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성질부리지 말자.’ 엄마가 고희를 맞았다. 부모님은 집을 옮기고 남은 돈으로 가족 크루즈 여행을 가자고 했다. 4박5일 동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타이를 도는 유격훈련 패키지 여행이다. ‘돈도 못 보태면서 까탈 부리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마음 굳게 먹었다. 이 마음의 주인은 어떤 양아치인가? 나는 아닌 거 같다.
엄마는 동그랗고 나는 각지고타이 푸껫에서 해변 한번 못 밟았다. 깃발을 쫓아가니 돌고래쇼장이다.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작은 수영장을 돌고래 세 마리가 돌았다. 돌아도 돌아도 제 꽁무니다. 관객 절반은 한국인 패키지 여행객이다. “사랑합니다!” 사회자는 한국말로 인사했다. 돌고래가 인간 흉내를 내면 박수가 터졌다. 돌고래가 입에 문 붓으로 종이에 색을 칠했다. 사회자는 돌고래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라며 경매에 부쳤다. 뭐가 재밌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 생명이 배를 뒤집는 걸 보면 인간이랍시고 권력을 누리는 쾌감이 드나? 인간도 수시로 그런 꼴 당하니 돌고래 너도 당해보란 심보인가? 돌고래들은 튀어올라 코로 공을 차고, 조련사들을 태운 채 헤엄쳤다. 쇼가 끝나고 관객은 돌고래와 셀카를 찍었다. 엄마는 “재주를 못 부린 한 마리는 통 생선을 못 얻어먹더라”고 안쓰러워했다.
우리 가족도 드라마에서처럼 즐거워보자고 모였는데 분위기가 침울했다. 11살 조카도 심각해 보인다. 거기다 나는 분기탱천해 꼭 한 소리 보태고 만다. “지금 돌고래 감금, 학대 현장을 본 거라고. 독방에 갇힌 ‘장기수’ 돌고래들이라고. 냉동 생선으로 길들인 거야. 죽지 않으려고 받아먹는 거야. 라는 책에 나온다고. 바다에서 50년 넘게 사는 돌고래들이 여기 갇혀 스트레스로 일찍 죽어.” 조카를 울릴 것 같다. 아버지는 담배 피울 곳을 찾았다. 우리 집 평화사절단인 동생이 나섰다. “그래도 오늘 절도 봤고, 망고도 샀고….”
‘엄마 고희에 돌고래 독립운동하냐?’ 항상 이랬다. 나는 ‘따따부따’ 분위기 브레이커다. 엄마가 몇 푼 아껴보려 버스 탈 때 내 나이를 속이면 그 자리에서 진실을 폭로해버리는 아이였다. 엄마는 수많은 버스기사 앞에서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버스요금 50원의 정의를 위해서는 떨쳐나서지만, 그 50원을 아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 아이가 나다. 그렇게 엄마가 모멸도 마다하지 않고 아낀 돈을 받아먹고 큰 게 나다. 거기서 내 죄책감과 분노가 자랐다. ‘미안해’와 ‘어쩌라고!’를 오락가락했다. 내가 보기엔 엄마가 너무 동그랗고, 엄마가 보기엔 내가 너무 각지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동그란 덕분에 각진 채 살 수 있었다.
타인 덕에 상상할 수 없는 나로왜 부모가 붙여준 이름으로 평생 불려야 하나?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에서 크리스틴은 스스로 붙인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러달라 고집한다. 고향 새크라멘토를 벗어날 궁리뿐이다. 첫 장면부터 엄마랑 기 세게 싸운다. “동부로 가고 싶어.” “넌 너밖에 모르지?” 방금 전까지 소설 한 장면의 낭독을 듣고 둘이 함께 울었더랬다. 딸 옷을 고르다 또 싸운다.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네가 언제나 가능한 한 최고로 보이길 바라지.” “이게 내 최고로 멋진 모습이면?” 그러다가도 엄마는 딸 드레스를 재봉틀로 줄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실직해 우울증을 겪고 어머니는 야근까지 뛰는 와중에 딸은 엄마 몰래 동부 대학에 원서를 넣는다. 서로 상처를 후벼 파다가 크리스마스가 오면 없는 살림에 땀 흡수 잘되는 양말이라도 주고받는다.
드디어 자기가 택한 자기, ‘레이디 버드’가 될 수 있는 기회의 땅에서 그는 자기가 택하지 않은 자기인 ‘크리스틴’을 껴안는다. 술로 떡이 됐다 마스카라 범벅인 채 눈을 뜬 어느 날, 부모님 집 전화에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기찻길 옆 구린’ 집, 만날 봐온 그 길과 상점들, 새크라멘토는 관심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그의 고향이자 그의 일부였다. “크리스틴이에요. 두 분이 참 좋은 이름을 지어줬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왜 부모를, 자녀를 선택할 수 없을까? 왜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사랑해야 할까? 선택할 수 없기에 축복일까? 앤드루 솔로몬의 책 은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이야기다.
“장애인 자녀를 키운다는 건 이래요.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는 이탈리아로 떠나는 굉장히 멋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과 비슷해요. 당신은 여행 안내서를 잔뜩 사 여러 가지 신나는 계획들을 세워요. …마침내 그날이 와요. 출발이에요. 몇 시간 뒤에 비행기가 착륙하죠.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탈리아에 가지 못한 아픔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런 꿈을 잃은 상실감이 엄청나거든요. 하지만 만약 이탈리아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여생을 살아간다면 네덜란드를, 지극히 특별하고 무척 사랑스러운 것들을 즐길 마음의 여유를 얻지 못할 거예요.”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들을 둔 에밀리 펄 킹슬리의 글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일부다.(앤드루 솔로몬의 에서 재인용) 나는 이 글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타인, 그래서 죽을 둥 살 둥 그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타인을 삶에 들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어쩌면 그런 타인들 덕에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곳까지 갈 수 있고, 내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바닥에 자려는 모녀한국에 도착한 날, 밤이 깊어 모두 부모님 집으로 갔다. 엄마는 나한테 침대를 내주며 자기는 바닥에 자겠단다. 내가 바닥에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먼저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당겼다. “아, 내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엄마, 내 입장에서 좀 생각해봐!” 생략된 말은 이렇다. ‘엄마 기대에 미치지 못해 내가 얼마나 미안한 줄 알아? 왜 자꾸 더 미안하게 해.’ “너도 내 입장에서 좀 생각해봐라!” 생략된 말은 이렇다. ‘너는 왜 내 마음을 그렇게 차갑게 발로 걷어차니.’ 목소리엔 점점 짜증이 차올랐다. 멀쩡한 침대를 두고 나는 고집스럽게 소파에서 몸을 웅크렸고, 엄마는 거실 바닥에서 잤다.
다음날, 툴툴거리며 집에 오니, 엄마한테 문자가 와 있다. “미세먼지 심한데 마스크 쓰고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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