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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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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그 나이

등록 2021-05-02 09:16 수정 2021-05-06 01:06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해가 바뀐 지 4개월이 지나고 4월 19일에는 만으로 열일곱 살이 되었다. 열여덟. ‘그 나이’. 비가 오기 전날 오후였다. 라일락 향이 희미하게 밴 녹진한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그 나이가 되었구나. 2014년, 7년 전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나이를 기어코 맞았어.

2019년 9월26일 처음 병을 진단받은 날과 그다음 날 입원해 병실 복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바라봤던 병원의 창백한 천장이 생각난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과호흡이 와서 자기 숨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를 보던 할머니도 연신 눈가를 찍어내셨다. 그들의 눈물을 생각하며 나는 병원이 눈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눈에서 흐른 눈물에 발목까지 잠길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가슴께를 지나 입술과 코와 눈을 넘어서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다. 모든 환자와 보호자는 아가미를 달아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상상을 했다.

물과 눈물과 아가미.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 생각은 나를 자연스럽게 2014년 전의 그날을 헤엄치도록 만들었다. 고작 열한 살에 불과하던 어린 날의 4월16일에 지금도 무얼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마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청소 시간, 나는 교실 뒤편 사물함 앞에 서 있었다. 사회 시간에 잠시 포털 사이트를 접속한 선생님을 통해 이미 뉴스를 접한 차였다.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도 생각난다. “아까 봤지. 커다란 배가….” “얼마나 큰 배인 거야?” “몇 명이나 타고 있을까?” 청소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은색 난간을 손으로 주욱 쓸면서 큰 배가 넘어지는 광경을, 이유를, 그 안에 있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난간에 쓸린 손이 마찰 때문에 쓰라렸다. 어떤 상황이었을지 겁도 없이 상상하던 나는 당장 손바닥이 아파오는 감각에 울상을 지으며 손바닥을 후후 불었다.

병원에서 나는 11살 그 봄날 저녁에 느꼈던 손바닥의 고통과 전혀 다른 아픔의 결을 헤아리고 있었다. 병을 안 지 이틀째였다. 오랫동안 투병하는 일에 대한 감각도, 그 과정에서 내 연약함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낄지도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내가 가는 길이 즐겁지만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나는 아팠고, 그걸 견디는 일은 꽤 지난할 것이었다. 아픔을 견디는 일은 1초가 됐든 1분이 됐든 하루가 됐든 몇 년이 됐든 그 순간순간이 지겹고 마구 구겨져버린 나를 바라봐야 하는 일이니까.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의 고통은, 그리고 그들을 잃어서 삶이 마취 없이 찢겨나간 사람들의 고통은 얼마나 진하고 날카롭게 구겨진 것일까?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졌다.

2019년에서 1년6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고통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오직 내가 겪어본 아픔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커녕 내가 앞으로 느낄 고통조차 전혀 알 수 없다. 손톱 밑 거스러미가 뜯기는 일처럼 어떤 고통은 자주 찾아오지만 어느새 사라져서 잊게 되는 반면, 어떤 고통은 머리를 무겁게 짓눌러서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먹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입가에 실없는 웃음을 짓는 것과 같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시달려야만 한다. 그 모든 아픔의 종류와 원인과 어떻게 느끼는지가 각자 달라서 나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에게도 너의 힘듦을 알아, 내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어, 하고 말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누군가 아팠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일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하는 것뿐이다. 같이 기억하자고 말하고 그걸 위해 학교에서 진행하는 세월호 추모 주간 준비위원회에 들어가서 여러 나눔을 함께하는 것 등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그날에 아팠던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바다에 녹아 누군가에게는 숨을 쉬기 위해서는 아가미가 필요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도록 했을 것이다.

신채윤 고2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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