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않은 곳에서 그림책을 만나고 반가웠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도서관의 성인 종합자료실이나 서점의 예술 분야 서가에서 자그마한 일반 단행본들 위에 길쭉하게 누운 얇은 책 한 권을 호기심에 뽑아든 독자의 얼굴을 그려보게 된다. 눈을 크게 떴을까? 가늘게 떴을까? 어느 쪽이든 놀라움, 의아함, 반가움, 그리움 같은 것이 눈가와 입가에 묻었으리라.
그러나 그림책을 펴내는 이로서는 외로움이 있다. 가구거리에는 가구가, 카페거리에는 카페가, 학원가에는 학원이, 먹자골목에는 음식점이 한데 모여 있지 않나. 그림책은 왜 어린이 자료실이나 유아 분야에만 모여 있을까. 그림책이 곧 어린이책일까.
집에 그림책이 있다면 꺼내어 뒤표지나 판권에 적힌 숫자를 유심히 보자. 책은 저마다 일련의 숫자를 가진다. 책과 친한 독자라면 ISBN은 익숙할 텐데, 국제표준도서번호로 국가-출판사-항목으로 이뤄진 책의 고유한 식별자를 말한다. ISBN 뒤에 붙은 다섯 자리 부가기호는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신이 지금 꺼내든 그림책의 부가기호가 ‘778××’일 거라고 절반쯤 장담할 수 있다. 왼쪽 첫자리 7은 아동을, 두 번째 7은 그림책/만화를, 가운데 8은 문학을 뜻한다. 시중에 유통되는 그림책의 과반이 아동문학으로 분류된다는 뜻이다.(나머지 절반의 대다수는 학습그림책이다.)
그러나 오후의소묘 그림책들의 부가기호는 대부분 ‘07650’으로, 앞의 0은 교양을, 뒤의 650은 KDC(한국십진분류법)에 따라 예술 분야 회화를 뜻한다. 만족스러운 분류는 아니지만 우리가 펴내는 그림책이 아동문학보다는 교양예술 쪽을 향한다는 표지겠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우리 책을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림책은 아동문학과 등치되지 않는다. 아동문학이나 동화는 대상 독자가 확실히 어린이를 향하고 그림 없이 글만으로도 완결 작품이 될 수 있지만,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이중주로 이뤄지며 글 없는 그림책도 가능하다. 이 경우에도 단순히 일러스트레이션 모음집이 아닌, 이야기를 지닌 하나의 독립 장르로서 예술이다.
2022년 4월 말 포털 사이트의 인물정보에는 ‘그림책작가’ 직업이 추가됐다. 그동안은 ‘동화작가’ ‘아동문학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표기된 터였다. 네이버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 “그림책작가 직업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있었던 점, 업계에서 그림책이 점점 더 독립적인 장르로 인정받고 있는 점”을 고려해 해당 직업을 신설한다고 밝혔다.
한 온라인서점에 그림책 분야를 신설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1년도 더 됐다. 서점마다 ‘100세 그림책’이라는 소분류가 있지만 그 대분류는 유아인 것을 아시는지. 그사이 성인 그림책 시리즈나 브랜드는 눈에 띄게 늘었고, 그림책작가는 점점 더 대상 독자를 한정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고 있다. 그 책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어디로 가고 있나.
예상치 못한 만남의 반가움을 전해 듣는 일도 무척 반갑지만, 우리 책들 곁에 친구가 많다면 더더욱 반갑고 든든하겠다.
글·사진 지우 오후의소묘 편집자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그림책, 그것도 어른을 위한 그림책을 전문으로 내는 1인 출판사 ‘오후의소묘’ 지우 편집자가 바통을 이어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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