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수집하다보면 특색 있는 장서(컬렉션)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재산과 시간을 투자하고 감식안을 키우기 위해 부단한 공부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 많은 수집가가 평생 온갖 노력을 기울여 자기 장서를 훌륭하게 갖추는 데 성공하지만 진정한 수집가라면 한발 더 나아가 오랫동안 애써 만든 장서가 수집가가 숨진 뒤에도 흩어지지 않게 보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가끔 보기 힘든 귀한 책들이 시장에 쏟아지듯 나올 때가 있다. 애지중지 책을 모았던 수집가가 갑작스럽게 숨져 수백, 수천만원의 가치를 지닌 책들이 버려지듯 폐지업자에 넘겨진 경우다. 대개 수집가는 가족도 모르게 귀한 책을 비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설야의 장편소설 <황혼>(영창서관, 1940), 백석이 번역한 <테스>(조광사, 1940),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박문서관, 1941)의 소장가 또한 그랬다. 중국 연변(옌볜)의 어느 시인은 해방 전부터 하나씩 희귀서를 사모았는데, 구순을 넘겨 살았던 그 시인이 죽자 장서 전체가 헌책방에 넘겨졌다.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가 나한테 몇 권 건너왔다.
얼마 전 고서수집가로 유명한 화봉문고의 여승구 회장이 86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수십만 권의 희귀서를 소장하신 분이 생전에 자신의 장서를 정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그 장서의 행방 또한 수집가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고서수집으로 일가를 이룬 여승구 회장도 그러했다니 평생 모은 장서를 정리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책과 자료를 구하는 게 낙이었던 사람이 장서를 기증하거나 판매해 정리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가슴 아픈 과정이기에 그렇다.
지금 열심히 책을 모으는 수집가라면 훗날 평생 모은 귀중한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그 장서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기관에 기증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크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함께 고생한 가족을 위해서라도 무상 기증하라는 이야기는 무책임하다. 가능하면 장서 전체를 매각하는 것이 좋지만 장서를 살 정도로 예산이 넉넉한 기관이 많지 않기에 쉽지 않다. 그렇다면 팔 수 있는 것은 시장에서 제값 받고 파는 게 최선이다.
귀중서가 늘고 장서 규모가 커지면서 매각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분류하는 식으로 내 장서의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2022년 10월부터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내가 제공한 해방 전후 발간되던 <대구일일신문> 서비스를 시작했다. 불과 십여 장이지만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은 해방 전후 대구, 경북 지역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외에 해방 직후 조선도서관협회 문서철과 1920~30년대 영화 전단 등 내가 제공한 귀중 자료는 2023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을 통해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디지털자료로 서비스될 것이다.
충남 천안의 책방 노마만리 3층 30평 공간은 작은 영화 전문 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의 연구실에는 수천 점의 북한 자료가 있다. 훗날 책방 노마만리는 이러한 자료를 아우르는 꽤 괜찮은 아카이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글·사진 한상언 영화사연구자, 책방 노마만리 대표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이번호로 한상언 책방 노마만리 대표의 책의 일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은 장동석 출판평론가가 연재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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