것. 시대가 변해도 극본의 힘은 예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있을 거예요.”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쓰게 하나요.

“계약이요. 나에게 계약금을 지급한 제작사가 손해 보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제가 이야기를 쓰게 하는 힘이죠. 그게 아니었으면 제가 어디 가서 뭘 하고 있겠어요?(웃음) ‘저 사람들 다 네 대본만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이 저를 현실적으로 달려가게 해요.”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요.

“이 장면을 쓰고 싶다. 이 장면에 나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요. 다큐멘터리와 <인간극장>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 만들고 싶은 장면이 불쑥 떠오르죠.”

―오늘 인터뷰를 내내 함께한 고양이, 보리도 영감을 주나요.

“그럼요.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 어느 순간 보리의 숨 쉬는 소리가 들릴 때, 어떤 생명체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따듯하게 느껴져요. 또 내가 열심히 써야지 얘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책임감이 확실히 들어요. 동력이 되죠.(웃음)”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제가 만나는 피디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일제강점기 한 시골에 사는 소녀가 만주에 있는 오빠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요. 그 과정에서 유명한, 혹은 이름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순진하고 겁 많던 소녀가 몇 년에 걸쳐 만주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강건한 투사가 돼 있는 거예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남성만큼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 이유를 캐보니, 남성 독립운동가에겐 아내와 자손이 있으니 이분들의 이야기가 계속 알려지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대개 남편과 자손이 없어서 잊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들을 조명하고 싶었어요.”

유보라 작가가 쓴 대본집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유보라 작가가 쓴 대본집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을 믿고 싶다
―지금 쓰는 이야기는 어떤 건가요.

“인구절벽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지금 한국 출생률이 0.78이잖아요. 아이를 낳으라고는 하면서, 여전히 ‘노키즈존’이 대부분이고 ‘맘충’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시대죠. ‘애 낳는 게 벼슬이야?’라고들 하는데, 이 정도면 벼슬이 돼야 해요.(웃음) 벼슬이 될 정도로 지원해주든가, 적어도 아이를 낳는 게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해줘야죠. 이런 현상을 다룬 드라마가 될 거예요. 2023년 안에 촬영 들어가는 게 목표입니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 길을 가다가 휴지를 줍는 사람, 쓰러진 입간판을 세워놓고 가는 사람, 고양이가 있으면 ‘안녕’ 하고 가는 사람, 유기견을 보고 사람들이 ‘아이고 어떡해’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저는 그런 작은 게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나요.

“치열한 이야기. 저는 치열하게 살고 치열하게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런 치열함엔 사회의식도 녹아나게 마련이죠. <더 글로리>도 그래서 재미있다고 생각하고요. 얼마 전 미드 <올리브 키터리지>를 봤는데 인생 드라마였어요. 아주 괴팍하고 불친절한 노년의 여성이 더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던지죠. 우리는 너무 쉽게 이야기해요. ‘자살각’ ‘늙으면 죽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무엇을 믿나요?

“저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을 믿고 싶어요. 요샌 누가 잘해주면 사기 치는 거니 조심하라고 의심부터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작은 선의를 믿고 싶어요. ‘내가 너한테 돈 버는 법 알려 줄게’ 이런 선의 말고.(웃음) 여전히 제 안엔 의심이 가득하지만, 그런 작은 선의가 모여 사회가 좋아질 거라 믿고 싶네요.”

글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JTBC 제공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JTBC 제공

에필로그

8년 만의 재회였다. <씨네21>에서 삼일절 특집극 <눈길>로 찬사를 받은 유보라 작가를 만나 인터뷰한 지 어느덧 8년, 그는 고현정·신현빈 주연의 <너를 닮은 사람>과 이준호·원진아 주연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 두 편의 상업드라마를 써낸 원숙한 작가가 돼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는 완연한 어른이었다. 자신의 글에는 엄격하고 겸손하지만,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믿는 것을 즉문즉답으로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사람. 위스키와 향초와 책과 메모가 가득하고 고양이가 고고하게 돌아다니다 골골 소리 내어 우는, 아름다운 작업실에 초대받은 기분은 어쩐지 수줍었다. 이 대화를 읽은 독자도 그런 마음을 함께 느꼈기를 바란다. 유보라 작가가 꼭 쓰고 말리라 다짐한다는, 일제강점기의 한 소녀가 만주로 떠나 어엿한 독립운동가가 돼가는 여정을 그린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응원하며 기다리고 싶으니까 말이다.

작품 목록

<너를 닮은 사람>(JTBC, 2021년)

<그냥 사랑하는 사이>(JTBC, 2017년)

<눈길>(KBS, 2015년)

<드라마 스페셜-18세>(KBS, 2014년)

<비밀>(KBS, 2013년)

<드라마 스페셜 : 연우의 여름>(KBS, 2013년)

<드라마 스페셜 : 저어새, 날아가다>(KBS, 2012년)

<드라마 스페셜 : 태권, 도를 아십니까>(KBS, 2012년)

<드라마 스페셜 : 상권이>(KBS,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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