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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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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을 넘어 만리를 온 ‘노마만리’

등록 2022-07-19 14:46 수정 2022-07-20 01:28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내 손에 들어온 김사량의 양서각판 <노마만리>.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내 손에 들어온 김사량의 양서각판 <노마만리>.

2022년 5월 말 마정저수지의 빼어난 풍광에 매료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남 천안에 책방을 냈다. 책방 이름은 소설가 김사량의 항전기행문 <노마만리>에서 가져왔다.

김사량의 작품은 월·납북 작가들의 해금이 이뤄질 무렵인 1980년대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소개됐다. 해방 전 일본어로 소설을 썼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을 기억하는 일본의 지인들이 한국전쟁 중 숨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작품집을 냈고,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일본에서 발행된 김사량의 작품집을 통해 거꾸로 김사량이라는 문제적 작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김사량의 작품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이 바로 <노마만리>다. 일제 선전활동의 하나로 북지전선을 시찰하러 간 김사량이 복마전의 북경반점을 탈출해 독립운동 기지인 연안으로 가는 여정을 담았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에서 발간된 잡지 <신성>에 연재된 이 작품은 분단의 고착화로 원고 수급이 어려웠던 탓에 연재가 마무리되지 못했다.

우리에게 김사량의 <노마만리>는 1955년 평양의 국립출판사에서 간행한 ‘김사량 선집’에 실린 버전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책에는 <노마만리>가 1948년 평양의 양서각에서 처음 출간됐다고 기록돼 있다. 일부 연구자는 김사량의 사후에 발간된 국립출판사판 <노마만리>는 김일성 우상화의 표현을 추가하는 식의 개작이 있지 않았나 의심하기도 했다. 국내외 어느 도서관에도 양서각판 <노마만리>가 보관되지 않아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랬을 것이다. 남한에서야 잊힌 작가이니 책이 남아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데 북한에서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1950년대 후반 김사량이 대표하는 연안파에 대한 대숙청 이후 그의 작품 가치가 격하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마만리> 초판은 오랫동안 많은 연구자에게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환상 속의 책’이었다. 그런데 수년 전 이 책을 중국의 중고책 거래 사이트에서 만났다. 뒤표지와 판권지는 떨어져 나갔지만 표지의 <노마만리>라는 한자로 쓴 제목과 표제지의 양서각이라는 출판사 이름이 또렷했다. 표지 그림은 만리장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 손상된 책치고는 꽤 비싼 가격을 치렀다. 책이 바다를 건너 내 손에 들어왔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전문가들과 함께 책의 내용을 살펴봤고, 그간 연구자들이 어지럽게 이야기하던 추정이 근거 없었음이 이 책을 통해 확인됐다. 내가 책방 이름을 ‘노마만리’로 정한 데는 나만 가진 이 책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책방의 서가는 새 책보다는 오랫동안 수집한 낡고 오래된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발행된 지 100년을 훌쩍 넘긴 현채 번역의 <월남망국사>(1907년판)부터 1959년 발행된 피천득의 <금아시문선>까지, 문학과 비문학 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책방 문을 열고 한 달이 좀 넘고 보니 우려했던 대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좀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둔한 말이 만리를 간다”는 ‘노마만리’의 뜻처럼 꾸준하고 열심히 책방을 일구는 수밖에.

글·사진 한상언 영화사연구자, 도서수집가·책방 노마만리 대표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최근 충남 천안에 책방 노마만리를 연 영화사연구자 한상언의 고서 이야기를 4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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