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오늘도 익명의 303호, 407호 신세

그냥저냥 아는 얼굴이 주는 안정감이 사라진 ‘우리 동네’
등록 2019-06-28 10:57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우울할 때면 ‘갤러리 김 과장’과 동네 할머니의 ‘티키타카 대화’를 본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여러 동네를 돌며 즉석 퀴즈를 내는 tvN 의 ‘레전드’ 영상이다. 서울 삼청동 골목이다. 왼쪽 담으론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있다. 골목은 유재석, 조세호, 지나가다 만난 김 과장이 쪼그려 앉으면 꽉 찬다. 오른쪽으론 낡은 단층집들이 늘어섰다. 그 단층집에 할머니가 산다. 김 과장과는 오다가다 알게 된 말동무 사이다. “무서운” 할머니란다. 할머니는 김 과장을 “웬수댕이”라 부른다. 할머니가 집 앞에서 왜 퀴즈를 푸냐고 투덜거리나 싶다가 집 지켜줘 고맙다는 반전 멘트와 함께 떡을 이쑤시개로 찍어 한 사람씩 돌린다. 할머니가 “안 줘” 했더니 김 과장은 “주지 마”라고 받아쳤다. 떡은 어느새 김 과장 손에 들려 있다. 미국 사는 딸이 왔네, 동네 은행에서 주는 떡인데 맛있네 어쩌네 하다보면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없는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대충, 오래 자주 본 사이가 주는 온기가 있다.

웬수댕이 과장님과 무서운 할머니가 있는 골목

의 주인공은 골목이다. 서울 연희동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면 이 동네에서 16년 장사한 샤넬미용실이 있다. 그 동네에서 30~40년 산 할머니들이 와서 “그냥 곱슬곱슬” 파마하는 집이다. 틀니 안 끼고 와도 된다. 겨울엔 미끄러져서라도 오는 길이다. 미용실 안엔 파마를 마는 로트 꾸러미와 회청색 선풍기가 있다. 한쪽에선 퀴즈를 맞히네 마네 하는데 다른 구석에선 분홍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할머니가 졸고 있다. 흰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고 실금이 간 단층집들이 늘어선 길 앞에서 한 할머니가 공터에 물을 준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자꾸 버려 꽃을 심었단다. “우리 동네가 제일 좋다. 아침에 일어나면 꽃이 웃어준다.” 할머니 말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서울이나 그 근처에서 40년 넘게 살았는데 ‘우리 동네’를 가져본 적이 없다. 정 붙일 새가 없었다. 어린 시절엔 전셋값에 쫓겨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이삿짐을 옮긴 첫날엔 이삿짐을 쌌던 신문지 냄새가 났다. 이곳도 곧 떠나게 될 거라고 환기하는 냄새다. 회사 다닐 때는 근처 7평 오피스텔에서 살았다. 15층 한 동짜리 건물인데 대로변이라 안전하다는 이유로 월세가 비쌌다. 월급의 3분의 1은 주인 통장으로 직행했다. 그 돈을 내며 오래 살 형편은 못 됐다.

그 오피스텔에 살던 2년 동안 옆집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존재는 텔레비전 소리로 알았다. 그는 저녁 뉴스 전 일일드라마 애청자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는데 내용은 다 뀄다. 오늘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텐데.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철문을 닫으면 사라지는 익명의 303호나 407호, 1807호, 도시 메뚜기였다.

서울 근교 신도시는 어딜 가든 비슷하다. 개성이 사라진 자리는 계급이 메꿨다. 다른 건 아파트 브랜드뿐이다. 최근 경기도 신도시로 이사한 엄마는 칠십 평생 처음 살아보는 새로 지은 집이라며 자랑했다. 과연 터치만 하면 불이 들어왔다. 왜 굳이 터치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집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리 눌러놓을 수도 있다. 우연한 만남을 최소화하도록 설계한 집이다. 25층 고층 아파트로 한 동에만 500가구 넘게 사는데 사람을 보기 힘들다. 집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먼저 눌러 기다리다 바로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다음 자기 차로 근처 대형마트에 간다. 주말마다 쇼핑몰 앞에 차들이 길게 늘어섰다. 누굴 만날 일이 없다. 걸을 필요가 없고 걷고 싶지도 않은 동네다. 커튼을 열면 크레인이 보인다. 개발 중이라 건물이 계속 올라간다. 4차선 도로 이쪽은 대형 아파트들이 들어선 신도시이고 저쪽은 구도심이다. 4차선 도로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가른다.

우연한 만남도 어려운 고층 아파트

유현준 건축가가 쓴 를 보면 대규모 고층 아파트는 소통을 삼킨다. 로버트 거트만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1·2층 저층 주거지 사람들이 고층에 사는 사람보다 친구가 세 배 많고 공동체 소속감을 더 느낀다고 설명했다. 엘리베이터로 층간 이동을 하면 우연한 만남의 여지가 줄고 소통이 단절된다. 자기 공간 하나 마련하려면 등골이 빠져야 하는데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줄었다. 골목이 사라졌다. 그는 여기 이곳의 삶을 연병장 막사를 닮은 학교를 졸업해 비슷한 고층 아파트에 살다 비슷한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으로 요약했다. 기를 쓰고 살면 그 정도라 하겠다. 건물이나 도로나 너무 크면 정을 붙일 수 없다. 사람 몸에 580배인 학교 건물은 ‘시설’이 된다. 3차선 넘는 길은 이쪽과 저쪽을 가른다. 대로가 쭉쭉 뻗은 강남 테헤란로가 아니라 꼬불꼬불한 삼청동길을 사람들이 산책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변화를 갈망하도록 프로그램화돼 있는데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줄어드니 변화의 열망은 쇼핑몰, 영화관에서 푼다.

그냥저냥 아는 얼굴, 하나 마나 한 인사말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혼자 사니 이웃이 친구만큼 절실하다. 서울에서 경기도 고양 일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은 밤 11시께 가장 붐빈다. 다들 아침에 서울로 갔다 밤에 돌아온다. 꼬박 서서 오다보면 신영복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칼잠 자야 하는 감옥에서 가장 괴로운 계절은 여름이라고, 체온 탓에 사람이 미워지기 때문이라고 썼다. 지하철은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공간이다. 집에 돌아와 철문을 닫으면 몇백 명과 2년을 함께 산 이 아파트에서 내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막막해진다. “무서운” 할머니와 “웬수댕이” 김 과장의 ‘티키타카’ 대화를 들을 시간이다.

아주머니가 살짝 웃어줬다

이 생에선 마당 있는 집에 살 수 없을 거다. 매달 나오는 관리비만큼 예상 가능한 일이다. 서울 멀리 떠나선 밥 벌어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서울 근처에선 내 묏자리만 한 땅도 사기 어렵다. 다행인지 내가 사는 25년 된 아파트는 복도식이라 문을 열면 우연히 옆집 사람들과 마주칠 확률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보다 높다. 집 앞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 들어오는데 옆옆집 파마머리 50대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복도는 길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인사를 해볼까 하다가도 이상한 여자같이 보일까 엄두가 안 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아주머니가 살짝 웃어줬다. “안녕하세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