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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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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사랑하고 말겠다

오래 수치스러웠던 내 몸, 타인의 언어로 나를 정의하지 않으리
등록 2019-11-21 10:50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한 술자리가 잊히지 않는다. 7년 지났는데도 생생하다. 회사 앞 통닭집이었다. 네 명이 맥주를 퍼마셨다. 그때 한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야, 네 얼굴 완전 귤껍질이네.” 내 여드름을 보고 한 말이었다. 마음속 저글링이 시작됐다. 공 다섯 개쯤 동시에 돌리는 작업이다. 정색하면 분위기 깬다. 우아하게 대처해야 한다. 얼굴 굳히면 내가 그의 지적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뜻이 된다. 그때 내 몸이 술자리 안줏거리가 된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니라 노가리 말이다. 그 발언엔 우월감도 드러난다. 타인에 대한 모욕 뒤엔 자기 위치를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내 몸은 그런 욕망을 충족해주는 도구가 된 듯했다. 이런 감정의 회오리 속에 저글링 공을 돌리는 건 노동이다. 내 표정은 아마도 웃는 듯 우는 듯 화난 듯 즐거운 듯 못 들은 듯 아리송했을 거다.

“넌 가슴이 없냐?”

내 몸이 오래 수치스러웠다. 이거 인정하는 데도 오래 걸렸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10년 전 친구가 “넌 가슴이 없냐?” 했던 말을 들은 순간은 4D로 재생된다. 아닌 척했지만 내 몸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 내 정체성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내가 피해자이기만 한가?

고등학교 때 ‘화생방’이라고 불리는 애가 있었다. 입냄새가 난다고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데 진짜인지는 모른다. 아무도 그 애랑 말을 섞지 않았다. 그 애를 바라보던 내 마음속을 뒤져보면 연민 뒤에 안도감이 도사리고 있다. ‘추한 냄새’를 지닌 몸, 반 아이들 전체의 혐오를 받아내는 바가지로 그가 있기 때문에, 그와 나 사이 경계 때문에,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거리를 둘수록 나는 그와 다른 사람이고, 모욕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우리 안에 있는 불안과 수치의 투사물이자 인간 방패로 그 애는 홀로 서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못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욕설이 적힌 책상에서 욕설이 적힌 교과서로 공부를 해야 했고, 남자아이들과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부딪힌 부분을 유난스레 털어내는 그 아이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 아, 더러워. 역겹네, 옷 빨아야겠다. 아님 버릴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낄낄거림은 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핵토’였다.”(김원영이 쓴 에서 재인용) 이 글은 연세대 ‘대나무숲’에 올라왔다. 핵토, ‘끔찍하게 혐오스럽다’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글쓴이를 오염물질 대하듯 한다. 왜 ‘못생긴 건’ 혐오의 대상이 됐나.

혐오의 투사 대상이 된 여성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책 에서 정신분석, 철학, 문학을 몽땅 동원해 이 두 감정의 뿌리를 짚는다. 혐오는 인간이면 가질 수밖에 없는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과정이다. 자기 안의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오줌, 똥, 콧물, 끈적끈적한 체액은 혐오의 원형이다. 이 원초적 이미지들은 비약을 거듭한다. 혐오가 증식하는 환경은 사회가 만든다. 자신 안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을 타자에게 덮어씌운다. 이상적인 남성성에 대한 환호는 여성혐오로 완성된다. 이상적인 몸은 추한 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 반유대주의, 동성애에 대한 거부의 근간에도 이런 투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누스바움은 이를 동물과 인간 사이 ‘완충지대’를 만들려는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경계 뒤에 숨어야 자신 안의 취약함이 보이지 않는다. 혐오엔 위계가 따른다.

누스바움은 그 혐오를 투사한 대상으로,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 격은 여성이라고 설명한다. “여성은 유약하고 끈적거리고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서 여성의 몸은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왔다.” 아담은 이브의 유혹으로 타락하지 않았나. 를 쓴 클로딘느 사게르는 “남성은 정신으로 여성은 번식으로 설명되어왔다”며 “남성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차원에서 논의되고 여성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정신이 아닌 육체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몸이 여성의 자아존중감에 중심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 여성 몸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건 남성의 시선이다. 바르면 가슴이 커진다는 크림을 파는 광고에서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의 자존심은 가슴이잖아요.”

‘핵토’, 토가 나올 것 정도로 혐오한다면, 타인을 지르밟아 감추려는 자기 안의 불안이 핵폭탄급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쓴 에서는 소득불평등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지위고하 막론하고 불안과 사회적 평가 위협에 시달린다. “지위 불안과 경쟁 욕구가 증가하면서 자신의 기질, 성격, 성공 등을 각각 타인의 눈을 통해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타인과 비교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걱정하며 외모와 개인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혐오스러운 뱃살이 늘어진 건 무능의 증거다. 주름이 늘어도 자기 관리 부족이다. 여자라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렇게 약자에 원인을 돌려야 자신과 ‘그들’ 사이 거리를 더 넓히고 모욕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 몸은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표징, 불안한 무대가 된다. 서로를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곳에선 지위를 과시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

발이 너무 커서, 가슴이 너무 작거나 커서, 허벅지가 굵어서… 주변 친구들한테 자기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완벽한 정상성’의 기준은 어찌나 높은지, 등심·안심·갈매기살을 나누듯 부위별로 완수해야 할 목표가 촘촘하다. 거기서 벗어난 부위는 어디 내놓기 창피하다. 마사 누스바움은 수치심을 이렇게 분석했다. 모든 아기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감정이 수치심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껴안고 타인과 상호의존하며 아이는 성숙해간다. 그렇지 못했을 때, 자기 안의 수치심을 타인을 향한 낙인찍기나 통제로 해결하려 한다. 완전함, 정상성에 집착하는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자신의 치부를 숨기려는 시도는 늘어난다.

완전함에 집착할수록 타인을 공격하게 돼

“모든 사람은 벌거벗고 가난하게 태어나며, 삶의 비참함, 슬픔, 병듦, 곤란과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며 종국에는 모두 죽게 된다.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이며, 우리 마음을 인간애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들이 공유하는 비참함이다.”(장 자크 루소 , 에서 재인용) 자기를 수용하지 못하면 결국 약자를 공격하거나 조정하게 된다. 늙어가는 내 몸을 사랑하고 말겠다고 결심한 까닭이다.

*김소민의 ‘아무거나’에 이은 ‘아무몸’에서는 자기 몸을 사랑하는 법을 고민해봅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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