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처음엔 그냥 궁금해서 봤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방송 에서 을 부르는 장면이다. 100번 돌려봤다. 왜 똑같은 걸 계속 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유튜버들이 그 공연 장면을 보며 감격하는 ‘리액션 동영상’을 다 찾았다. “2018년 멜론 뮤직어워드 시상식 공연이 레전드”라는 댓글을 보고 옮겨 갔다. 그 무대는 200번 봤다. 신곡 방송을 섭렵하고 여러 장면을 짜깁기한 것과 그 동영상에 대한 반응까지 이어 달렸다. 멤버 7명의 소개를 거쳐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 라이브’까지 쭉 클릭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글을 보내야 할 마감 시간이 지났다. 망했다. 그러면서 방탄소년단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즈볼 공연을 찾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자기만의 결핍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순간</font></font>
을 부르며 헐렁한 청바지에 오렌지색 조끼를 걸친 제이홉이 헤엄치듯 걸어 나올 때 현실이 뒤로 물러났던 것 같다. 장마철 빨랫줄에 걸어놓고 잊은 속옷처럼 처져 있던 내 일상과는 다른 맥박의 고동을 들었다. 목소리를 잃은 나 대신 누가 고함을 질러주는 느낌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덕질’의 은총이 내리는 걸까? 방탄소년단 7명이 머리 색깔을 바꾸면 아직 헷갈린다. 내 몰입은 빌보드 2관왕을 차지하며 미국이란 ‘중심’에 선 ‘방탄’으로 변방의 열등감을 대리 해소한 데 대한 감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감히 팬이라 말할 수 없다. 찝찝한 무임승차 같다.
나랑 달리 박지연씨는 진짜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다. 직장인이자 딸 하나를 둔 41살 엄마다. 2년 전쯤 어느 횟집에서 밥 먹다 를 우연히 듣고 빠졌다. 지연씨는 이후 그 순간을 자주 떠올렸다. 여전히 모호하다. 무엇에 매혹됐나? 루시드폴이나 윤종신의 노래를 듣던 그였다. 마리 루티는 책 에서 누군가에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빠져드는 까닭은 ‘그것’ 때문이라고 썼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이론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근원적 결핍이 있다. 철이 들어가며 치르는 비용이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은커녕 한탄강 물살에 쓸려 내려가는 슬리퍼 한 짝 같은 존재라는 자각과 그에 따른 불안이다. 무엇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깊은 슬픔이 마음 밑바닥에 흐른다. 첫눈에 반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우리를 다시 온전한 존재로 채워줄 ‘그것’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첫눈에 반하는 상황은 까무룩 만져지지 않는 자기만의 결핍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언젠가 꽃은 지겠지. But no not today 그때가 오늘은 아니지…. 그래 우리는 EXTRA But still part of this world. EXTRA + ORDINARY. 그것도 별거 아녀. 오늘은 절대 죽지 말아. 빛은 어둠을 뚫고 나가. 새 세상 너도 원해.”() 이 노래가 지연씨를 ‘성덕’의 길로 이끌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보상이 있을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부속품 같은 느낌이 들잖아. 그래도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하니 후련한 기분이 들었어.”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이돌 팬을 ‘빠순이’라고 하는 이유</font></font>
‘방탄’ 리더 RM이 쓴 노랫말은 지연씨에게 자꾸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따라가다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우울을 봤다. 거기 없는 척 오래 숨겨놨던 감정이었다. “나의 키는 지구의 또 다른 지름. 나는 나의 모든 기쁨이자 시름.”() 이 노래로 지연씨는 우울을 껴안았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점점 더 자기를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이제까지는 뭐에 끌려가며 살았던 거 같거든. 나 받아주는 학교, 회사 들어가고… 내가 우울한 사람인 게 부끄러웠어. 그런데 RM 노래를 듣다 나를 사랑한다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이게 내가 느끼는 나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좋아졌어.” 그런 느낌이 강렬해지면서 가만있을 수 없게 됐다. 블로그에 글을 썼다. 자기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방탄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20살 차이라도 상관없었다. 마리 루티는 사랑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고 했다. 그 이상이다. “(사랑은) 잠자고 있던 우리 존재의 일면을 일깨워주고 더 다차원적인 미래를 불러들이며 우리의 개성에 깊이와 밀도를 부여합니다.”()
나는 지연씨의 짝사랑이 부럽다. 내게 취향은 간판이다. 영화 의 여자 주인공처럼 바흐나 모차르트, 재즈를 좋아해야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떠벌린 어느 뮤지션 공연에 갔다 깊은 수면에 빠지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홍길동이구나. 좋아하는 척을 오래 하니 진짜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취향을 트로피 삼아 타인과 나를 구별 짓고 위에 서고 싶었던 거 같다. 내가 동경하는 그룹에 끼려 취향을 가장하기도 했다. 클래식 마니아는 ‘문화인’이지만 아이돌 팬은 ‘빠순이’다. 아이돌이 국위 선양을 해야 그 팬들은 ‘빠순이’라는 모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강준만, 강지원은 책 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취향은 계급이건만, 우리는 계급 비판은 금기시해도 취향 비판은 비교적 자유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며 “취향에 급을 매기려 드는 남성은 여성 수용자에 의해 흥행 성공을 거둔 대중문화를 폄하하면서 여성 폄하까지 곁들이는 일을 자주 한다”고 썼다. 지연씨의 사랑은 편견 따윈 예전에 훌쩍 넘어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보답을 바라지 않으니 상처로부터 ‘방탄’</font></font>
무엇보다 부러운 건 이 사랑으로 상처받을 일이 없다는 점이다. 되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니 상처로부터 ‘방탄’이다. 완벽한 타인에게 기꺼이 주는, 고통이 없는 짝사랑이다. 현실 인간에게서 ‘그것’을 찾아헤매다 얼마나 많은 뇌진탕급 뒤통수를 맞나. 불안하지 않은 나로 돌아갈 곳을 찾아 얼마나 헤매나. 지연씨는 그럴 때 이어폰을 끼면 된다. “니가 있는 곳, 아마 그곳이 Mi Casa, 다녀왔어 Hi Mi Casa, 켜뒀구나 너의 switch”((Home)) 이 사랑이 환상이라고? 환상이 아닌 사랑이 있을까? 그러니 내게도 언젠가 ‘덕질’의 은총이 내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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