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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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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며 남겨놓은 책

고서 정리의 기술과 백암과의 인연
등록 2022-10-12 03:09 수정 2022-10-12 05:18

본격적으로 고서 수집 세계에 뛰어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고서수집가는 심각한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책을 보관할 장소는 하루가 다르게 비좁아지는데 갖고 싶은 책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내 장서를 어떤 주제와 성격에 맞게 정리해 특색 있게 만들지 결단해야 한다. 가능한 수집 범위를 한정해 나만의 색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기를 놓치면 훗날 낡은 책으로 가득한 헌책방처럼 특색 없고 밋밋한 장서로 남는 수가 있다.

고서를 수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장서의 성격과 범위를 내 전공에 맞게 영화 관련 자료와 1960년대 이전에 발간된 북한 책으로 한정했다. 북한 책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뒤 수십 년이 지나자 사회주의체제하에서 발행된 책이 제대로 보관되지 못해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북한 책이 중국이나 일본의 헌책방에 방치되듯 흩어져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국내외 헌책방을 뒤져 책을 사다보면 금전적 문제에 맞닥뜨린다. 어느 순간 구매만 하던 상황에서 애장하던 책을 판매하는 상황이 된다. 나는 북한 책을 수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내가 가진 책 중 귀중하지만 성격에 맞지 않는 책을 과감히 팔았다. 이때 정리한 책에는 수천만원의 고가에 판 책도 여럿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지질도> 전 19집 완질을 비롯해, 유명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판화가 실린 국문 <천로역정> 초판처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책과 동일한 책들도 있었다. 그런 희귀서들이 1950~1960년대 북한 책들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무렵 내가 소장하고 있다가 정리한 책 중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의 저작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한국통사>(상해 대동편집국, 1915)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해 유신사, 1920) 등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표 저작으로 국사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중요한 책이지만 국립중앙도서관 등 주요 국공립 아카이브에 보관되지 않은 백암의 중국 망명 시절에 발행한 희귀서다. 이 책을 비롯해 백암이 관여한 상해판 <독립신문> 등 백암 관련 자료는 경매회사와 박물관의 유물 구매 시기에 맞춰 대부분 매각했다. 단, 백암의 저작 중 국내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안중근>(상해 대동편집국, 1915·사진)만은 매각하지 않고 현재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도서수집가로 유명한 최철환 선생은 본인이 가지고 싶은 책은 한 번씩 다 손에 넣어봤는데, 그리 희귀하지 않은 안재홍의 <백두산등척기>(유성사서점, 1931)는 번번이 소장할 기회를 놓쳤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책도 인연이 있어서 귀한 책을 쉽게 만나기도 하지만 책을 소장할 기회를 얻지 못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유독 백암 선생의 책을 자주 만났고 그중 하나를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 평생 고서를 수집하던 분들도 쉽게 소장해보지 못한 책을 가까이 두는 영광을 가졌다. 이런 행운을 연거푸 겪었다는 면에서 나는 백암 선생의 책과 대단한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글·사진 한상언 영화사연구자·도서수집가, 책방 노마만리 대표

*책의 일-수집 편: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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