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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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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이해하려 했을 때 얻게 되는 것
등록 2018-05-29 22:10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일 필요 발성량이 있는 거 같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말할 사람이 없다. 난데없이 묵언수행 중이다. 퇴사하고 첫 주에는 복날 개처럼 집에서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렸다. 그럴 때면 지난겨울 지하철역 앞에서 본 보라색 점퍼 입은 여자가 떠올랐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라는 날, 퇴근길이었다. 롱패딩으로 꽁꽁 싸맨 행인들 사이, 반백의 여자가 있었다. 낡은 청바지에 봄점퍼 차림이었다. 고개를 45도 각도로 튼 그는 롯데리아 앞에서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허공에 대고 말하고 또 말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식물 통해 들여다본 삶

일일 발성량을 채우려고 성당에도 간다. 신심이 깊어서라기보다 성가 몇 곡을 부르면 하루 필요량을 대충 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동사무소에도 문화 프로그램 같은 걸 물어보러 간다. 편의점 주인아줌마한테도 “날씨가 참 좋죠” 따위 쓸데없는 말을 한다. 3시간 걸려 동물임시보호소에 가 고양이 똥을 치우고 3시간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는 말이 없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혼자 떠들어 민폐를 끼친다. 말 걸어주는 사람은 다 고맙다. 이렇게 1년을 보내면 인류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중얼거리는 증상은 줄어들었다. 어느 날부터 하루 종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조용히 잠들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사람을 도구로 썼다는 걸 말이다. 이제까지 했던 수많은 대화 가운데 진짜 대화는 몇이나 됐을까. 대화를 가장해 내 말을 상대에게 쏟아내왔다는 걸, 그렇게 사람을 내 발설 욕망을 받아내는 그릇으로 이용해왔다.

을 쓴 과학자 호프 자런은 식물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과학자로서의 삶과 식물의 이야기를 병렬로 쓴 이 책에 “이끼에서 세상의 모든 빛”을 발견하기까지 과정을 담았다. 자런은 우리가 결코 식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과학자가 됐다. 인간에게 목재·식량으로만 보이는 식물이 어떤 투쟁을 벌이는지, 식물 관점에 서야 보인다는 거다. 자런의 여정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이 책은 자런의 식물을 향한 연애담이다.

식물의 관점을 빌려 본 삶은 놀랍다. 땅에 뿌리를 박고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한다고 생각했던 식물이 실은 어마어마하게 대담한 도박꾼이다. 적극적으로 환경을 바꿔가는 개척자이기도 하다. “매년 지구의 땅에 떨어진 수백만 개의 씨앗 중 5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만이 싹을 틔운다. 그중에서 또 5퍼센트만이 1년을 버틴다.” 싹을 틔우는 일은 생사를 건 모험인데 그 결정적 순간을 체리나무 씨앗은 100년도 기다린다. 연꽃은 2천 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결단을 내리는 순간 씨앗은 모든 양분을 소진해 뿌리를 내린다. 식물은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이 되어야 한다. 식물은 홀로 살지 않는다. 곤충의 공격을 받은 시트카버드나무는 독특한 유기화합물을 만들어 다시 반격하는데, 동시에 이 화합물을 공중에 분사해 1~2km 떨어진 다른 시트카버드나무들도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돕는다.

대낮 알래스카에서 춤판

C-6. 유전적으로 동일한 여러 실험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종이컵에 심은 C-6은 이상한 행태를 보였다. 이파리들을 이리저리 경련하듯 뒤튼다.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인다. C-6로 자런이 어떤 발견을 한 건 아니다. C-6는 결국 쓰레기통행이 되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C-6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살고 있다.

확연한 실패를 알면서도, 끝끝내 이해하려는 정성이 사랑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상대를 껴안게 됐을 때 이해 불가한 자신도 받아들이게 되나보다. 자런의 실험 동료 빌. 남편도 애인도 아닌데 이 책에선 남편보다 애인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인물이다. 자런에겐 빌이 또 다른 식물이다. 토양 분석 작업 때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땅을 파던 남자, 12살에 집 마당으로 가출해 땅굴을 파고 살았다는 남자, 오른쪽 손가락 반이 없는 남자다. 20대에 만난 자런과 빌은 ‘쥐구멍’이라고 하는 방에 살며 아침·점심은 에너지드링크로 때우는 시절을 함께 견뎠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도 또는 한없이 재잘거리며 여러 날을 보낼 수 있는 사이, 그 곁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이런 장면은 통째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동료 과학자들한테 ‘없는 사람’ 취급당하던 두 사람이 알레스카의 한 언덕에서 벌인 행각을 묘사한 부분이다. 빌이 손가락 탓에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했고 댄스파티에도 못 가봤다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은 듯 털어놓는다. 자런이 말했다. “춤을 춰봐.”

“그는 빙하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내게 등을 보인 채 오랫동안 거기 서서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서서히 원을 그리고 돌기 시작하면서 발을 굴고, 사이사이 훌쩍 뛰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전력을 다해서 빙빙 돌고, 발을 구르고, 훌쩍훌쩍 뛰면서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그리고 자신을 잊은 듯 몸을 움직였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책날개를 보니 호프 자런은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 받은 유일한 여성 과학자다. 글까지 잘 쓴다. 나랑 같은 40대다. 자괴감이 들어 괜히 읽었나 했다. 이 책의 장점은 그에 대한 위로도 담겼다는 것이다. 호랑이가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 자런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

원죄와 부활 사이

그래도 40년은 너무 긴 것 같은데. 그 무엇인가를, 그 누군가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이해하려 한다면, 어느 날 나도 그 안에서 세상의 모든 빛을 볼 수 있을까. 일일 필요 발성량을 채우러 간 성당에서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원죄는 듣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고 부활은 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을 내 깜냥에 죽기 전에 할 수 있을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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