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복숭아 철과 귤 철 사이 쓸쓸함이 가을 타는 게 아니겠느냐고. 그 말이 좋았다. 가을의 외로움을 깔끔하게 정의했다고 생각했다. 복숭아 철과 귤 철. 더운 김이 가시고 찬 바람 드는 그 사잇계절. 그 쓸쓸한 계절에도 단맛은 있다. 포도의 새큼한 단맛, 배의 물기 많은 단맛, 사과의 아삭한 단맛 그리고 감의 맛. 후숙 덜 된 홍시의 떫은맛부터 단감의 단단한 단맛, 곶감의 말랑한 단맛, 딱딱해질 때까지 말린 감말랭이의 질겅질겅한 단맛이 있다.
우리 집 식구는 총 일곱 명이다. 친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언니, 나, 동생 이렇게 대가족이 한집에 산다. 학교에서 식구 수를 조사할 때 나보다 가족 구성원이 다양하고 많은 집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에는 사생활은 좀 없는 대신 시간이 독특하게 흐른다. 옛것과 새것이 계속 부딪치고 오묘하게 섞여서 아예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내가 감의 다양한 맛을 알 수 있었던 건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다. 오늘 시골에 다녀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큰 비닐봉지에 감을 한 포대 가득 담아 오셨다. 시골 감나무에 열린 주황색 감이다. 나는 그 감의 맛을 안다. 더 이상 그 감의 겉모습에 속지 않는다. 어릴 때 그 감이 어찌나 탐스럽던지, 입에 넣지도 않았는데 벌써 달게 느껴져서 몰래 한입 베어 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마당 구석에 퉤, 뱉어놓은 적이 있었다. 첫맛부터 끝맛까지 어쩜 그리 떫은지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 감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다.
나무 꼭지를 짧게 딴 감은 소주에 꼭지 부분을 푹 적셔 따뜻한 곳에 2~3일 놓으면 웬만한 단감보다 달아진다고 한다. 이 과정을 ‘침시’라고 한다. 나무 꼭지가 비교적 긴 감은 과도로 꼭지 부근만 남겨놓고 깎아서 나무 부분을 비닐끈으로 엮어 바람 잘 드는 창가에 매달아 놓는다. 50일 뒤 먹을 수 있는 곶감이다. 너무 바짝 말리면 딱딱해서 씹기에 불편하고, 덜 말리면 떫은맛이 가시지 않는다. 적당히 말랑말랑해지고 단맛이 날 때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기계로 곶감을 만들어 계절과 상관없이 마트에서 사 먹을 수 있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감꼭지를 소주에 적시고 할아버지 곁에 남아 감을 깎았다.
할아버지는 일정한 속도로, 비슷한 간격의 칼자국을 촘촘히 남기며 감을 빙 둘러 깎으신다. 할아버지의 감껍질은 시작부터 꼭지 곁에서 끝날 때까지 거의 끊기지 않는다. 마음이 앞서 따라해보려다가 매끈하고 반만 남은 감을 손에 쥐었다. 칼질에 서툴러 삐끗해서 매달아야 할 꼭지 부분을 반쯤 뎅강 날려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깎은 감을 한 개도 버리지 않으셨다. “감이 너무 작아졌어요”라고 말하자 “곶감 작은 거라고 안 먹겠냐? 다 끼어서 그냥 먹지” 하시고, 꼭지를 날려버린 걸 조용히 보여드리자 요지(이쑤시개)를 꽂으면 된다고 하셨다. 너무 무르거나 상처가 나서 썩기 시작한 감만 아니면 아무것도 버려지지 않는다. 2~3일만 기다리면 달게 먹을 수 있는 침시가 되거나, 50일 뒤 곶감이 된다. 모두 맛있게 먹을 거다. 맛있는 감이 될 가능성이 있다.
병에 걸리고,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과 여전히 할 수 있는 걸 한참 줄 세우다보면 너무 많은 길이 막힌 것 같아 답답해질 때가 있다. 사소하게 출발한 그 답답함은 자라서 두려움이 된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안 되면 어떡하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잔뜩 웅크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주저앉도록 배우지 않았다. 어느 감이든 버리지 않는 법을 배웠지, 감을 포기하게 내게 가르친 사람은 없었다. 씁쓸하고 쓸쓸해도 내일모레는 단감이 된 떫은 감을 먹고 이번 겨울에는 곶감을 먹으며 또 한 계절이 지나가는 것. 내가 배운, ‘감껍질처럼 이어지는 삶’이다.
신채윤 고1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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