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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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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자들의 경계 너머 삶

경계를 넘은 여자들과 어떤 중국 지식인의 죽음 그리고 톈진의 ‘콰제서점’
등록 2019-06-14 10:40 수정 2020-05-03 04:29
장샤오후이(오른쪽)는 ‘힘없는 자들의 권력’을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다. 영화 속 델마와 루이스가 일탈 행위를 저지르면서 세상에 ‘빅엿’을 날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겨레 자료, https://www.chinesepen.org

장샤오후이(오른쪽)는 ‘힘없는 자들의 권력’을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다. 영화 속 델마와 루이스가 일탈 행위를 저지르면서 세상에 ‘빅엿’을 날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겨레 자료, https://www.chinesepen.org

리들리 스콧 감독의 는 내 인생 영화 중 하나다. 더는 도망갈 곳 없는 광활한 그랜드캐니언 앞에서 그들은 마지막 ‘경계를 넘는’ 삶을 선택한다. 두 손을 꼭 잡은 델마와 루이스가 자동차로 하늘 위를 날며 외치는 말. “우리 잡히지 말자.” “계속 가는 거야. 밟아!” 억압적인 남편과 성폭력 트라우마로 상징되는 남성 중심의 ‘염병할’ 세상에서 그들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 방법은 바로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죽거나 말거나 계속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현실 속 ‘델마와 루이스’들은 영화에서처럼 세상의 온갖 경계를 훌쩍 넘어, 과연 그 ‘경계 너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한 번도 갖지 못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지난 1월22일 한 중국 지식인의 부음이 들려왔다. 장샤오후이, 향년 55살. 가족과 지인들을 빼고 그를 아는 중국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는 사람이다. 미국에 사는 그의 베이징대학 동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친구 장샤오후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인터넷 공간에 그를 추모하는 긴 글을 남겼다.

장샤오후이는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84학번이다. 그해 대학 입시에서 지린성 전체 문과 수석을 했다. 원래는 전해인 1983년에 대학 입시를 치렀지만 작문 내용에 ‘사상적 문제’가 있다고 하여 대학 입시 자격을 빼앗겼다. 가족과 선생님들이 그를 설득해 당국에 ‘반성문’을 내고서야 다음해 입학시험 자격을 얻었다. 베이징대 친구의 회고에 따르면, 장샤오후이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당국에 ‘반성문’을 낸 것을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며 두고두고 자신을 질책했다고 한다.

중국 최고 수재들이 모이는 베이징대학 학생이 된 그에게,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비단길과 꽃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경계를 넘는 삶’을 선택했다. 1985년 ‘9·18 만주사변’ 국치일을 맞아 전국 대학가에서 대대적인 항의 집회가 열리던 때, 장샤오후이는 베이징대학에 “학우 여러분, 여러분의 방법은 틀렸습니다”라는 장문의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1931년 9·18 사변 이후, 일본이 중국을 제 맘대로 침략하고 중국 인민을 학살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중국인들의 무관심과 강한 노예근성 때문이었습니다. ‘9·18 만주사변’을 기억하려면 항의 시위를 할 게 아니라 먼저 자성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 비판이라는) 주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주장을 했다. 장샤오후이의 대자보는 당연히 많은 학생에게서 공개적인 비판을 받았고, 그는 학내에서도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다음해인 1986년 4월3일 장샤오후이는 당국에 ‘반혁명분자’로 체포돼 재판받고 그해 말 3년형이 확정돼 복역했다. 죄목은 ‘청년 마르크스주의자의 선언’이라는 반동 문건을 썼다는 것이다. 그 문건을 처음 봤던 친구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공산당 독재와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채소가게 주인이 ‘단결’ 포스터를 붙인 이유는

장샤오후이는 감옥에서 나와, 다른 친구들과 동기들이 광저우나 선전 등에서 당시 유행하던 ‘돈의 바다’에 뛰어들어 갈퀴로 돈을 쓸어담던 시절에도, 쉬운 길을 마다하고 가난한 사회과학 서점과 출판사의 학술담당 기획 책임자로 일했다. 그가 기획·출판한 책은 헨리 소로의 과 한나 아렌트의 , 슈테판 츠바이크의 , 마이클 폴라니의 등 당시 한국 출판계에도 미처 번역, 소개되지 않았던 주옥같은 사회과학 고전들이다. 대부분 그가 번역했다.

그는 당국의 감시와 제재로 본명을 숨기며 인터넷 등에 역사·정치·사회 분야에 대한 서평과 관련 글을 쓰며 수많은 팬을 거느린 유명한 인터넷 논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늘 최저 생계의 밑바닥을 헤맸다. 그렇게 살다가 장샤오후이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이 세상 ‘경계 너머’로 훌쩍 떠났다. 생전에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먼저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뭔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정치 사상적 ‘입장’을 강요당하는 중국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갖지 못했다.

