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생에 ‘절대로’란 없다

제멋대로 들이닥친 고통이 가져다준 자유
등록 2019-07-23 03:10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화마는 갑자기 덮쳤다. 정인숙씨는 그날 배달음식점 문을 열었다. 이사 가기 전날이라 오전 장사만 할 생각이었다. 가스레인지를 켜자 불길이 천장으로 솟구쳐올랐다. 인숙씨는 86% 전신화상을 입었다. 치료 과정은 지옥이었다. 그야말로 살을 뜯어내는 치료를 받는 날엔 아침부터 온몸이 떨렸다. 퇴원 뒤에도 몇 년 동안 인숙씨는 옷을 입지 못했다. 몸속에 화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곱아드는 피부가 뼈를 옥좼다. 화상 수술은 미용으로 분류돼 보험 적용이 안 됐다. 남편이 떠났다. 친정 식구들이 떠났다. 화상 경험자 7명의 인터뷰집 (온다프레스 펴냄)는 잿더미에서 스스로 부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무리 부정해도 아무것도 안 바뀐다

문을 두드린 사람들이 있었다. 인숙씨는 열어주지 않았다. 먹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문고리에 걸어두고 갔다. “몇 번쯤 오다가 관둘 만도 한데 정말 문을 열 때까지 오더라고요.” 동네 복지관 사람들, 간호사들이었다. 인숙씨는 그 손을 잡았다. 그는 고흐의 그림 지그소퍼즐을 샀다. 1천 조각짜리였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헤맸다. 그 조각을 모두 맞추고 퍼즐도 샀다. 인숙씨는 자신의 손을 잡고 삶을 한 조각씩 재조립했다. “나는 다시 태어난 거구나.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구나.”

인숙씨는 아무 잘못이 없다. 고통은 제멋대로 와 숙제를 던졌다. 그는 그 숙제와 대면했다. 그 과정을 통과하자 ‘있는 그대로’ 자신이 보였다. 고통이 선물한 자유이기도 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살아야 해, 이건 꼭 해야 해, 저건 절대로 안 돼, 같은 생각은 없어졌어요.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씩 내려놓은 거죠. 그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부정해봤자 어떤 변화도 오지 않아요. 크든 작든 모두 아프죠. 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인 것 같아요.”

서머싯 몸의 소설 는 9살에 고아가 된 필립의 성장기다. 한쪽 다리를 저는 그는 엄격한 목사인 큰아버지 집에서 자란다. 뒤틀린 한쪽 발을 숨기려 필립은 자기 속으로 파고든다. 그에게 사랑은 사고처럼 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들이닥쳐 필립의 자유의지나 이성 따위는 간단하게 지르밟았다. 카페 종업원 밀드레드 앞에서 필립은 속수무책이다. 밀드레드가 특별했던 건 아니다. 속물이다. 필립의 장애도 우스개로 모욕한다. 극장 구경 갈 때만 필립이 필요하다. 밀드레드의 마력이라면 필립의 사랑을 개똥 보듯 한다는 점이다. 필립도 안다. 다만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오갈 데 없는 밀드레드를 보살피는데 그 와중에 밀드레드는 필립의 친구 그리피스와 눈이 맞는다. 필립은 그 둘이 여행 갈 수 있도록 경비까지 대준다. 밀드레드는 찡그림만으로 필립에게 치명적 내상을 입힐 수 있지만 필립의 어떤 말도 밀드레드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지나며 필립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자유로운 시기를 본다.

세상엔 ‘정상적인 것’이 드물다

필립의 이야기는 서머싯 몸의 삶과 겹친다. 몸은 10살에 부모를 잃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몸이 필립으로 자기 삶을 복기하며 하고 싶었던 말을 ‘페르시아 양탄자’에 담았다. 시집 하나 제대로 낸 적 없는 술고래 시인이 필립에게 준 선물이다. 화가가 되려다 포기하고, 의대에 진학했다. 빈털터리가 되고, 노숙을 전전하며 자살을 고민하고, 사랑이라 믿었던 자기 마음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걸 목도한 뒤에야 필립은 여러 겹 실을 이어 무늬를 이룬 양탄자를 다시 본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 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몸에든 마음에든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순간 필립은 이 모든 사람에게 성자와 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필립은 그리피스의 배신을,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밀드레드를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네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화상 경험자 7명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정인숙씨는 사고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다치기 전에는 나 살기 바빴으니까 남을 돌아볼 줄 몰랐거든요. ‘힘들겠다, 안됐구나’ 이 정도였지 어떤 게 불편할지, 얼마나 힘들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전기 외선 작업을 하다 한쪽 팔을 잃은 송영훈씨는 자기 고통에 공감해줄 사람을 찾아 한밤에 병원을 헤맸다. 지금 그는 화상환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멘토다. 하청 노동자 정범식씨가 해저터널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회사는 산업재해를 숨기려 구급차도 부르지 않았다. 몸은 화상으로 마음은 소송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그가 이제 말한다. “저한테 행복은 뭐냐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제 정신세계가 지금보다 더 성숙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바라보는 가정도, 세상도 더 아름다워질 거 아녜요. 지금 이렇게 말하면서도 울컥해요.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고마운 게 많거든요. 내가 뭐 잘한 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세상에 불만도 많았지만 고마운 것도 많아요.”

아무것도 아닌 자기를 받아들이길

“내 아픔이 나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대로 끌려가지 않고 내 마음을 살찌우는 계기를 꼭 찾으셔야 해요.”(정범식씨)

(MBN)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말벌 아저씨’ 허명구씨가 나온 적 있다. 산속에서 홀로 벌을 치며 농사짓는다. 방문한 연예인 윤택이 말려놓은 고추를 보며 “이거 다 농사지으신…” 하는 사이에 후다닥, 윤택에게 등목을 해주다가 후다닥, 깨를 털다 후다닥, 허명구씨는 일벌을 구하러 달려간다. 파리채를 들고 말벌을 몰아낸다.

화상 경험자 7명은 어떻게 고통을 통과하며 연민과 공감, 연대로 나아가나.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자기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경험을 환영하며 양탄자를 완성해가나.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란 말은 진짜인가보다. 고통을 마주 볼 자신이 없는 나는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일단은, 절망의 감정이 몰아닥칠 때마다, 말벌을 쫓아내듯, 후다닥.

*이제까지 ‘김소민의 아무거나’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새로운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