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내와 한국에 살면서, 스페인어로 읽고 쓰는 글쟁이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MBC 에브리원에서 만든 예능 프로그램 에 등장하는 외국인 여행자들처럼 한국 문화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흡수하고 돌아가는 모습과는 매우 다른 삶일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와 다정한 친구들이 있다 하더라도 낯선 토양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남미인 특유의 자유롭고 느긋한 기질에다 어디서든 이방인으로 살아가려는 작가의 자의식이 더해진다면, ‘빨리빨리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콜롬비아 출신 작가인 안드레스 솔라노의 (은행나무 펴냄)는 이방인의 한국 관찰기다. 2016년 콜롬비아 도서관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은 솔라노의 아내이자 공연기획가인 이수정이 우리말로 옮겼다. 그는 새벽 3시에 영화를 보고 팝콘과 콜라 대신 오징어와 맥주를 주문하는 사람들에게 놀라고, 식당 테이블마다 붙어 있는 종업원 호출 버튼의 효율성에 감탄한다. 중요 부위는 다 가리는 점잔을 떨면서도 여자들이 모두 자고 있거나 술 취한 채 섹스하는 설정으로 일관하는 한국의 포르노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 계속된 북한의 도발과 무시무시한 북-미 간 말폭탄 등으로 한반도 정세가 몹시 위태로웠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고향 친구들은 “피란 갔냐” “살아 있는 거냐”고 발을 동동 구르는 판에, 정작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태평스럽게 일상을 유지하는 데 깜짝 놀란다.
이 책의 매력은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근사한 냉소, 자유로운 상상력, 솔직하고 창의적인 표현이 빼곡하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산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언급하면서 “등산객이야말로 한국의 진정한 도시 부족”이라고 정의한 뒤 “산꼭대기에서 모인 남녀가 규율을 위반하는 상상을 한다”고 적는다. 과도한 성형수술 유행과 관련해선 “수술 전후의 변화가 너무도 극단적이라 수술 뒤 피를 나눈 가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한다. 아마 이런 이유로 어머니들이 새로운 외모의 딸이나 아들과 닮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것일지도”라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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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보면 한국에 사는 외국인 솔라노가 아니라 작가 솔라노에게 빠져들게 된다. “나의 기억은 글을 통해서만 추적 가능하다.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무덤에서 나온 기억들만이 어느 정도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 글을 쓸 줄 모를 때부터 글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다섯 살 때, 안방 문을 열어 부모님이 섹스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문장으로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은 한국어의 말줄임표에 대한 찬사다. 질문을 받고 침묵할 때, 또는 입장을 정하지 못했을 때, 또는 완강한 침묵의 의사를 표현할 때 쓰는 이 말줄임표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어쩌면 한국에서 복잡미묘한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말줄임표로 대신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지 모르겠다.
이주현 문화부 기자 edign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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