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29일~2019년 10월14일. 본명 최진리, 우리에게는 ‘설리’로 알려져 있던 여성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05년 아역배우로 연예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9년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f(x)) 멤버로 데뷔하며 스타가 되었고 2015년 f(x)를 탈퇴한 뒤에는 연기와 예능 활동을 병행해왔다. 10대의 대부분과 20대 전부를 대중 앞에 서는 연예인으로 살았던 설리는 최근 몇 년간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세상과 부딪히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디어 속 그의 연관검색어는 언제나 ‘논란’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네티즌 시선은 곱지 않다, 안타까운 시선…”</font></font>
한국 사회에서 여성 연예인, 특히 아이돌에게 허락되는 인간형은 정해져 있다. 젊고 아름답고 재능 있되 죽도록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상냥한 웃음을 잃지 않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이웃집 소녀처럼 친근한 ‘호감형’이어야 한다. 언제나 성애화 대상이 되지만 순결하고 무해하고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욕망을 드러내면 비난받는다. 여성 연예인의 몸은 모든 순간 관음 혹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설리가 열일곱 살 미성년자였을 때 올라온 포토뉴스의 제목은 “f(x) 막내 설리의 수줍은 앞-뒤태!”였고, 불과 한 달 전 기사의 제목 역시 “설리의 당당한 노출 속 옥에 티”였다. 그가 나이 차 많은 남성 뮤지션과 교제하던 시기에 언론은 앞다투어 성적 암시를 담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여성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사소한 언행마다 ‘논란’으로 만들며 “이를 바라보는 네티즌의 시선은 곱지 않다”거나 “이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에 대중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짐짓 걱정하는 척하는 연예 기자들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설리는 좋은 표적이었다. 지난 5월 그는 함께 작품에 출연한 이성민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성민씨’라고 적었다. 이는 “설리, 26살 차 선배에 ‘성민씨’ 호칭 논란”이라는 기사로 만들어졌다.
미디어의 논란 재생산은 SNS에서 직접적인 공격과 서로 꼬리를 물며 확대되었다. 2016년 설리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겉옷을 입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1만 개 넘게 달린 댓글 대부분에는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을 호되게 후려쳐 ‘교정’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비정상” “더럽다” “예의가 없다” “(이 사진이) 성추행이다” 등 역시 실체 없는 ‘우리 정서’라는 말 뒤에 숨은 악의가 화살처럼 쏟아졌다. 3년이 흐른 뒤 JTBC 에 출연한 설리는 “제가 처음에 노브라 사진을 올리고 너무 여러 말들이 많았어요. 그때 제가 무서워하고 숨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의 노브라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틀을 깨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거 생각보다 별거 아니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자신을 향한 루머와 억측, 증오를 오랫동안 견뎌온 그는 “예전에는 사람을 피해서 골목으로만 다니기도 했어요”라고 털어놓을 때조차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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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가 5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인용문에는 “가시밭길이더라도 자주적 사고를 하는 이의 길을 가십시오. 비판과 논란에 맞서서 당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별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것보다 순종이라는 오명에 무릎 꿇는 것을 더 두려워하십시오”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가시밭길을 선택했고, ‘별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것을 감수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해서 고통과 고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설리가 최근 올린 인스타그램 사진에도 노브라를 언급하는 성희롱 댓글이 달렸다. 그가 진행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 대해 언론은 ‘가슴 노출’에 집중했고 “노브라는 자유지만 노출까지 자유일까”라며 비난의 판을 깔기도 했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는 설리가 편안한 차림으로 누워서 진행한 방송의 아주 짧은 순간만을 편집해 “취한 듯한 설리…아찔한 옷차림으로 살짝 노출하는 인스타 라이브”라는 제목을 단 게시물이 올라왔다. 그의 삶은 매 순간 왜곡되었고 모욕당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설리만이 겪어온 고통일까.
한국은 남성 방송인이 지상파에서 화장실을 가리켜 “몰래 봐야 하는 곳”이라 해도 넘어갈 수 있고 가사에서 여성을 ‘걸레’라 표현했던 남성 아이돌 역시 예능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지만, 여성 아이돌은 만 읽어도 악플과 ‘페미니스트 논란’이라는 기사의 타깃이 되는 사회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했던 수지를 겨냥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사형 청원’이 올라왔고, 데이트폭력 피해자인 구하라에게도 모욕적인 댓글이 쏟아졌다. 21년 전 핑클 멤버로 데뷔했던 성유리는 JTBC 에서 “나는 욕먹지 않으려고 20년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은 여성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집단 스포츠가 된 사회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여성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 찰나의 표정까지 집요하게 추적하고 퍼나르는 것으로 조회 수를 늘리는 언론의 윤리의식 부재와 여기에 무뎌진 채 즐기는 대중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으면 이런 일은 끝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에서 숨 쉬듯 여성혐오 댓글을 달 수 있고, ‘추천순’ 같은 장치로 혐오발언을 ‘1등’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시스템을 그대로 두면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혐오표현 금지를 법으로 제정해 한 번의 거름망이라도 더 만들지 않으면 세상이 그냥 나아질 리 없다.
3년 전, 설리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설리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성을 높은 기준과 좁은 틀에 맞추고, 그로부터 벗어나면 거세게 공격해 밥줄을 끊어놓고 싶어 하는 사회적 억압이 부당하고 편협하며 반페미니즘적이라는 것만은 명백하다. 그리고 설리는 그것들에 개의치 않으면서, 혹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예상치 못한 균열을 일으켰다.” 한국 사회, 미디어, ‘대중’과 불화하는 이 여성이 자신을 지키면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했다. “설리는 지금 자신의 인생을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한국이라는 세상에 맞서게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태연하게 사는 게 투쟁이었던 25년</font></font>
어느 쪽이 지쳐 떨어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는 누구도 쉽게 끌어내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세상에 없다. 그가 살았을 25년의 시간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늦었음에도 계속 말해야 한다. 우리는 여성을 덜 미워해야 하고, 여성에게 더 관대해져야 한다. 여성을 쉽게 비난하도록 만드는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산업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언론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는 어떤 여성도 함부로 끌어내려져선 안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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