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페이스북 열혈 이용자였다. 일 때문에 시작한 ‘페북질’이었지만 나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기획한답시고 얼마나 연재물을 뒤지고 잡지를 뒤지고 블로그를 뒤지고 책을 뒤졌던가. 페이스북은 신세계였다. 작가의 관심사, 일, 취향, 글투 등이 한눈에 쏙쏙 들어와 기획안쯤은 별일 아닌 듯 쓱쓱 쓰게 했으니 말이다. 그 덕에 작가 미팅도 한결 자연스러웠다.
출간이 뜸했던 표정훈 작가를 알게 돼 연락한 것도 페이스북에서였다. 드디어 표 작가를 만나기로 한 날, 기억에 따르면 그는 모자를 썼고, 국물 파스타를 주문했고, 가끔 이 근처 호텔에서 글 작업을 한다고 했다. 중간중간 자기 관심사를 풀어내는데, 장서가 2만 권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섬세하고 재치 있고 눈치도 빨랐다. “참, 제 생김새와 달리 그림을 좋아합니다. 특히 그림 속에 그려진 책, 저 책은 어떤 책일까 상상하는 게 취밉니다.” 순간 쾌재를 불렀다. 저자 고경태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애착과 나의 지향, 촉’이 왔다.
기획안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노라 약속하고 서둘러 헤어졌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잘 풀리지 않았다. 출판평론가가 그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색했다. 책 이야기만 할까? 너무 뻔했다. 기획안을 엎고 다시 썼다. 그림 이야기 비중을 줄이고 책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되 저자의 생각과 이야기를 곁들여 에세이 형식으로 써보면? 그제야 조금 흥미로웠다. 차례까지 구성해놓으니 그럴듯해 보였다. 그건 나만의 착각. 일 좀 해본 이들이 우려를 쏟아냈다. “그분 글쓰기를 좀 아는데, 불가능할걸” “원고 받기 쉽지 않아” “글이 어렵던데” “그림 비용은?” 등등. 어쩐다. 이럴 땐 방법은 하나다. “샘플 원고 보고 판단하 시죠?”
저자에게 샘플 원고를 요청했다. “오 마이 갓.” 인물사전 같은 원고라니. 다시 요청했다. 또 “오 마이 갓”이었다. 내 수준에선 반은 무슨 얘긴지 모를, 고급 독자를 위한 인문서였다. 간곡히 다시 말씀드렸다. “전 그림도 잘 모르고 책도 잘 몰라요. 다만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요. 딱 저 같은 사람이 이 책의 타깃이에요. 한 꼭지당 한 가지 주제여야 하고, 아는 척하기 좋은 지식만 가려서 넣어주세요. 이왕이면 선생님 생각이 담긴 글로 마무리하면 좋겠고요.” 어쩌면 저자에겐 ‘격’ 떨어지는 글을 쓰란 말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아~ 인연은 이렇게 끝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세 번째 샘플 원고가 도착했다. 표정훈 작가는 힘을 빼고 써봤노라 했다. 원고는 어땠을까? 한마디로 “원더풀”이었다. 글은 마치 에세이인 듯 소설처럼 읽혔고 곳곳에 배어든 지식은 매혹적으로 흘러넘쳤다.
작가는 그림에 깃들어 있을 법한 이야기, 화가와 그림 속 인물이 나누었을 속 깊은 대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삶의 한 자락, 그 모든 비밀을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며 원고를 완성해갔다. 마감은 생각보다 빨랐다. 6년 만에 신작을 내는 출판평론가, 그림을 좋아해 예술서적을 뒤적이고 문학, 역사,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작가,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은 글쓰기. 주목받지 못할 거란 주변의 우려를 뒤로하고 2019년 봄 핫한 책으로 떠올랐다. 낭만적인 책 제목과 손에 착 감기는 만듦새도 한몫했다. 출간 뒤 바로 4대 온라인서점 메인을 장식했고, 며칠 뒤 바로 재쇄를 찍었으며, 인터뷰와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숱한 우려에 어퍼컷을 날렸으니까. 베스트셀러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저자를 발견하고, 기획에 각을 세우고, 저자와 밀당하며 한껏 물이 오를 때까지 기다려준 것. 삼박자가 맞았으니까. 오랜만에 본 기획의 맛이었다.
<font color="#008ABD">글·그림</font> 오혜영 전 한겨레출판 편집자<font size="2">*‘책의 일’은 출판업계 종사자들의 경험을 나누는 칼럼입니다.</fon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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