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내가 소장한 북한 서적을 모아 ‘평양책방’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서울도서관에서 열었다. ‘평양책방’ 전시를 보러 온 머리가 희끗한 북한학 연구자들이 복사본, 영인본으로만 봤던 책들의 실물을 보고 감개무량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이전 북한 책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보기 힘들었다. 분단 이후 정보기관이 수집한 북한 자료는 쉽게 폐기됐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수집해 연구자에게 제공하는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1988년 월·납북 작가와 예술인에 대한 해금을 조치하고 그 후속 작업으로 1989년 통일부 북한자료실이 만들어졌지만 1970년대 이전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이전 북한 자료 중 북한학 연구자가 볼 수 있는 자료는 한국전쟁 중 미군이 노획한 것들이다. 다수 다종의 이 자료는 해방 직후 북한 연구에 귀중한 자산이 됐다. 반면 1950~1960년대 북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보관한 아카이브가 없기에 그 시기 북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2008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계열 국문학자 김학렬 선생이 평생 수집한 북한 자료를 서울대에 기증해 만들어진 ‘김학렬 문고’ 등이 그 시기 북한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최근에는 통일부 북한자료실이 1970년대 이전 자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해 꽤 많은 자료를 확보했다. 이 자료는 그간 미진했던 1970년대 이전 북한학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이다.
북한 책을 모으다보니 남들이 소장하지 못한 귀중한 책을 다수 수집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 책들이 쌓여 특색 있는 장서를 만들었다. 내가 충남 천안에 연 책방의 이름이기도 한 김사량의 <노마만리>(양서각, 1948) 초판처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책도 있고, 남조선노동당 계열 숙청의 여파로 아예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조국의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하여>(국립출판사, 1951)라는 이태준의 빈 행적을 채워준 기행문집도 있다. 국내외 아카이브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천 점의 희귀 자료는 경기도 남양주의 한상언영화연구소를 예약방문(didas@naver.com)하면 열람할 수 있다.
희귀한 책을 소장하는 것이 장서가의 자부심이라면 그것을 남들과 나누는 일은 장서가의 보람이다. 개인 장서가로 1960년대 이전 북한에서 발행된 희귀 자료를 관련 연구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연구자가 많아지고 분야도 다양해졌다. 이 중 북한에서 임화가 썼다는 <조선문학사>의 존재를 묻는 이가 여럿이다. 남로당계 핵심 인물로 1953년 사형을 언도받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가 숙청당하기 전 발간한 이 책은, 실물은커녕 그 내용의 일단이라도 알려진 것이 없기에 북한문학 연구자뿐만 아니라 임화에게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궁금해한다.
언제부터인가 임화가 쓴 <조선문학사>가 어딘가에 있다면 그건 아마 내가 소장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마치 대어를 기다리는 낚시꾼의 마음으로 지금도 전세계에 흩어진 북한 책들을 찾아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은 기대하지 않은 순간 나타날 수도 있다. 뜻밖의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고서 수집가의 즐거운 고행일지 모른다.
글·사진 한상언 영화사연구자, 책방 노마만리 대표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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