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바람이 불던 시절이었다. 근대화의 바람. 폭력과 압제의 바람. 일제에 짓눌린 암울한 시기였지만 선진 문명의 바람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젊은이들도 있었다. 안창남(1901~30)도 그랬다. 일본 특파원 출신인 현직 기자가 쓴 (길윤형 지음, 서해문집 펴냄)은 전작 (2012)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황 만세’를 외치며 비행기를 몰고 죽음 속으로 날아갔던 조선인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던 중, 이들에게 ‘피 끓는 항공열병’을 전파한 안창남이라는 존재가 다가왔다.
안창남은 1922년 5만 명이 운집한 여의도비행장에서 고국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조선인 최초로 조선의 하늘을 난 자랑스러운 인물’로 신문을 도배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1924년 말 홀연히 경성에서 사라진 뒤 중국에서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은이는 부족하나마 일본·중국·한국에 있는 자료를 최대한 모아 조각조각 흩어진 안창남의 생애사를 퍼즐 맞추듯 완성해나갔다. 안창남은 탁월한 비행 실력으로 일본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벌어졌던 끔찍한 조선인 학살을 겪으면서 결국 “육첩방은 남의 나라”였음을 자각한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그는 이듬해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하지만 군벌 싸움으로 치열했던 중국의 사정과 임정의 분열은 재능 있는 젊은이에게 제대로 항일 활동 기회를 주지 못했고, 안창남은 산시성의 군벌에 의탁해 두목 옌시산의 ‘에어포스원’을 몰다가 기기 결함으로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지은이는 안창남이란 ‘미완의 신화’를 써내려가면서 한·중·일의 상황을 비롯해 그가 살았던 시대적 맥락을 충실히 짚어가며, 당시 사회상을 깨알같이 담아 감칠맛을 더했다. 안창남이 참가했던 1922년 11월 제국비행협회 주최 현상우편비행대회 상황을 묘사한 장면은 잘 짜인 소설 같은 긴장감이 넘치고, 관동대지진 학살의 실상을 전하는 대목에선 터질 듯한 비장감이 흐른다. 일본 정부가 어떻게 민심을 조작해 조선인 학살을 조장·방치했는지, 참사 사실이 조선에 전파되지 않도록 조선인들을 어떻게 밀착 감시했는지를 자세히 전한다. 그러면서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색출하는 방법이었던 ‘주고엔 고주센’(15엔50전을 뜻하는 말로 일본어에 서투른 조선인들은 ‘츄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했다)을 소재로 조선인의 비애에 공감한 시를 남긴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도 소개한다.
중국으로 간 안창남의 ‘항일운동’이 조선 독립에 끼친 실질적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하지만 1920년대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웠던 안창남·이기연·장덕창·신용욱 등 조선인 청년 네 명의 각기 다른 행로를 비교해보자. 비행 사고로 안창남보다 먼저 세상을 뜬 이기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오명을 남긴 신용욱, 해방 전이나 후나 승승장구해 4대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던 장덕창, 그리고 안창남.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던, 높은 하늘보다도 아득해 보였던 조선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뛰어든 안창남은 바람 한 줄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기개와 의지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일제 강점기 노래 가사)으로 남아 불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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