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인 친구가 울었다. 눈이 커서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1년째 사귄 독일인 남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 연락이 뜸할 때부터 그 친구 빼고 주변 사람들은 낌새를 알아챘다. 남자는 문자에 답을 안 하거나 주말에 바빴다. 친구는 엉뚱한 근거를 끌어모아 아직 그의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몇 년 전 독일에서 살 때다. 그때 나는 아마 이런 ‘조언’을 했던 거 같다. “네가 집착할수록 그 사람은 더 떠나. 그 자식이 뭔데!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네 인생의 주인이 너잖아!” 그 이별이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전형적이지 않나. 그때 ‘조언’하는 내 마음속엔 미세한 우월감도 있었던 거 같다. ‘바보같이. 다 끝난 걸 붙들고.’ 친구를 위로하면서 확인하려 했던 건 내 현실의 안온함이었고 나는 같은 상황에서 다를 거란 확신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그때 입 다물고 들어줄걸…’</font></font>돌이켜보면, 그 이별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그 이별을 이해하려면 타향에서 견뎌야 했던 친구의 외로움, 현지인과 외국인 연인 사이 권력의 불균형, 친구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결핍을 이해했어야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툭, 내가 아는 ‘이별 카테고리’에 던져넣었다. 모든 상실이 고유하다는 걸 모를 만큼 나는 친구한테 관심이 없었다.
‘그때 입 다물고 있을걸.’ 내가 눈물 콧물 빼며 멜로드라마를 찍을 때야 알았다. 어떤 ‘조언’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인생을 돌아볼 때라고, 자기를 돌아볼 때라고.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맞는 말이지만 상처가 됐다. 머리는 떡이 된 채 추리닝 바지를 입고 나는 속으로 고함쳤다. ‘내가 바보라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 ‘어쩔 수 없음’이 핵심인데 그 ‘사건’에는 내 마음속 깊은 결핍이 묶여 있고, 그 결핍의 결이 얼마나 복잡한지 나도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눈으로 보면 이따위 이별은 얼마나 진부한지. 타인은커녕 자신에게도 진부해서 엎어져 있는 자기를 발로 찬다. 남들 다 겪는 거 왜 그러고 있냐고. 신형철은 산문집 에 이렇게 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이게 말이 돼?’ JTBC 드라마 를 처음 봤을 때는 그랬다. 시간을 돌리는 시계 때문에 71살 할머니가 된 25살 혜자가 다른 노인들과 ‘어벤저스’를 꾸려 악의 무리로부터 남자 주인공 준하를 구해낸다니 말이다. 준하가 지하실에 갇혔을 때 맹인 할아버지는 돌고래처럼 반사파로 위치를 알아내지를 않나, 왕년에 주먹 좀 썼던 문신 할아버지가 일당백으로 젊은 깡패들을 쳐부수지를 않나, 황당했다. 이 이야기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혜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었다는 걸 알고, 다시 1회부터 봤다. 알고 있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기자였던 남편이 경찰에 끌려가 주검으로 돌아온 뒤 홀로 아들을 키운 혜자가 왜 망상 속에서라도 남편을 닮은 준하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면, 어벤저스의 황당한 희극은 함께 울 수밖에 없는 비극이 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가 아파보니 알겠다</font></font>“오로라는 원래 지구 밖 자기장인데 어쩌다보니 북극으로 흘러 들어왔거든. 오로라는 에러야. 그런데 너무 아름다운 거야. 그 에러가. 눈물 나게.” 젊은 혜자는 난봉꾼 아버지를 피해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준하에게 오로라 이야기를 들려준 뒤 이렇게 말한다. “애틋해.” 혜자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그의 망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당신 삶이 애틋해.” 애틋함은 빛 따라 색깔이 바뀌어 어떤 카테고리에도 쉽게 던져넣을 수가 없다.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은 3%대 억울한 시청률로 끝났지만 내 마음속 명작이다. 김보미 기자의 모토는 “인생 어차피 혼자”다. 그러니 눈치 볼 일이 없다. 마음 수련하려고 틀어놓은 염불이 ‘성공, 성공’으로 들리는 사람이다. 특별한 날엔 “조용하고 고요하고 고독한” 집에서 혼자 쇠고기를 구우며 맥주를 두 캔씩 한꺼번에 따 퍼마신다. 온갖 구린 비리를 잡아내는 초특급 레이더를 장착해 협박용으로 쓴다. 김보미 기자에게 붙는 수식어는 “싸가지” “이 구역 미친년” “또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9시 뉴스 앵커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사달이 난다. ‘달고나’를 만드는 방식으로 허접하게 제조한 약을 멋모르고 먹는 바람에 왕년의 배우 김봄과 시시때때로 몸이 바뀐다. 톱스타 김봄은 국회의원 남편과 미래의 피아니스트 딸을 뒷바라지하는 낙으로 사는 인물이다. 라면 같은 악마의 음식은 이 집에선 아무도 못 먹는다. “옳지 않아요”를 입에 달고 사는 그는 화가 머리 천장을 뚫고 나올 때만 극악한 발언을 한다. “나쁜 사람!” 김보미 몸으로 오락가락하며 김봄은 어느새 라면 수프에 중독되고 자기가 믿었던 ‘행복’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걸 깨닫는다. 김보미 기자는 얼떨결에 ‘정의의 기자’가 된다. 마지막까지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몸이 바뀌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세상에 ‘진부한 슬픔’이란 없단 걸</font></font>‘이건 웃기는 드라마가 아니야.’ 김보미 기자가 케이크에 꽂힌 초를 콧바람으로 꺼버리는 걸 보며 시시덕거리다 멈췄다. 타인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그건 몸이 바뀌어 타인의 현실 속으로 던져지는 기적이 일어나도 될까 말까 한 일이다. 한 번 몸이 바뀌는 걸로는 턱도 없고 평생 주기적으로 타인의 현실에 제 것같이 부닥쳐야 이룰 수 있는 공감의 경지다. 그래야 겨우, 그 삶의 결이 보이고 ‘미친 이기주의자’ ‘바보 아줌마’라고 서로에게 붙인 딱지를 떼어낼 수 있다. 불가능하지 않을까? 친구가 울던 그때, 적어도 나는 가만히, 오래 곁에 있어줄 수는 있었다. 내가 울 때, 내 슬픔이 사지선다형 문제처럼 간단하게 다뤄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김소민 자유기고가<font color="#008ABD">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1천원이라도 좋습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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