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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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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지겠지, 오늘은 아니지

나를 사랑하는 것이란
등록 2019-07-11 11:06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김금희의 소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All the underdogs in the world, A day may come when we lose. But it is not today. Today we fight.(세상의 모든 뱁새들아, 언젠가 우리가 지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오늘 우리는 싸운다.) 언젠가 꽃은 지겠지. 그때가 오늘은 아니지.”(방탄소년단 )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방탄소년단 멤버 7명을 잘 구별도 못했는데 이제 이 노래를 들어야 일어난다. ‘이렇게 똥만 싸다 죽는 거야?’ 그러다가도 ‘방탄 가라사대, 오늘은 살자’를 되뇐다. 일곱 청년들은 자기혐오에 허우적거리는 개털 중년 여자를 침대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아멘.

자기로, 함께 성장한 7명 ‘BTS’

내게 방탄소년단은 영화로 치면 시리즈다. 외형은 액션 블록버스터 스파이물인데 마티니잔을 든 슈트빨 주인공 대신 ‘대체 나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요원’ 제이슨 본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자신을 만들어낸 미국 정보국과 맞짱을 뜬다. 압도적인 액션으로 홀려놓고 깊숙한 질문을 던진다. ‘아이돌’ 방탄은 ‘자신을 사랑하라’는 주문으로 뱁새들을 무장시킨다. 자본주의 문화상품 취급당하는 ‘아이돌’의 이름을 달고 그 이름을 뒤집는다. 자기를 지키는 건 뱁새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인지도 모르겠다. 데뷔 때부터 “얌마, 니 꿈은 뭐니”()라고 묻더니 “더는 남의 꿈에 갇혀 살지 마”()라고 주문했다. “알바 가면 열정페이, 학교 가면 선생님, 상사들은 행패. 이건 정상이 아니야. 우린 뱁새야 같이 살자고.”() 압도적인 칼군무와 에너지에 홀렸다 정신을 차리면 방탄이 던지는 질문에 고민하게 된다. 나를 사랑한다는 게 뭐지?

판타지가 실현된다는 희망이 없다면…

방탄이 그 질문의 탐색 과정을 노래로만 들려줬다면 내가 방탄교 집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방탄 동영상을 보며 나도 모르게 실실 웃게 되는 까닭은 이들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로, 함께, 성장하는 그런 꿈같은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걸 말이다. 판이하게 다른 7명은 대체 불가능하고 그 안엔 순위가 없다. 팬들이 브이로그(자신의 일상을 찍은 동영상 콘텐츠) 등에 나온 멤버들 간 ‘케미’를 따로 편집해 퍼나르며 확인하는 건 ‘병맛’ 개그로 웃고 떠드는 사이 멤버들끼리 주고받는 정과 신뢰다.
“웃기는 조합이죠. 완벽한 사람이 없고 다들 약점이 있어요. 오히려 저희한텐 그게 득이었던 거 같아요. 원톱이 없었다는 거, 싸우면서 대화해서 풀고 이런 것들이 잘 이뤄졌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던 거 같아요.”(RM) 그가 기억하는 동갑내기 제이홉의 첫 모습은 웅크린 회색 패딩 등짝이다. 이 회색 패딩이 일어나 춤을 췄을 때 RM은 “반했다”고 했다. 광주에서 춤꾼으로 날렸던 제이홉은 처음에 랩 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제이홉 곁에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실력을 닦아온 RM과 슈가가 있었다. 방탄의 ‘못 말리는 희망’ 아이콘이 된 제이홉은 데뷔 5년 만인 지난해 자기가 쓴 랩을 모아 《홉월드》 믹스테이프를 냈다. 이 동갑내기 사이엔 존중이 있다. 15살에 팀에 합류해 사춘기를 학교가 아니라 연습실에 보낸 ‘황금막내’ 전정국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팬들은 봤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것도 없던 열다섯의 나. 세상은 참 컸어. 너무 작은 나…. 형들이 있어. 감정이 생겼어. 나 내가 됐어. 형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보다 아파.”() 방탄 7명의 작은 세상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이 보여준, 지하와 지상이 갈린 현실 세계와 반대 지점에 서 있다.
“믿는 게 아냐 버텨보는 거야. …저기 저 꽃잎들처럼 날갤 단 것처럼은 안 돼. 그래도 손 뻗고 싶어.”() 차라리 남을 믿지, ‘꼬라지’ 뻔히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믿는 건 불안한 일이다. 그 믿음이 거저 생기지 않는다. 잘생겨서 캐스팅된 맏형 진은 “제이홉처럼 춤춘다 생각했는데 모니터링해보면 진이 추고 있었다”면서 결국 악명 높은 방탄 안무를 소화했다. 지민은 목소리가 갈라진 날엔 무대에서 내려와 운다. “세상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고 “나의 모든 기쁨이자 시름”()이니까. 이 청년들의 불안은 오로지 그들 몫이었다. 13살 때부터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슈가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교통사고가 나 어깨를 다쳤다. “포기하고 싶은 적이 있죠.” 제이홉의 꿈을 지원하려 어머니는 타지로 일을 나갔다.() 데뷔한 뒤엔 “아이돌이면 힙합 포기한 거 아닌가? 방탄 가사가 랩이냐?” 따위 조롱을 들었다. ‘흙수저’ 청년들은 서로 희망이 되어 “나는 항상 나였기에 손가락질해.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네”()라며 ‘얼쑤’ 추임새를 넣는 어른으로 자랐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판타지’에 마음과 돈을 털린다고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동화가 지금 여기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 또는 환상마저 없다면, 나는 계급이 냄새로도 구별되는 ‘기생충’의 세상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영영 사라지고 싶은 날 문을 하나 만들자 너의 맘속에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곳이 기다릴 거야.”() 한 ‘아미’(방탄소년단 팬)는 이 노래 동영상에 이런 댓글을 영어로 달았다. “나를 믿을 수 없었어. 어느 날 기차를 탔는데 뛰어내리고 싶었어. 이 노래가 나를 구했어.” 이 댓글에 3만여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별처럼 다 우린 빛나

자기를 사랑하라는 주문이 진부한가? 모멸 속에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두렵더라도 타인의 기준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엔 전복의 기운이 배어 있다. 김금희 작가가 쓴 소설 에서 미싱 회사에 다니는 경애는 베트남 지사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되레 좌천된다. “경애는 다시는 자신을 방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고통 속에 떠내려가도록 놓아두지 않겠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경애는 회사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인다. 다들 제 할 일 바빠 보인다. 그래도 경애가 화장실에 갈 때 팻말을 맡아주는 커피숍 주인이 있고, 퇴근길에 차로 태워다주는 동료가 있다. “사람들의 불빛들. 모두 소중한 하나. 어두운 밤 외로워 마. 별처럼 다 우린 빛나. 사라지지 마 큰 존재니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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