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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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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지, 여기를 왜 왔을까

살 집과 할 일이 생겨 급하게 서울로 이사하다
등록 2021-12-23 14:44 수정 2021-12-24 02:17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1983년, 우리 부부가 서른아홉 살 때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5학년 여름방학 하기 며칠 전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광진구 자양동에 있는 시집 이모네 집에 들렀습니다. 이모부는 건축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부자 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모부가 자기네는 길 건너 어느 호텔 사장네 별장을 사서 이사한다고 합니다. 지금 사는 한옥이 비니 이리로 이사를 오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서울로 이사를 가야지 벼르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강원도에 생활 기반이 있으니 서울로 간다는 것은 막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옛날 배재학당을 나온 외할아버지

이모부는 아들이 공부도 잘한다던데 시골에서 공부시켜서 되겠냐고, 서울 와서 공부시키라고 했습니다. 이모부네 아들 하나는 서울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서울대학생이 나온 명당이고, 여기서 돈도 많이 벌었다고 했습니다. 이모부는 자기가 하던 골재 판매를 맡아서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길로 집에 와서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아들이 5학년이기 때문에 2학기 전에 이사해야 서울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외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배재학당을 나와 어느 회사의 중역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결혼하고 외할아버지를 만났을 때가 그분 80살 때였는데, 키가 훤칠하게 큰 백발의 노신사였습니다. 나를 보시고 “남편은 자기가 특별히 아끼는 손주”라고 “행복하게 잘 살라”고 덕담을 건네셨는데, 아주 말씀도 잘하셨습니다. 남편은 외할아버지가 나온 배재학당을 꼭 가고 싶었는데, 시골에서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들만은 꼭 배재중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서울에서 살 집과 할 일이 생겼으니, 아들을 배재중학교에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구나 생각했습니다. 나도 서울에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서울에서 살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서울로 이사하는 걸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정든 강원도 영월을 떠나는 것을 섭섭해했습니다. 서점을 맡을 사람을 찾아 인수인계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점 물건을 거래처로 반품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싸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서울로 이사 가요” 하면 설마 하고, 농담도 잘한다고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여름방학 하기 전에 서울로 전입신고를 했습니다.

이모네가 이사 가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모네 집은 터가 넓어서 본채를 중심으로 ㅁ자로 행랑채도 있고 창고도 있었습니다. 우리 이삿짐은 이모네 창고에 맡겨놓았습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같이 우리 부부도 방학을 보냈습니다. 다섯 식구가 같이 외갓집도 가고 남편 친구네 집도 갔습니다.

둘도 많던 시절에 셋을 낳아서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러 갔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더니,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서류를 만들어 창구에서 “여기요, 식구가 하도 많아서” 하며 퉁명스럽게 던져주었습니다. 둘만 낳자고 하던 세월에 셋을 낳았는데, 둘도 많다는 시대가 되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은 자양초등학교로 전학했습니다. 한 학년에 19개 반씩 있어 ‘맘모스 학교’라고 했습니다. 1, 2, 3학년은 오전오후로 반을 나누어 등교했습니다. 너도나도 지방에서 서울로 오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동경하던 서울인데 막상 와보니 사람은 많은데 각박하고 답답했습니다.

서울 온 지 두어 달 만에 평창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데 강남고속터미널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도로에는 차들의 빨간 후미등이 물결처럼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내가 미쳤지. 여기를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넓고 사람 많은 서울 한복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갈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서울이 무섭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양국민학교에서 학교 행사로 이틀 동안 바자회를 했습니다. 엄마들이 나가서 판매 봉사를 했습니다. 주방용품, 옷, 학용품 등 여러 품목을 팔았습니다. 그 가운데 책 코너가 있었습니다. 나는 서점 일을 해봤기 때문에 신나게 책을 팔았습니다. 제법 많이 팔렸습니다. 그 바람에 다른 엄마들과도 사귀게 됐습니다.

서울 학교는 뭔가 다르긴 달랐습니다. 방과후 수업으로 합주부가 있었는데, 외부 강사가 와서 바이올린 수업을 했습니다. 큰딸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며칠을 졸랐습니다. 비용이 꽤 됐지만 레슨을 받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돈을 내니 바이올린을 대행해서 사다주었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처음 보는 바이올린을 신기하게 만져보았습니다. 큰딸은 매일 대문짝 여는 소리를 내며 연습했습니다.

이사하고 그해 겨울을 자양동에서 났습니다. 남편은 처음 맡은 골재사업에서 많이 어려워했습니다. 이모부에게서 8톤 트럭을 인수하고 그 트럭을 몰던 기사까지 소개받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겨울엔 골재 주문이 전혀 없었습니다. 트럭을 골목에 세워두고, 다달이 기사에게 급여를 주었습니다. 기사네 식구는 우리 사는 집 행랑채에 세를 살았는데, 월급을 받은 날은 고기 굽는 냄새가 우리 집까지 구수~하게 넘어왔습니다. 봄이 되고 잘 안되는 사업은 빨리 정리하는 것이 상책이라며 골재사업을 정리했습니다.

마침 정동에서 고덕동으로 이전한 배재중학교

아들은 6학년이 됐습니다. 자양국민학교에 학생이 너무 많아 인근에 양남국민학교가 새로 지어져 아이들을 갈라 배정했습니다. 막내는 자양국민학교를 한 학기 다니고, 3학년 1학기에 새 학교로 전학했습니다. 당시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에 새 학교를 짓고 있었습니다. 원래 있던 정동에서 이사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려고 시내에 있던 명문 고등학교들을 정책적으로 이전시키던 때입니다. 우리는 배재중학교 뒤에 지어진 고덕동 시영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아이들은 2학기에 고덕국민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이게 다 아들을 배재중학교에 보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재중학교 옆에 중학교 하나가 새로 또 지어졌습니다. 추첨으로 학교를 정하는 거라 배재중이 아니라 새 학교로 갈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발표가 날 때까지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발표가 났는데, 배재중이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1차 목표가 이뤄졌습니다.

고덕동에 갑자기 아파트가 많이 지어지고 인구가 늘어나서, 집 옆에 국민학교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딸들은 고덕국민학교를 한 학기 다니고 이듬해 새 학교로 또 전학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과 큰딸은 모두 4곳, 막내딸은 모두 5곳의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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