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지다.’ 사전을 찾아보니 “잘난 체하거나 남을 낮추어 보듯이 행동하는 데가 있다”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진짜 남을 낮추어 보는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한테 ‘건방지다’라는 말이 붙는 건 못 봤는데, 27살 신지예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의 포스터를 보고는 “시건방지다”라고 한다. ‘건방지다’는 위계를 전제한다. 괄호 안에 ‘주제넘게’가 있다. 건방진 부하는 있지만 건방진 상사는 없다. 성별로 임금 차별하지 말라, 성폭력 하지 말라 등 ‘사람은 평등하다’ 차원의 공약을 내걸어도 포스터에서 눈을 파고 난리였다.
그것은 미세먼지처럼 도처에 있다. 미세먼지에는 경고 메시지라도 뜨는 데 이건 그냥 공기다. “여성은 ‘덜’ 인간”이란 미세먼지를 40년 넘게 숨 쉴 때마다 들이마셨다. 내 몸의 일부가 될 때까지 말이다. 맞다. 여성인 내 마음의 일부가 될 때까지.
12살 때 느낀 여릿한 모멸감“후보 여러 명 나오면 시간 걸리니까, 반장 후보는 남학생들만 하는 걸로~.” ‘국민학교’ 5학년 때다. 1~3학년까지 반장 자리를 놓고 여자 편, 남자 편이 치열하게 맞섰는데 판세는 4학년 때부터 돌변했다. 반장은 남자애만 했다. 여자애들도 남자애를 뽑았다. 급기야 후보도 남자만 내자고 선생님이 나선 거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선생님 말에 반항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12살 내가 느꼈던 여릿한 모멸감이 아직도 또렷하다.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둔 친구는 요즘엔 여자반장, 남자반장이 따로 있지만 학부모 대표는 으레 남자반장의 부모란다. 남자애들은 1번부터, 여자애들은 30번부터 번호가 붙는다. 동네 사람들은 딸 앞에서 “아들 동생 있으면 좋겠지”라고 말한단다. 친구는 “딸이 자기 존재만으로 뭔가 부족하게 느낄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여성은 ‘덜’ 인간”임을 내포하는, 또는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다 말할 수도 없다. 말에 이미 배어 있다. 어린 시절 넋 놓고 보던 , 여자친구나 아내는 존대를, 남자친구나 남편은 반말을 썼다. 너무 자연스러워 이상한 줄도 몰랐다. 지금 번역되는 영화나 소설도 그렇다. 정희진은 책 에서 이렇게 썼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은 있지만, ‘연상의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다. 남성이 연상이거나 상위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현민의 을 보니, 감옥 안에서도 우월한 것은 ‘남성’이다. 권력자인 ‘빵잽이’들을 ‘형’이라 하는데, 이 형들은 ‘동생’들을 “~년아”라 여성화해 ‘장난으로’ 성추행한다. 강준만과 강지원은 책 에서 팬덤의 주체가 여성일 때는 ‘빠순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비하한다고 짚었다. 관습적으로 ‘여성’과 연관검색어인 거의 모든 것은 ‘열등’ 카테고리로 떨어진다.
어린 시절 집에 돌아오면 노동에 찌든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보따리 과외 교사로 생활비를 벌었다. 집안일도 당연히 어머니 몫이었다. 닭다리는 한 번도 어머니 몫인 적이 없다. 한 집만 건너면 아내가 어떻게 남편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때린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그건 그의 맘에 달린 문제니까. 맞지 않은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여성이면서 여성을 비하했던 나그런데 어머니가 무심결에 이런 말을 한다. “그 집엔 아들이 없잖아.” “여자들이 모이면 시끄럽지.” 어머니가 ‘여자’를 말할 때마다 비릿한 비하의 느낌이 배어 있다. “엄마도 딸만 둘이야”라고 쏘아붙이고 싶다가도 어머니가 화병 걸리지 않고 자기 삶을 받아들이려면, “여자는 ‘덜’ 인간”인 게 당연하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머니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40년 넘게 ‘남자, 아들’이 되려고 했다.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관습적으로 ‘여성 카테고리’에 묶인 것들을, 깎아내렸다. 그건 약한 거니까, 열등한 거니까, 그 카테고리에 묶였다간 ‘그들’이 날 무시할 수 있으니까. “여자는 ‘덜’ 인간”인 걸 받아들인 셈이니 나는 가부장제의 부역자였다. 성인이라면 해야 할 생존을 위한 밥짓기, 청소, 빨래 등을 안 하고 어머니의 노동을 착취한 걸 창피해한 적이 없다. 전업주부를 내심 무시했다. ‘집안일’은 ‘바깥일’보다 하찮으니까.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대로, 그 이분법대로 나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내가 여성인 나를 비하했다.
그러면서 미웠다. ‘여성스러운’이라는 낱말에 꼭 맞는 역할을 수행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여성들을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비굴한 여자’로 분류하고 미워했다. 그 질투와 미움은 내 마음속에 억눌린 욕망의 크기만큼이었다. 사실 남자가 되려 했던 나나, 사회가 부여한 성역할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내가 혐오한 그들이나 똑같은 게임의 룰에 따르고 있었다. 정희진의 에서 이 말을 읽었을 때, 비로소 나는 여성이면서 여성을 비하하는 나라는 인간에 대한 혐오, 거기서 파생된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란츠 파농이 온몸을 떨면서 간파했듯이, 흑인은 백인의 타자이며 동시에 흑인의 타자이다. 여성의 타자 역시 여성이 아니라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다행히, 내가 제자리걸음만 걷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2007년 한동안 드라마 에 빠져 살았다. 외과의 장준혁 과장이 병원에서 권력을 향한 온갖 이전투구를 벌이다 결국 추락하는 과정이 얼마나 짠하던지. 일본 원작까지 다 봐버렸다. 올해 이 ‘명품 드라마’로 재방송되기에 다시 봤다. 기겁했다. 이 드라마에서 주체는 온통 남성뿐이다. 인생은 남자만 산다. 출세를 열망하건, 히포크라테스 정신의 수호자가 되건 오로지 남자들 얘기다. 여성이 맡은 역할은 착한 ‘응원군’이거나 남자의 출세욕에 군불을 때는 ‘악녀’다. 보면서 뿌듯했다. 그 10년 사이 그래도 이 드라마를 보며 화낼 수 있을 정도로는 내 몸에 쌓인 ‘미세먼지’를 걷어냈구나.
존재 자체로 소중한 나로 살려면“나는 소중한 존재”라고 아무리 되뇌면 뭐하나, 곧바로 “당신은 존재 자체로 ‘덜’ 인간”이란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니 나로 살려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위계에서 탈주할 수 있을까? ‘남자’ 되기를 그만두고, 정희진이 말한 “선택지 밖에서 선택하기”는 어떻게 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여성으로서 나를, 내 욕망을, 죄책감 없이, 열등감 없이, 온전히 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건방지다”라고 말하지 않고 서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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