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배우가 아니어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2020년 조명보다 캄캄한 방에서 울고, 2021년 나무문 뒤에서 내가 쓴 대사를 듣다
등록 2021-08-30 14:26 수정 2021-08-31 02:06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2021년 7월9일 학교 내 강당에서 연극을 올렸다. 꼬박 7개월을 준비하고 연습한 연극이었다. 이번에 올린 연극은 판타지 장르의 짧은 극으로, 불안한 감정을 다루는 법에 대한 고민을 풀어가는 내용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저마다 불안을 느끼는 친구들이 만나 만든 연극이라서 우리가 듣고 싶은 조언이 담겨 있었다.

올해 초 겨울방학에 친구 S가 연극을 올리려는데 대본 쓸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흔쾌히 자원했다. 무슨 이야기를 쓸지부터 대사 하나하나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다. 대본 작업이 다 끝난 뒤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무대 스태프로 참여해주지 않겠냐는 고마운 제안을 받았다. 덕분에 리허설 내내 그리고 본공연까지 무대 뒤편에서 바쁘게 오가며 소품을 옮기고 준비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품으로 사용한 짙은 회색의 나무문 뒤에서 내가 쓴 대사를 들었다. 마지막까지 고치고 싶은 내용이 많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담겨 있어서 들을수록 좋았다. 연극의 모든 대사가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연극을 만드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2020년에도 연극을 올릴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대본 쓰는 작업에 참여했던 것은 같았다. 하지만 약을 먹고 부은 내 얼굴이 무대에 오르는 것, 촬영으로 기록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금세 방전되는 체력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나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갈 수 없도록, 못하고 안 할 거라며 자신을 제한한 것은 분명 나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극이 끝나고 방 안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었다. 내 방은 조명이 다 꺼진 무대보다 캄캄했다. 암전 중 무대 뒤쪽에선 소품을 책임지는 친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데, 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자원해 무대에서 내려간 내가 너무 한심했다.

여태까지, 찾아서 보러 다닐 만큼 연극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자유학년제의 하나로 연극 수업을 재미있게 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연기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담을 쌓았다고 하기에도 먼 이야기였다. 연기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무대에 오르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무대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는 희열, 노력하고 연습한 것을 남들 앞에 보이는 일, 그리하여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 그리고 잠시나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건 어떤 기분일까? 연극 한 편을 끝낸 친구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나는 그 모든 걸 멀리서 지켜봤다.

그리고 2021년 소중한 기회로 무대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정말 연기를 해보고 싶은지 나에게 물었다. 재미는 있을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배우들과 등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토록 안타까워해놓고, 왜 그랬을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연기나 무대 스태프로 특정되는 역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극을 만들고 있다는 기분, ‘병 때문’이라며 내가 벗어나서는 안 될 원을 주변에 그어놓고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며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그리워하고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연극을 만들었고, 배우가 아니어도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연극은 그런 거였다.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신채윤 고2 학생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