“한 채소가게 주인이 부엌 창문에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표어를 붙였다. 그가 이런 표어를 붙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이른바 ‘벨벳 혁명’이라는 체코의 무혈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1993년 체코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어 약 10년 동안 통치했던 바츨라프 하벨은 수필집 에서 이렇게 물었다. “대부분 상점 주인들은 그 표어의 의미에 대해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표어를 붙이지 않아서) 귀찮은 일을 당하는 걸 피하고 평안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붙이는 것뿐”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기형적인 독재체제에서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은 삶의 모든 기반을 잃을 수 있다는 마음 깊숙이 내재된 ‘공포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공포감에서 나오는 거짓 생활을 때려부술 수 있을까? 하벨은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 살라”고. 거짓 논리로 현실이 지탱되는 사회에서 진실과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위협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죄의 대가가 가장 무거운 법이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모든 개개인이 양심에 따라 진실을 말하고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힘없는 자들의 권력’이다.

IT 업계 여장부의 ‘경계를 넘은’ 서점

내 인생의 첫 ‘경계 넘기’는 중국 톈진에서 시작됐다. 1998년 8월, 나는 생애 첫 비행기를 타고, 생애 첫 국경을 넘었다. 첫날 밤, 배정받은 유학생 기숙사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동네 식당의 치렁치렁한 홍등과 거대한 물결처럼 쏟아져나오는 은색 자전거를 탄 ‘중국 인민’을 보면서, 흥분되고 설레는 마음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이 도시를,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이후 나는 20년째 이 나라에 죽 퍼질러 앉아 있다. 물론 그때처럼 마냥 가슴 설레고 좋아서 있는 건 아니다.

장훙 역시 나와 비슷한 행로를 겪었다. 중국 정보기술(IT) 업계에 떠오르는 ‘여장부’였던 장훙은, 2006년 어느 날 미국 보스턴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서점 ‘보더스’(Borders·경제, 국경)를 보고 그곳에서 한참 책을 뒤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문득 생겨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흥분. “그래, 서점을 차려볼까?”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2014년 10월, 장훙은 정말 톈진에 서점을 열었다. 자신이 약 20년 동안 종사한 IT 업계라는 경계를 넘어 서점이라는 전혀 다른 경계로 들어왔다는 의미로, 이름을 콰제서점(跨界書店·Borderless)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집단인 IT 종사자들이 몰려 있는 톈진 외곽 개발구에 서점을 열었다. 비록 서점이라는 낯선 분야에 들어가지만 첫 고객은 익숙한 집단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약 5년간 무사히 서점을 운영하고, 올해 4월 톈진의 주요 대학들이 밀집한 마창다오로 옮겼다. 마창다오는 상하이 조계지(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 거리처럼 길 양쪽으로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옛 조계지 거리다. 20여 년 전 나는 거의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중국 친구 샤오루를 만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오동나무 사이로 불 밝힌 꼬치가게에서 양꼬치에 칭다오 맥주를 마시다 새벽에야 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 맛있고 재밌는 추억이 물려 있는 거리에 ‘경계를 넘는’ 혹은 ‘경계를 가로지르는’ 콰제서점이 이사를 왔다.

창업자이자 사장인 장훙은 여전히 선전에서 IT 업체를 운영하며 톈진을 오가고 있다. 서점 경영만으로는 수익은커녕 적자를 벗어나기도 힘들어 든든한 ‘돈줄’을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서점은 2층으로 돼 있다. 1층은 커피 등 음료를 팔고 독자 모임이나 저자와의 대화가 열리는 장소이며, 2층은 책만 파는 공간이다. 마침 5월 추천 도서로 진열된 책이 눈에 들어온다.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한국어 번역 제목은 ‘경계 너머의 삶’). 에서 “민족은 (필요에 의해) 상상되고 발명된 정치 공동체”라는 충격적인 논리를 선보였던 저자의 자서전이다.

“전세계 개구리들이여 단결하라”

“1936년 8월26일, 나는 중국 쿤밍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이 책은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베트남인 보모 손에서 자라나 아일랜드와 영국, 미국 등에서 공부하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연구했던, 앤더슨 자신이 ‘경계인’으로 살았던 인생을 들려준다. 책에서 앤더슨은 평생을 코코넛 껍질 속에 갇혀 사는, 타이와 인도네시아에 흔한 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개구리들이 어두운 코코넛 껍질 속으로 움츠러들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해방전쟁은 승리할 것이다. 전세계 개구리들이여 단결하라!” 자신이 코코넛 껍질을 벗고 나온 ‘해방된’ 개구리였듯이, ‘바람이 너를 향해 불어올 때, 망설이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바람을 쫓아가라’고. 그래야 ‘경계 너머의 삶’을 살 수 있는 ‘해방된’ 개구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톈진(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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