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카(1892~1982)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끝이 없는 대화”라고 했다. 너무 유명한 말이라 진부하게 들릴 정도지만 여전히 함의가 크다. ‘대화’의 주요한 목적은 ‘역사에서 교훈 찾기’일 테다. 한 집단이 당면한 문제의 해법 찾기에서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 한 세대 뒤의 영국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87)은 역사와의 대화를 국가나 집단이 아닌 개인의 삶과 인류의 운명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확장한다. 1994년에 쓴 <인간의 내밀한 역사>(김태우 옮김, 어크로스 펴냄)는 그 대표작 중 하나다. 국내에는 1999년 첫 번역본이 나왔으나 2005년 절판됐다가 이번에 복간됐다. 젤딘은 이 책에서도 역사적 사례를 통해 개인의 삶의 태도와 관계맺기의 지혜를 구하고 제언한다. 학계에서 비교적 최근 흐름인 미시사·생활사·풍속사에서 더 나아가, 사실(史實)에 근거한 지적 에세이 또는 명상록으로 읽히는 이유다.
책의 구성부터 독특하다. 새로운 만남, 고독에 대한 면역력, 섹스보다 조리법, 권력보다 존경심, 공포 회피의 역설, 호기심과 자유, 도피의 기술과 한계, 관용을 넘어선 이해, 남녀 간 우정 등 25가지 주제로 짜였다. 각 장은 주제의 사례에 걸맞은 18개국 출신 여성들과의 인터뷰로 연다. 가정부, 순경, 간호사, 세무조사관, 의사, 화가, 실업자와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이웃들이다.
17살에 의류공장에 들어와 스물아홉이 된 니나는 “칙칙한 공장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달리 갈 데가 없어 꾹 참고” 버틴다. “나는 평범하며 아무런 야심도 없다”고 말하고는, 그런 자신을 혐오한다. 잔뜩 위축됐고 “실패가 두렵다”. 여기서 지은이는 바이킹족의 용맹, 불운의 악마 탓, 가톨릭교회의 ‘연옥’ 교리, 종교개혁 같은 역사적 사건도 실은 두려움(공포)에서 비롯했다고 짚는다. 이어, 인체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에 대한 연구 결과 “공포와 호기심의 뿌리가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한결같이 용감한 사람은 없는 만큼, 영원한 소심함에 갇혀 지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남녀 간 우정이 드물고 어려운 것도 “섹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의 우정을 위한 준비가 부족하고, 우정에 바탕을 둔 ‘우애결혼’은 질투의 바람이 슬쩍 불어도 쉽게 무너진다. 지은이는 남녀의 ‘평등’과 ‘차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음 단계의 새로운 종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젤딘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세계 행복 보고서’ 조사 결과를 인용해, “한국 사람들은 ‘삶의 중요한 여러 결정을 내릴 자유’가 부족한 상황을 특히 염려하고 있다”며 ‘… 자유’를 책의 부제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 복간본을 낸 출판사는 ‘과거와의 대화는 어떻게 현재의 삶을 확장하는가’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결국 둘은 같은 말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
백낙청·임형택·정승철·최경봉 지음, 창비 펴냄, 1만6천원
문학평론가와 국어학자 네 명이 19세기 말 ‘근대 전환기’ 이후 현재까지 우리말글의 변화를 격랑의 한반도 역사와 사회변동의 맥락 속에 살펴본 좌담집. 한국어의 기원과 발자취, 근대적 어문 생활의 시작, 해방 이후 말글 규범화의 명암을 두루 짚고 우리말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페미니즘의 투쟁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이영주·김현지 옮김, 갈무리 펴냄, 2만9천원
‘가사노동의 임금화’를 주창한 이탈리아의 정치법학자이자 페미니스트가 1970~2010년대 쓴 28편을 추린 ‘한국판’ 특별 선집. 돌봄노동의 본질, 자본주의 재생산의 명암, 여성의 몸과 의학, 신자유주의의 자연 착취, 대안농업과 식량주권 등 방대한 주제를 논한다.
기후변화로 보는 지구의 역사
미즈노 카즈하루 지음, 백지은 옮김, 문학사상 펴냄, 1만4500원
일본 지리학자가 지구의 장구한 기후변화 흐름을 조망하고 인류와 자연의 바람직한 공생을 탐색한다. 1억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의 형성, 1만 년 전 최종 빙하기 이후 현재까지 간빙기, 1천 년 전부터 한랭화, 근대 100년 새 온난화와 식생 변화, 최근 10년간 이상기후까지 아울렀다.
카운트다운 1945
크리스 월리스·미치 와이스 지음, 이재황 옮김, 책과함께 펴냄, 2만2천원
1945년 4월12일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승계했다. 그해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미국 언론인 2명이 숨 가빴던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당시 미국 최고 지휘부, 폭격기 승무원 등의 눈으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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