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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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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용산공원에는 용산이 없다

외세가 바꾸고 굳힌 서울 ‘용산’ 미군기지 터 본래 이름은 ‘둔지미’… “반환되는 지금이 역사성 되찾을 좋은 기회”
등록 2021-02-21 01:30 수정 2021-02-23 10:16
조선 후기 화가 진재 김윤겸(1711~1775)이 그린 <청파>(왼쪽)는 현재 서울 용산 미군기지인 옛 둔지미 일대를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화가 진재 김윤겸(1711~1775)이 그린 <청파>(왼쪽)는 현재 서울 용산 미군기지인 옛 둔지미 일대를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등은 공모를 통해 용산 미군기지에 조성될 공원의 이름을 ‘용산공원’으로 확정했다고 2021년 1월16일 발표했다. 모두 9401건의 시민 제안과 전문가 심사 등을 종합한 결과였다. 애초 이 사업의 이름이 ‘용산공원 명칭 공모전’이어서 “결국 ‘용산공원’으로 정할 것이면 공모를 왜 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5등 선정작에도 모두 ‘용산’이란 이름이 들어갔다.

그러나 사실 이 용산 기지 안에는 ‘용산’이 없고, 이 기지는 ‘용산’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서울의 ‘용산’은 용산 기지의 서북쪽에 있는 용산성당과 효창공원, 만리재를 연결하는 산줄기를 말한다. 물론 용산 미군기지 안에도 산은 있다. 이 산은 ‘용산’이 아니라 ‘둔지미’ 또는 ‘둔지산’이다. 둔지미가 원래 이름이고, 둔지산은 그것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둔지미란 지명은 평지에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뜻한다. 둔지미는 용산구청의 건너편 사우스 포스트 안에 있는 해발 70m 정도의 언덕이다.  

기우제 지내던 국가 제사 장소

둔지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54년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다. <지리지> ‘경도 한성지’ 편에 “노인성단, 원단, 영성단, 풍운뢰우단은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들 제단은 통상 ‘풍운뢰우단’이나 ‘남단’으로 불렸는데, 주로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1897년 고종이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에 원구단을 지을 때까지 남단은 종묘, 사직과 함께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 장소였다.

조선 후기에 둔지미는 행정구역 이름으로 사용됐다. 영조 때인 18세기, 서울 영역이 남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오늘날의 구와 비슷한 5개 방이 새로 생겼다. 이때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 일대가 모두 둔지방에 포함됐다. 둔지방은 둔지미계(용산동 1~6가, 용산 미군기지)와 서빙고1~2계(서빙고동), 와서계(한강로3가), 이태원계(이태원2동), 청파계(청파동), 전생내·외계(후암동), 갈어리계(갈월동)로 이뤄졌다. 특히 현재의 용산기지인 둔지미계에는 큰말(대촌)과 제단안말(단내촌), 정자골(정자동), 새말(신촌)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둔지미는 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됐다. 임오군란 때 들어온 청나라군이 둔지미에 주둔한 것이다. 청군은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을 1882년 7월 이곳으로 납치해 청나라 천진(톈진)으로 끌고 갔다. 이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도 용산(효창공원, 만리창)과 둔지미(용산 기지) 일대에 주둔해 청나라군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450년 이상 사용한 지명 ‘둔지미’를 ‘용산’으로 바꾼 것은 일제였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 직후 조선에 대규모 부대를 영구히 주둔시키기로 결정하고 서울과 평양, 의주에서 그 터를 찾았다. 1904년 11월1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참모총장에게 문서를 보냈다. “현 시기에 영구적인 여러 시설의 설치는 실행하기에 극히 유리하므로 ‘용산 부근’ 병영 건축 공사를 하루라도 빨리 실행에 착수하는 것을 희망한다.” 여기서 ‘용산 부근’이 바로 ‘둔지미’이며,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다.

북쪽에서 바라본 현재 용산 미군기지 모습. 한겨레 자료

북쪽에서 바라본 현재 용산 미군기지 모습. 한겨레 자료

일제가 바꾼 지명이 해방 뒤에도

1906년 둔지미는 공식적으로 ‘용산’으로 바뀌었다. 당시 일본군이 둔지미 일대를 그린 지도의 이름은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였다. 이 지도엔 둔지산이 적혀 있고, 일본군도 이 일대의 지명이 둔지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지도의 제목을 ‘용산’이라 붙였다. 일제강점기 용산 기지는 대체로 ‘용산 병영’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비슷한 시기에 용산 기지 주변에 용산 기차역이 설치되면서 ‘용산’이란 지명은 굳어졌다. 다만 원래의 용산은 ‘구용산’, 둔지미 일대는 ‘신용산’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일본군 사령부와 기차역으로 신용산이 발전하면서 용산이란 지명의 중심은 점차 신용산으로 옮겨갔다.

일본군은 왜 둔지미를 용산으로 바꿨을까?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일본군은 1884년 외국에 개방된 ‘용산’(나루)이란 지명을 선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도 “용산이 둔지미보다 훨씬 더 유명한 지명이어서 용산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가 용산으로 바꾼 둔지미의 이름을 회복할 기회는 있었다. 1945년 해방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름 둔지미를 되찾기는커녕 미군 주둔으로 용산 기지에는 영어식 이름이 새로 붙여졌다. 바로 ‘캠프 서빙고’였다. 이 이름은 1945~52년 사용됐다.

6·25전쟁의 전선이 안정된 1952년, 용산 기지는 새 이름을 얻는다. 미군은 흩어져 있던 미8군사령부와 한국 육군 본부를 용산 기지에 재배치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때 미군은 북쪽을 사령부 터로 선택해 ‘메인 포스트’라고 불렀다. 과거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남쪽엔 ‘사우스 포스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용산 기지 전체의 이름은 ‘개리슨’ ‘컴파운드’ ‘밀리터리 레저베이션’ ‘밀리터리 에어리어’ 등으로 다양해졌다. 한국인은 ‘용산 미군기지’라고 불렀다.

2003~2005년 노무현 정부는 용산 미군기지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고 이 터를 국가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계획에 따라 2017년 미8군사령부, 2018년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한미연합사령부는 이전 시기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전체 반환 대상 면적 203만㎡(약 61만5천 평) 가운데 2.6%인 5만3천㎡(약 1만6천 평)만 반환됐다. 캠프 코이너(미국대사관 터)와 드래곤힐호텔, 헬기장 등은 계속 미국 정부가 사용한다.

“공원 조성에서 역사성과 장소성 고려해야”

배우리 명예회장은 “용산 기지가 반환되는 지금이 이 지역의 역사성을 되찾을 좋은 기회다. 새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멋대로 바꾼 ‘둔지미’라는 지명이 거론조차 안 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김천수 실장은 “용산 기지는 조선 때부터 길고 아픈 역사가 쌓여왔다.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역사성과 장소성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천수,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 용산구청, 2016
김천수,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용산구청,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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