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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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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함에 욕망을 붙드는 걸까

큰 불만 없이 잘 살던 아파트가 비교되던 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다
등록 2019-02-16 16:47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이번 생엔 21세기에 지은 집에 살 수 없을 거 같다. 지금 통장 잔고를 그대로 두고 다음 생에서 이어 저축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25년 된 아파트에 큰 불만은 없었다. 20평이지만 내가 청소하기엔 너무 크다. 똥도 잘 내려가고 뜨거운 물도 잘 나온다. 초고층은 정이 안 붙었다. 물론 정이 붙어도 별수는 없다. 1층이라 땅에 가깝고 편의점 가기도 좋다. 요가학원에서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이 정도면 고맙다’ 그랬다.

길 하나 사이로 계급이 갈리고

요가학원은 길 건너 주상복합건물 제너시스 2층에 있다. 경기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비싼 곳이다. ‘발코니도 없는 집에서 답답해 어떻게 사나’ 그 육중한 고층 건물을 보고 시큰둥했더랬다. 매트에 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옆에 있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제너시스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보내기 싫단다.

“여기 부모들 등쌀 때문에 그래요. 주변 유치원들도 난리예요. 부모들이 제너시스 애들만 따로 반을 만들어달라고 하니까요. 다른 단지 애들 끼는 거 싫다고. 저도 제너시스 살지만, (그들과) 어울리는 게 싫어요.” 성질이 나 같이 신나게 욕했다. “그래서 다른 학교를 알아봤는데 아는 사람이 거기로 보내지 말라더라고요. 빌라 애들이 온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죠. 여기 학교 보내야죠.” 이유는 “(가난한) 부모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 애들이 거칠다”는 것이었다. 부모가 관심을 가져 애들이 ‘또라이’ 되는 건 괜찮고? 제너시스 부모 욕한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길 하나 사이에 두고도 계급이 갈렸다.

더 웃긴 건 내 마음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제너시스 사람들이 이 동네 제일 싼 아파트에 사는 나를 어떻게 볼까’ 의혹이 용솟음쳤다. 분노가 따라붙었다. 경멸 어린 저주를 퍼부으며 내가 한 짓은, 집값 검색이었다. ‘2억은 더 있어야 제너시스로 이사 갈 수 있겠구나.’ 내 안에 외계 생명체 같은 욕망과 결핍이 자라났다.

친구는 비둘기를 싫어한다. 똥을 많이 싸기 때문이다. 친구가 집을 알아보는데, 길 하나를 두고 브랜드 아파트가 3억~4억원이 더 비쌌다. 거긴 비둘기가 모이는데도 그랬다. 왜 비싸냐고 물으니 중개업자가 말했다. “사는 사람들이 달라요.” 친구는 그 부동산에 다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비둘기가 모이지 않고 더 싼 아파트를 택했다.

그런데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타인 같은 자신을 발견했다. 초등학교가 둘 있는데, 브랜드 아파트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데가 ‘좋은 초등’으로 이름이 났다. 왜 좋은지는 모를 일이다. 친구 딸이 이 학교에 배정받았다. “정말 이상해. 그 ‘좋은 초등’ 다닌다고 할 때마다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어.”

내가 낯선 욕망의 숙주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관리라면 내 관리도 안 되기 때문에 부장 따위는 공짜로 줘도 싫다고 믿는데, 막상 다른 사람이 부장이 되면 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 성질을 부린다. 이 분노와 결핍은 누구 것일까?

기억하는 사람 거의 없는 조교수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는 포털 인물검색에 나올 것 같은 설명으로 시작한다. 윌리엄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으로 손마디가 굵었다. 가업을 이으려 농과대에 입학했다 영문학 강의를 듣고 진로를 바꿨다. 그 강의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4행의 짧은 시)를 만났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은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윌리엄 스토너는 지독히 평범해서 특별하다.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거쳐 가는데도 이 삶엔 충격적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사소한 오해로 등진 동료의 악의를 그만의 ‘고구마’ 방식, 관조로 견딘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병명은 사망 원인 1, 2위를 다투는 암이다. 66년 인생을 따라가는 이 소설을 읽다 가장 많이 맞닥뜨리는 낱말은 ‘슬픔’과 ‘상실감’, ‘연민’이다. 그는 묵묵히, 자기 방식으로 시를 사랑했고 살았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죽어가며 그는 자기에게 세 번 묻는다. 첫 번째 물었을 때, 남들 눈엔 실패작으로 보일 자기 삶을 관조한다.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두 번째 물었을 때, 그는 빛을 느낀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리고 그것들이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진짜 나는 30대 어딘가에 있고 가죽만 10여 년 시간을 건너 어리둥절 여기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살다 죽는 건가 생각하면 허망하다. 그 허망함에서 고개 돌리고 싶어 확실한 욕망을 붙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남의 것일지라도. ‘중요한 건 어떤 인생이냐가 아니라 자기 인생이냐인데…’라고 쓰면서도, 나는 ‘외풍 탓에 손가락이 시렵네. 제너시스는 안 그렇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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