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의 책방 노마만리는 3층 규모의 건물로 외벽을 파벽돌로 장식해 꽤 육중해 보인다. 여기에 100년을 훌쩍 넘긴 고서를 포함해 낡고 오래된 책을 다룬다. 그러다보니 책방이라는 앙증맞은 이름보다는 서점 혹은 서관이라는 고식의 이름이 더 적합해 보인다.
지금 이곳 1층 서가를 장식하는 책은 1960년대 이전에 발간된 오래된 영화책들이다. 2022년 8월 들어 ‘천안 문화도시 공간스위치 사업’의 하나로 책방에서 영화강좌를 시작했는데 이를 기념하며 서가의 책을 전부 영화 관련 책으로 바꾸었다. 그중에는 일제강점기 대표적 영화잡지인 <영화시대>의 1935년 9월호를 비롯해, 시인 임화가 장정한(책의 겉에 그림을 그린) 이종명의 영화소설 <유랑>(박문서관, 1928)과 안석영의 영화소설 <노래하는 시절>(광익서관, 1930) 등 희귀 영화자료가 다수 전시돼 있다(사진). 이들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이나 한국영상자료원에도 소장되지 않은, 국내에 한두 권 정도만 남은 귀중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서가에 진열된 책은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책방 손님이 고가의 자료를 구매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혹시라도 누가 사겠다고 나선다면 고민하겠지만 아직 판매할 마음이 없기에 거래가 성사될지 또한 의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팔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종종 박물관이나 도서관과 같은 공공기관에 책을 팔아 책방 운영비에 보태기도 한다. 국내 주요 박물관에서는 매년 자료 구입 공고를 내는데 그때 자료들이 거래된다.
모든 자료가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판매하려는 자료가 박물관에서 소장할 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책이 거래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경매회사가 주관하는 도서 경매를 통하는 것이다. 대표적 도서 경매 회사인 코베이는 온라인 거래 사이트를 운영하는데 대부분의 중고서점은 이를 통해 책을 취급한다. 고가 서적이나 문화재급 서적은 서울옥션이나 케이옥션과 같은 미술품 경매 회사도 다룬다.
내가 소장했다가 판매한 고가 서적 중 1895년에 발행된 존 번연의 <천로역정> 우리말 초판이 기억에 남는다. 캐나다 선교사 게일 부부가 번역하고 기산 김준근의 삽화가 담긴 이 책은, 어느 일본인 학자가 소장하던 것을 일본 고서점에서 사들여 가지고 있다가 심하게 손상된 부분을 수리해 서울옥션을 통해 판매했다. 우리 책 중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히는 이 책은, 입찰자들의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기대보다 못 미치는 가격에 팔렸다. 현재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억대를 넘어가는 비싼 책이다.
일본인 학자가 가지고 있던 <천로역정> 초판본을 잠시 내가 소장했던 것처럼, 지금 내가 가진 이 책들 역시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평생을 지니고 있기에는 과한 책이기도 하고 결국은 더 좋은 환경에서 보관해야 하는 귀중한 책이기에 그렇다. 내가 귀한 책을 소장하는 동안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은 수집가로서는 행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책방을 낸 가장 큰 이유는 이 귀한 책들을 다수의 사람과 함께 누리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글·사진 한상언 영화사연구자·도서수집가, 책방 노마만리 대표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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